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고민 그리고 결심 (11)
그럼 진짜로 뭐지? 아직 나한테 말 못 할 비밀이 남아 있었나?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정황이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빠지는 오리무중에 결국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도훈이가 얘 형 이야기도 꺼낸 걸 보면 이쪽이랑도 관련 있나?’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는 반휘혈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려 시원하게 철썩이는 바다를 보았다.
밤바다는 어두웠다. 하지만, 저 멀리 어선이 켜 놓은 불빛과 환한 달빛으로 인해 칠흑으로 덮이진 않았다. 거기에 고요히 울리는 파도 소리가 어쩐지 방금까지 복잡했던 머리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각에 잠기기 좋은 풍경이었다. 혼자라면 무서워서 나오지도 못했겠지만 나보다 머리 하나는 훨씬 큰 녀석이 옆에 있어서인지 그리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기 힘든 운치 있는 풍경에 녀석으로 인해 심란했던 기분마저 파도에 쓸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 어차피 난 머리 쓰는 거랑은 거리가 멀었지.’
요 몇 년 사이에 하도 써먹질 못해 녹슬었던 뇌가 너무 열일을 했던 탓일까, 나답지 않게 너무 고민했다. 서이수도 철이 들기 시작한 요즘이다. 이젠 중노동에 시달려 파업을 외치는 머리를 조금은 쉬게 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하는 것보다 행동이 더 앞선 게 바로 나이지 않던가. 이건 이전의 삶에서도, 원래의 서이나에게도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반휘혈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게 다였다. 해결된 건 하나 없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는 미소를 은은히 달며 바다를 바라보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너도 앉아.”
툭툭 녀석의 발 부근을 두드렸다. 손바닥 너머로 전해져 오는 모래는 열기 가득했던 낮과는 달리 서늘한 기온을 품고 있었다. 그 낯선 감촉에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비비적거렸다. 그런 와중에 옆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풀썩 내려앉았다. 확인해 보니 나처럼 모래사장 위에 앉은 반휘혈이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발견하곤 반가이 웃다 시선을 돌려 다시 바다를 구경했다.
“낮엔 되게 더웠는데 지금은 시원하네.”
선선히 부는 바닷바람이 머리를 간질였다. 그 기분 좋음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즐겼다.
‘바다도 나쁘진 않네.’
생각해 보면 낮에 서이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바다에 들어갔었던 것도 그리 불쾌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는 녀석의 영문 모를 괴롭힘에 열이 뻗쳐 달려들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바다에 뛰어들어 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거기에 더해서 한도훈이 준비한 최고급 별장과 뷔페 요리는 확실히 환상적이었고, 지금은 이렇게 반휘혈과 함께 밤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어떻게 보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어쩐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바다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뀐 기분이었다.
지잉--.
고요한 파도 소리만 울리고 있던 그때, 적막을 깨는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옆에 놔두었던 핸드폰을 봤다. 하지만 내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반휘혈을 보니 그는 말없이 폰 액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라? 왜 저러지? 평소라면 그냥 꺼 버리든가, 덮어서 무시할 법도 한데 그냥 묵묵히 눈살만 찌푸리고 있는 게 이상했다. 호기심에 슬쩍 액정을 몰래 보자 환한 화면엔 단 하나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형]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동시에 그 소리에 지레 놀라 버려 황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묵묵히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눈을 지그시 꾹 감았다. 그러곤 그것을 모래사장 위로 던지듯 덮어 버렸다.
“…….”
조금 놀랐다. 평소의 그는 누가 연락을 해도 무시하거나 귀찮다는 반응에 일가견 있는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신경 쓰는 기색을 내비친 건 처음이었다.
역시 형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점점 확신마저 드는 가설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반휘혈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러곤 얼굴을 쓸며 내보인 눈은 침잠하게 가라앉은 것 같아 보였다.
그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바다로 옮겼다. 여전히 파도는 잔잔히 흘러 운치 있는 정경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멀거니 보다 툭, 하고 말을 던졌다.
“형이 너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도훈이가 그러더라.”
옆얼굴에 시선이 닿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형, 싫어해?”
“…….”
내 평이한 질문에 그는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어차피 듣고자 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이미 난 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휘혈이 형의 오피스텔에 머물렀던 그 시점부터, 그는 형을 마냥 미워하는 것이 아닌 애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서이수가 내게 삐쳐 있을 때와 비슷하단 걸 어느 순간 느끼고 있었다.
“…미워.”
“응?”
그런데 기대도 안 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말이 없을 거란 예상과 달라서 놀란 마음에 옆을 돌아보니 반휘혈은 무릎을 세워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날 버리고 갔어.”
주어는 없었지만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 시작될 무거운 서막을 알려 주는 그 대사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아버지라고 하는 작자가 내연녀를 집에 들였을 때, 형은 바로 집을 나갔어.”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의 담담한 어조가 우리 사이의 공백을 채워 넣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은… 알고 있었던 거야. 그 인간이 바람피우고 있었다는 걸. 내연녀나 아이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도 않더라. 그냥, 그냥 그 인간들을 경멸하듯 바라보면서 날 끌고 방으로 데려갔어. 그리고 곧 그 인간이랑 형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문 앞에서 눈을 감은 채로 귀를 막고 있었고. 그냥,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어.”
그리고 형은 다음 날에 바로 집을 나갔어.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의 힘줄이 불거졌다.
“형이 나가는 걸 보고 가지 말라고 매달렸어. 갈 거면 나도 데려가라고. 그런데 형은… 안 된다고, 거긴 아직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면서 나한테 건강하게 잘 있으라고 하고 떠났어.”
그의 말이 끝나자 한차례 고요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오갔다.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손만 움찔거렸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그런데 거기가 어딘지 알아?”
돌연 그가 픽,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꺼냈다. 나는 방황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반휘혈은 파묻고 있던 얼굴을 조금 들어 멍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군대야.”
“…군대?”
어, 잠깐. 군대… 군대?! 그때 반휘혈이 초등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둘이 나이 차가 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 그건… 못 따라갈 만하지. 나는 눈을 어색하게 굴렸다.
‘그러니까 휘혈이 형은 군대로 도망갔다고 봐도… 되나?’
거참. 고를 곳이 없어서 하필 군대로… 물론, 대한민국에 태어나 사지 건강한 남자라면 가는 게 맡긴 하지만… 그래도 뜬금없는 반휘혈의 형의 결정에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어유, 얼마나 아버지가 징글맞았으면 군대로 갔겠어.’
그래도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건 아니다 보니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실은 나도 프로 선수에서 은퇴하고 난 뒤, 아빠가 꼴도 보기 싫어서 입대할까 아주 진지하게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결국 남은 엄마가 걱정돼서 포기했지만.
“어… 휘혈아. 혹시 형 지금도 군대에 있는 거야?”
그러면 녀석의 형은 군대에서 동생한테 전화를 걸고 있는 거…? 헉, 이건 좀 많이 불쌍한데.
왠지 짠해지는 그의 형에게 동정이 가려는데, 반휘혈은 코웃음을 치며 부정했다.
“이미 제대했어.”
“…어?”
“더 화가 나는 게 이거야.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거 버젓이 알고 있으면서….”
으득, 살벌하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하자마자 유학 갔어.”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누구 한 명 죽일 듯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모양인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살벌하게 힘줄이 튀어나온 제 팔을 꽉 쥐었다. 난 그 모양에 합죽이가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슬쩍 눈을 돌렸다.
‘이건… 미워할 만했다.’
차마 변호하기 힘든 현실에 나는 조용히 그의 형을 외면했다.
도훈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쉴드 불가야. 여전히 반휘혈의 가정 환경은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이젠 좀 적응이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떻게 파도 파도 계속 나올 수가 있지? 어떻게 보면 참으로 경탄스러운 가족이었다.
이 새로운 사실들에 땀이 저절로 삐질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반휘혈의 가정에 대한 불신과 원망은 골이 깊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가 나에게 집착하는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진짜로 의지할 곳 하나 없었구나….’
새로운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음….”
나는 잠시 모래사장만을 난처히 바라보다가 뺨을 긁적였다. 그러다 곧 그의 곁에 슬쩍 더 가까이 앉았다. 그리고 녀석의 등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하는 몸짓이 전해졌을까, 반휘혈의 눈길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 눈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해 줄 말은 없어서 뒷목을 문지르며 등만 토닥여 줬다.
반휘혈도 그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멀거니 나를 보더니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그러곤 툭, 하고 나에게 몸을 기대었다. 난 잠시 그런 녀석을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 몸을 물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손길을 멈추지 않은 게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