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고민 그리고 결심 (9)
아, 여긴 얘 방이구나.
들어가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이곳은 다른 객실과는 달리 이것저것 장식이 더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주인을 알리는 것처럼.
뭐, 객실이라 해 봤자 아직 자신과 반휘혈의 방밖에 들어가 보질 않았지만 내용물이 비슷한 걸 보면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아무튼 한도훈 몰래 방을 구경하는데 한도훈이 소파로 가 손짓했다.
“뭐 해요? 안 오고.”
“어, 간다. 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라,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기분인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정체는 금방 깨달았다. 저번에 그의 집에 갔을 때와 비슷했다.
……지난번은 집. 이번엔 별장. 반휘혈의 얘기를 하게 할 때마다 그의 집에 가는 건 무슨 맥락일까 싶었다. 물론 이번엔 나뿐만이 아니라 다 같이 오기야 했지만 아무튼 기묘한 공통점에 나는 저도 모르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세요?”
그리고 그런 내 상념을 끊는 건 한도훈의 질문이었다. 나는 정신을 퍼뜩 차리며 이곳까지 오면서 곰곰이 생각했던 내용을 꺼냈다.
“너 휘혈이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휘혈이요?”
한도훈은 내 물음에 의문스레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생각도 못 한 걸 들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제야 너무 뜬금없이 말을 꺼냈나 싶어졌다. 그래서 눈을 굴리며 좀 더 말을 골라내 입을 열었다.
“분명 아까는 괜찮았는데, 잠깐 이수 잡으러 간 사이에 이상해진 것 같아서. 근데 그때 네가 휘혈이 옆에 있었지?”
솔직히 이건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이게 한계였다. 만약 얘도 모른다면… 역시, 반휘혈이 알려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런데 한도훈은 내 말을 듣더니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제가 그때 휘혈이 옆에 있었어요.”
어라, 진짜 맞았네? 별로 기대치 못한 수확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눈을 껌뻑였다.
“그럼 왜 그런지 알고 있어?”
솔직히 예상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혹시 지뢰라도 밟으면 큰일 아니겠는가. 이제껏 쌓아 온 관계의 탑이 말실수 하나로 인해 무너지는 건 사양이었다.
“네. 알고 있어요.”
“알려 줄 수 있을까?”
가볍게 수긍하는 그의 대답에 나는 신중한 기색으로 물었다. 한도훈은 그런 날 지긋이 바라보며 씩 웃었다.
“글쎄요?”
나는 그런 녀석의 말에 뭐라 말하려다 불현듯 말이 막혔다. 왠지 나를 탐색하는 듯한 그의 눈길이 느껴진 탓이었다. 나는 조용히 벌렸던 입을 다물고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지, 지금 이 상황? 얘 지금 재밌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문득 방금 스쳤던 서이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묘하게 굳어 있던 동생의 얼굴은 무언가 떨떠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서이수는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이 녀석이 무언가를… 아.
“…너구나?”
퍼뜩,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휘혈이 기분 상하게 한 거.”
“에이, 상하게 했다뇨. 조금 생각해 보라고 간단한 질문만 던졌을 뿐인걸요.”
그러자 내 말에 한도훈이 천연덕스럽게 반박해 왔다. 나는 그런 녀석을 서이수처럼 떫게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기분 좋은 녀석을 그렇게 만들어?”
반휘혈이 기분 좋은 날은 손에 꼽기 때문에 더 짜증이 일었다. 간만에 제대로 된 휴가 좀 보내 보려 했건만 막상 초대한 놈이 다 엎어 버리는 모습에 화가 점점 돋기 시작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저라고 좋아서 그런 말을 꺼낸 건 아니라구요?”
한도훈은 억울한 모양이었는지 속상한 듯 입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미간만 모은 채 더 탓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데?”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이 사달이 났는가 이젠 오기로라도 알아야겠다. 무엇보다 한도훈 태도가 마치 지난번처럼 반휘혈의 인생에 간섭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아 보여 나는 결국 이 일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반휘혈이 가장 걱정됐고 말이다.
“무슨 일이 있기보단, 그냥 묻혀 놨던 걸 건드렸다고 하는 게 맞을걸요.”
“건드렸다고?”
뭘? 내 의문에 한도훈은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더니 다시 느릿하게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 휘혈이한테 형이 있다는 거 아세요?”
형?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지난번에 반휘혈이 얘기해 준 내용이 떠올랐다. 그를 버리고 도망친 것과 자기 소유의 오피스텔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한 그의 형 이야기를 말이다.
“알고야… 있지.”
내 대답에 한도훈은 역시나, 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그가 웃었다.
“진짜 휘혈이가 누나를 많이 좋아하긴 하나 봐요? 형 얘기를 스스로 꺼내다니.”
평소의 그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한도훈은 너스레를 떨어 댔다. 나는 그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지 몰라 묘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도훈은 그런 내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가 건든 건 형 얘기예요. …그리고 전 그것밖에 알려 줄 수 없어요.”
그런데 진실을 말해 줄 것처럼 굴던 한도훈은 눈썹을 불쌍히 모으며 말을 흐렸다. 생각도 못 한 그의 대답에 당황해하는데 한도훈은 고개를 저으며 내가 재차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말을 끊었다.
“이 이상은 너무 개인적인 거다 보니… 자세한 건 휘혈이한테 직접 들으세요.”
“…….”
나는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거….’
조용히 그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건들기 꽤나 애매한 내용이었음이 확실했다. 나는 그 사실에 눈을 가늘게 뜨며 한도훈을 노려봤다.
“너 진짜 이상한 말 안 했지?”
뭐가 됐든 그 사적인 내용이 반휘혈을 건드렸다는 건 틀리지 않았다. 내가 서이수를 잡으러 간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고 그사이에 반휘혈의 기분을 팍 상하게 만든 일이 발생한 거였다. 새삼스럽지만 녀석의 말재주는 반휘혈과 다른 방향으로 재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얘가 너무 고분고분해 잊고 있었지만 첫 만남에서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걸 떠올린 건 덤이었다.
“이상한 말 안 했다니까요? 참.”
한도훈은 천연덕스레 내 말을 부정했다. 그는 오히려 속상한 듯 눈썹을 모으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전 다 휘혈이를 위해서 한 말이에요. 알잖아요. 제가 얼마나 휘혈이를 위하는지.”
나는 그 말에 못마땅하게 입을 다물었다. 한도훈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확실히 그는 반휘혈을 꽤 생각한다는 걸 그간의 짧은 시간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찝찝할까. 한도훈의 모난 성격 때문에 그런가? 나는 정확히 잡히지 않는 해답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결국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아,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니깐 넌 알려 줄 생각이 없다 이거지?”
그래. 결론은 이거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볼일은 없었다. 그래서 난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하지만요.”
그런데 한도훈은 느긋한 말로 내 발을 붙잡았다.
“휘석이 형, 그러니까 휘혈이의 형이 휘혈이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돌렸던 몸을 돌이켜 한도훈을 바라보았다. 한도훈은 그런 날 향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휘석이 형에게 부탁을 받았고 말이죠. …제가 그 두 형제한테 약해서 말이에요.”
한도훈은 미소가 씁쓸하게 바뀌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참 피곤하겠다.”
“……어쩌겠어요. 잘못 꾀인 제 잘못이죠.”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곤 다시 평소의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일어서 내 등을 밀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넌 매번 어려운 부탁을 잘도 하더라?”
하하하. 한도훈이 내 말에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그러더니 내게 조금 가까이 다가와 친근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만큼 제가 누나를 신뢰하고 있단 증거인 거, 알죠?”
눈웃음을 그리며 한도훈이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말대로 가볍게 말하는 뉘앙스와 달리 그의 눈은 진중히 빛나 신뢰의 뜻을 담고 있었다.
“…으이구, 말이나 못 하면.”
“아얏.”
하지만, 나는 그 눈빛이 왠지 모르게 낯간지러워졌다. 그래서 오히려 얼굴을 구기곤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가볍게 날려 버렸다. 그러자 한도훈은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엄살을 피웠다. 나는 그런 녀석을 싱겁게 바라보며 웃다가 손을 뻗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잘 말해 볼게.”
한도훈은 내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음을 짙게 그렸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기에 나는 녀석에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
한도훈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엔 장난으로 모른 척했지만 점점 그녀와 얘기하다 보니 진심이 되어 버렸다. 서이나는 참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쩐지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하려고 생각도 안 했던 말까지 내뱉게 만드는 힘을 가진 그런 사람.
…가끔씩 그런 그녀를 마주할 때면 자신과 같은 또래가 맞을까 싶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는 제 또래에게선 볼 수 없는 희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반휘혈이 더 매달린 건지도.’
한도훈은 반휘혈의 심정을 추측하며 두드려진 제 어깨를 매만졌다. 그녀의 의젓한 그 분위기는 왠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아니, 주위에 있는 어른들보다 더 의지하기 쉬운 것 같았다. 또래의 친근한 누나처럼 굴다가도 그 누구보다 연상이란 걸 상기시켜 주는 사람. 그게 바로 서이나였다.
“확실히 휘혈이에게 필요한 사람이긴 하네.”
…물론 나한테도. 한도훈은 마지막 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어쩐지 방금 저를 격려해 준 것 같은 그 태도가 잔상처럼 남은 것 같았다. 그는 그게 왠지 쑥스러워져 머리를 헝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