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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소에 갇혀버렸다 !-54화 (54/306)

54. 고민 그리고 결심 (8)

그러자 갑작스러운 차가운 감촉에 놀랐는지 반휘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게 하는 데 성공한 나는 그 반응을 재밌게 바라보다가 손을 거뒀다. 아니, 거두려 했으나 녀석의 볼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너 볼 너무 뜨거운데? 너 여기에 얼마나 서 있던 거야!”

나는 황급히 그의 볼을 두 손으로 붙잡고 소리쳤다. 보통 피부가 하야면 엄청 티 나지 않나?! 너는 왜 이렇게 하얀 건데!

조금 상기되어 있긴 했지만 그건 자세히 보지 않고선 별로 티도 안 났다. 피부가 하얀 사람은 자외선에 약할 거라는 내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것도 인소 버프야, 뭐야! 당황한 나는 황급히 녀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반휘혈은 별 반항 없이 순순히 끌려왔다.

방 안에 들어서자 곧장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우, 저 더운 날씨에 잘도 서 있었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반휘혈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바로 화장실로 가 수건에 차가운 물을 적시고 돌아와 반휘혈의 볼을 감싸 주었다.

“으이구, 바보야. 안에나 있지 왜 밖에서 그러고 있었어. 화상이나 더위 먹으면 어쩌려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에게 한 소리를 했다. 반휘혈은 여전히 얼떨떨해 보였지만 군말 않고 내가 해 주는 냉찜질을 받았다.

“…….”

“너 말이야. 건강한 건 좋지만 그렇게 막 굴리다가 금방 훅 간다? 이게 다 젊은 날의 혈기론 가능하지만 커서 후폭풍이 장난 아니라고.”

그렇게 후폭풍을 맞은 게 바로 나였다. 열심히 몸을 굴린 만큼 서른 살의 나는 온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날씨가 궂은 날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니까 몸 좀 생각하면서 굴려. 어휴…. 아, 이것도 마셔.”

나는 녀석의 얼굴을 골고루 차갑게 해 주기 위해 문질거리다가 뒤늦게 음료수도 가져왔단 걸 떠올렸다. 내 정신 좀 봐.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수분 보충인데! 나는 재빠르게 음료수를 트고 아직까지 멍해 보이는 반휘혈에게 건넸다. 반휘혈은 그것을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다가 어쩐지 멍한 기색으로 받아들였다.

어라, 얘 왜 이렇게 멍하지? 혹시 진짜 더위 먹었나?!

나는 녀석의 볼을 덮고 있는 수건을 잠시 치우곤 볼을 만져 보았다. 열기가 빠지지 않은 볼은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먹었네! 먹었어! 더위 먹었네!

밥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무언갈 먹다간 오히려 더 탈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목이 타긴 했는지 금세 동이 나 버린 음료수를 보자 나는 재빠르게 녀석의 손을 다시 잡아끌어 일으켰다. 반휘혈은 이번에도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그의 침대였다. 나는 반휘혈을 침대에 눕히곤 손수 배까지 이불을 덮어 줬다.

“다른 거 하지 말고 푹 자. 고민도 그 후에 하고.”

나는 시원한 수건으로 녀석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반휘혈은 그런 나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심란해 보였던 방금과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좋게 다가오진 않았다.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전에 발견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놀러 왔는데 아프면 슬프잖아.”

나는 녀석의 삐져나온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반휘혈은 그런 날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곤 슬쩍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돌렸다.

“…….”

“아, 좀 식었네. 다시 차갑게 식혀 올게.”

금세 수건이 미지근해진 게 느껴졌다. 반휘혈의 얼굴은 어쩐지 방금 전보다 붉어져 있었다. 열이 이제야 나타난 건가?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곧 자리에 일어나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차라리 밑에서 얼음주머니를 가져올까?’

수건에 물을 묻히면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금방 식는 수건보다야 역시 얼음 팩이 훨씬 나을 거 같았다. 이건 목에 두르게 해야지. 나는 결심을 내리고 화장실을 나와 반휘혈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나는 순간 발을 멈칫했다. 화장실을 잠깐 다녀온 사이에 녀석의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했나?’

하긴. 더위 먹을 땐 몸이 나른해지긴 하지. 나는 에어컨의 온도를 18도에서 22도 정도로 올려 두었다. 잠이 들면 추워져서 감기에 걸릴 수도 있기에 해 둔 조치였다. 나는 슬며시 차가운 수건을 녀석의 목에 둘렀다. 이러고 있다가 조금 뒤에 치워야지. 얼음주머니도 감기에 걸린 게 아니다 보니 자칫하면 더 안 좋아질 것 같아 그냥 이대로 두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지.’

이번에도 가족일 일 거 같긴 한데…. 물끄러미 잠든 반휘혈을 내려다봤다. 정말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서이수를 바닷물에 담그고 돌아왔을 때 반휘혈은 자리에 없었다. 설마 그때부터인 걸까? 나는 곰곰이 기억을 뒤지다가 문득 반휘혈은 없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한도훈이 떠올랐다.

‘…한도훈, 그 녀석이라면 뭔가 알려나.’

어쩐지 휘혈이 어디로 갔냐는 내 질문에 ‘글쎄요?’ 하면서 뭔가 꿍꿍이 있는 미소를 짓던 것 같기도 하고…? 점점 내 감은 한도훈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턱을 가볍게 쓸곤 잠시 생각에 빠져 흐렸던 초점을 다시 맞춰 반휘혈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작게 속삭였다.

“잘 자. 아프지 말고.”

나는 그사이에 다시 식은 수건을 치워 주고 그가 감기 걸리지 않게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 올려 줬다. 혹시나 선잠이 들어 이 작은 접촉에도 깰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반휘혈은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예쁜 얼굴로 잘도 자네.’

크게 아파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좀 더 그의 안색을 살핀 후,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

달칵,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엔 그를 제외한 인기척은 들리지가 않았다. 반휘혈은 적막한 제 방 안의 공간을 느끼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

그는 눈을 굴려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혼란이 가득했다. 반휘혈은 잠깐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나오는 말은 없었다.

하아.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슴께까지 덮어져 있는 이불을 잠시 동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입을 세모꼴로 앙다물더니, 휙 하고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곧 그의 얼굴이 완전히 덮어져 삐져나온 머리칼만이 보일 뿐 그의 얼굴은 보이지 못하게 가려졌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불을 덮기 전, 그의 얼굴이 한껏 달아올라 있었단 사실을. 이 방을 나선 서이나도, 본인인 반휘혈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

“어, 누나.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밑으로 내려오자 한도훈이 방긋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대체 뭘 알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반사적으로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런데 내가 너무 쳐다봐서일까, 한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묻어 나오는 건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도훈의 고개는 더욱 옆으로 의뭉스레 기울였다.

“한도훈, 너 말이야….”

나는 그의 의문에 맞춰 잠시 녀석을 불러내려 했으나, 말을 꺼내기 전, 내 후각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꼬르륵.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울리는 뱃소리. 나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주변을 훑었다. 그곳엔 시각과 후각을 한꺼번에 유혹하고 있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직까지 배도 못 채운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침을 줄줄 흐르는 것 같은 기분에 입가를 슥 닦으며 한도훈에게 말했다.

“…쓰읍. 밥 다 먹고 나랑 얘기 좀 하자.”

“네?”

나는 일방적으로 한도훈에게 용건을 던진 후, 재빠른 몸짓으로 그릇을 들고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뒷모습을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다른 말로는 사악하게 조용히 웃는 한도훈을 모른 채로 말이다.

그런 그를 목격한 다른 세 사람의 얼굴이 질색하듯 일그러지는 건 덤이었다.

***

“으아, 잘 먹었다.”

정말 끝내주는 만찬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먹어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동안 가장 맛있는 음식은 불고기라 여겼는데! 해산물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구나! 나는 만족스레 부른 배를 두드리며 행복한 포만감에 절여졌다. 거기에 이재현이 준비한 빙수는 또 어떤가. 아주 센스 넘치는 준비성에 최고의 저녁 식사를 보낼 수 있었다. 아, 휘혈이도 이걸 먹어 봐야 했….

“앗.”

맛있는 음식에 홀려 그만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아차 싶어 등받이에 늘어지게 기대고 있던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한도훈을 바라보았다. 한도훈은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녀석은 폰에서 눈길을 떼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까요?”

그리곤 나와 눈이 딱 마주치더니 빙긋 웃으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타이밍에 맞춰 내가 원하는 말을 꺼냈다.

“어, 어어. 그래.”

너무나도 절묘한 그 타이밍에 얼떨떨해진 건 나였다. 당황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한도훈은 자리에 일어서 척척 어딘가로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반사적으로 쫓는데, 문득 자신들을 묘하게 바라보는 서이수를 발견했다.

뭐지, 이 위화감은.

괜스레 기분이 찝찝해진 것 같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만 집히는 구석은 없었다. 속에서 고개가 연신 갸웃거려졌지만 그보단 한도훈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낼지가 더 고민이라 금방 잊어졌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한테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으려나….

쉽게 쉽게 정보를 꺼내는 녀석은 아니다 보니 더 골머리가 아파 왔다. 방법을 모색하길 잠깐, 어느새 한도훈이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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