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고민 그리고 결심 (10)
***
“응?”
한도훈의 방을 나와 다시 반휘혈의 방을 향하고 있던 때였다. 문득 1층을 내려 보다가 대문을 빠져나가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저렇게 단단하면서도 호리호리한 뒤태를 가진 검정 머리는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선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녀석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밥 먹는 시간이 하도 오래 걸리다 보니 오후 10시가 다 넘어가고 있었다. 이 오밤중에 혼자서 대체 어딜 가는 걸까? 마침 보러 가려던 찰나였기에 반갑긴 했으나 의아함에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으음….”
그래도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른으로서 쟤 혼자 밤거리를 나돌아 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이 근처가 거의 다 한도훈네 사유지라 할지라도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 아니겠는가. …뭐, 기왕 얘기하는 거 시원한 방 안에서 하고 싶기도 한 마음이 없잖아 있기도 했다.
“에효, 어쩔 수 없지.”
이미 나간 녀석을 다시 붙잡고 집 안으로 들어와 얘기하는 것도 그랬다. 그리고 방금도 베란다를 선택했던 걸 떠올리면, 막힌 공간이 아니라 트인 공간을 원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그에게 볼일이 있는 나의 선택은? 아주 간단한 답밖에 없었다.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반휘혈의 뒤를 쫓아 대문을 나갔다.
자, 어디에 있으려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녀석이 안 보인다.
‘…어라, 어디 갔지?’
내가 너무 늦장을 부렸던 건지, 아니면, 반휘혈의 걸음이 빨랐던 건지 방금 나간 뒤통수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난처함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우…. 이 주위는 왜 이렇게 어두워.”
무섭게시리. 주변을 돌아다닐수록 점점 어깨가 위축되었다.
‘으, 나 이런 깜깜한 길은 질색인데. 뭐라고 나올 거 같아….’
나는 팔을 슥슥 문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이렇게 어두운데 얘는 무섭지도 않나 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그리고 한도훈네는 돈도 많으면서 이 주변에 가로등도 설치 안 하고 뭐 했대! 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봤다. 어쩐지 으슥한 길이 초조함을 더 불러일으켰다.
후웅-, 바스락.
“히익…!”
갑작스러운 소리에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자세히 보니 바닷바람에 의해 굴러다니는 쓰레기였다.
“까, 깜짝 놀랐잖아…!!!”
한순간 너무 식겁해선지 다리가 다 떨려 왔다. 나는 이곳에 쓰레기를 버린 몹쓸 인간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구명줄처럼 핸드폰을 꾹 쥐었다. 아, 안 되겠어. 그냥 전화를…,
“응?”
저기에 뭔가가…. 문득, 먼발치에 있는 해변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귀, 신?”
에이! 설마! 나는 말하자마자 붕붕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머리도 저것의 정체가 방금 나간 반휘혈이라고 답을 알려 주고 있었다.
“휘, 휘혈이일 거야. 휘혈이… 휘혈이 맞지…?”
다만 머리에서만 그러고 있단 게 문제였다. 달빛 아래서 파도가 부딪히는 너머로 보이는 그 인영은 어쩐지 그 존재감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래선지 현실감과 동떨어지는 그 존재에 자꾸만 불안감이 세차게 달렸다.
반휘혈이 맞다는 이성과 달리 내 몸은 그런 의사를 무시하는 것처럼 자꾸만 덜덜 떨려 왔다. 얼굴 근육은 이미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몰라 자꾸만 경련이 일어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약, 마아안약에! 지지지지진짜, 저, 저게… 귀신이라면…?’
한번 든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눈에 눈물까지 고일 지경이 되고 있었다. 꿀꺽. 난 파들파들 떨려 오는 눈꺼풀을 느끼며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에, 에이. 아, 아, 아닐 거야. 응! 그렇고말고!”
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휘혈이한테 전화나 해 볼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전화번호부를 뒤져 반휘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빨리 받아라…!!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통화음이 자꾸만 조급하게 만들었다. 전화를 건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지만 지금의 내겐 그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초조하게 손을 입가에 대고 이를 딱딱 부딪히며 발을 동돌 굴렸다. 흐엉, 얘는 도대체 왜 안 받는…!
[…왜.]
받았다!!!!!
나는 연결된 통화에 그제야 안도했다. 그리고 전화가 연결된 동시에 저 멀리 서 있는 무언가가 팔을 들어 올리는 게 마치 통화를 받는 모양새였다. 저 인영의 정체가 반휘혈 본인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난 뭉쳤던 어깨가 이완되어 갔다.
“…아니,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로 나왔나 싶어서.”
반가운 목소리에 한층 마음이 편해진 나는 긴장으로 굳었던 목을 주무르며 본래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언제 두려움에 떨었냐는 듯 최대한 평범하게 말을 걸어 주었다.
[…….]
그러자 반휘혈이 말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봐도 날 찾는 모양새였다. 그러다가 그는 완전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곧 뚝 멈추는 몸짓에 그가 날 발견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언제부터….]
생각도 못 한 내 등장에 놀란 모양인지 반휘혈의 말이 늘어졌다. 나는 그에 어깨를 으쓱이며 녀석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방금. 너 나오는 거 보고 따라 나왔지. 너 발 되게 빠르다. 언제 거기까지 간 거야?”
하긴. 평소에도 쟤 보폭 맞춰 주기 좀 힘들긴 했지. 저 녀석이 한 걸음 걸을 때 나는 보통 두세 걸음이 기본이었던 걸 떠올렸다. …쳇, 키 커서 부럽다? 새삼 자신의 작은 키가 불만스러워졌다.
아빠는 곰처럼 컸지만 엄마는 달랐다. 아무래도 내 키 유전자는 엄마를 닮은 게 분명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cm만 더 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중학생 때 닫힌 성장판은 155cm에 멈춰선 더 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성격이나 삶은 거의 다르더니만 왜 신체 성장만은 이렇게 똑같을 일인가. 기왕이면 얼굴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더 예뻐져도 되지 않나?! 빙의물 주인공들은 거의 다 그러잖아!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비정했다. 원래 원하는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 아니던가. 아무리 한탄해도 자신의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에 입을 삐죽 내밀며 잠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반휘혈의 근처에 거의 다다랐다. 나는 폴더를 가볍게 닫아 아직까지 연결됐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
“…….”
반휘혈은 그런 내 인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안녕.”
제 목소리로 하는 인사가 아직도 낯선지 반휘혈은 입을 열면서도 어색해했다. 다리 밑 사건 이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이제는 문자가 아닌 제대로 인사를 해 준다는 점. 그전부터 노력의 조짐이 있긴 했지만 지금에 와선 참으로 장족의 발전이 아니겠는가. 나는 괜스레 뿌듯해져 히죽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건드렸다.
“우리 동생님은 무슨 일로 이렇게 나와 계실까~. 밤바다 구경?”
물론 구경하러 나온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대놓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섬세하지 못한 것 같아 내 나름대로 배려한 일이었다. 그래서 괜히 더 능글거리며 말을 걸었는데 반휘혈은 그런 내게 가는 시선을 보내 왔다.
“……뭐야?”
대놓고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조심을 해도 의심받고 있는 이 상황. 억울해해도 되는 거 맞지? 야박한 반휘혈의 태도에 빈정이 상해 버린 난 바로 입을 삐죽 내밀며 좁혔던 거리를 벌렸다.
“…인정머리 없는 자식.”
“뭐?”
“아무것도 아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욕하는데 그걸 또 들었나 보다. 반휘혈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난 모르쇠를 일관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래서 진짜 여긴 왜 나와 있는 건데. 방금 전의 연장선인 거야?”
“…….”
말을 돌릴 겸 이곳에 나온 목적을 슬쩍 흘리자 이번엔 반휘혈이 나를 외면했다. 정말 수상쩍은 모습이었다.
혹시 나랑 관련된 건가?
불쑥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웬만한 일이라면 이 녀석은 대부분 내게 알려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는 반휘혈의 모습은 꽤나 낯설게 다가왔다. 비록 우리가 만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였지만 그의 인간관계에서 내가 차지한 위치는 꽤나 큰 자리란 건 자타 공인 수준이었다.
‘나한테 뭐 잘못했나?’
그렇다면 가장 적합한 추측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서 이 녀석이 딱히 내게 잘못한 기억은 따로 없…,
‘아니, 있었나?’
어쩐지 의심 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다리 밑 사건 이후로 이 녀석이 나를 너무 졸졸졸 따라다니길래 장난삼아 내가 예뻐도 그렇게 좋아하면 안 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마자 ‘…진심이야?’ 하고 정색했다든가. 오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내 하교 시간에 맞춰 불쑥 찾아와선 야자하느라 학내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을 뒤집게 만들어서 내가 후문으로 도망친 사건이라든가. 서이수랑 얘기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껴서는 내 볼을 양손으로 꾹꾹 누르며 이유 모를 화풀이를 하더니 뜬금없이 못생겼다고 말하곤 떠났다든가….
‘어, 생각보다 많은데?’
떠올리다 보니 점점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더 화나는 건 그렇게 알게 모르게 내 성질을 건드린 게 저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은 너무 어처구니없고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별로 의식을 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건 괴롭힘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혹시 얘가 그걸로 죄책감을…
‘가질 리 없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던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반휘혈을 흘겼다. 저 뻔뻔한 자식은 저런 걸로 죄책감을 가질 위인이 못 됐다. 예전에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둥 심한 말을 내뱉었어도 내가 직접 사과해 달라고 말하기 전까진 제 잘못을 제대로 인지도 못 한 녀석이 바로 이놈이었다. 그러니 저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연연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