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58화 (58/306)

58. 고민 그리고 결심 (12)

***

“……역시 달라.”

“응?”

한참 동안 멍하니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 그리고 조명 켠 어선만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중 반휘혈이 불쑥 중얼거렸다. 나는 뜬금없는 말에 눈을 깜빡이며 반휘혈을 보자 그는 어쩐지 개운하면서도 단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라앉아 흐려져 있던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뭐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뭔가 있었나.

이번에도 좀체 의심 가는 구석이 없었다. 뭐… 그래도 내 위로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고 보면 되는 건가?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겠거늘 하며 나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정리됐으면 슬슬 들어갈까? 으-, 좀 춥네.”

차가운 모래사장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반휘혈의 상태가 호전된 걸 확인하자마자 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긴장이 풀렸는지 순간 오싹하니 한기가 몰려왔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북북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휘혈은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자신의 옷을 슬쩍 보았다.

“아, 휘혈이 넌 안 추워? 내가 좀 추위를 타는 편이라… 흐하.”

같은 반팔 상태인데 추위 타는 게 이상해 보였을까? 나는 멋쩍게 웃으며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그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반휘혈은 내 말이 무언가 언짢았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반박하려 했으나, 곧 못마땅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흐려 버렸다.

“왜?”

“아니야.”

그런 그의 이상한 행동이 의아해 되물어 보았지만 반휘혈은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지 뚱한 기색으로 말을 자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 긴 다리가 척척 앞으로 향하자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나는 그 속도에 기겁하며 황급히 뒤를 쫓았다.

“야! 나만 두고 가지 마!”

여기 혼자 있으면 무섭단 말야! 뒷말은 쪽팔려서 꿀꺽 삼켰다. 반휘혈은 그런 나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신속히 별장으로 향하기만 했다.

“제발 좀 같이 가자!!!”

처절한 비명과도 같은 내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울려 퍼졌다. 그렇게 우리들의 여름휴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

짧은 방학이 지나고 여름 보충 수업이 시작됐다. 새까맣게 타고 온 나를 향해 반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가장 먼저는 이혜인이 내게 달려들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나야, 바다 어땠어? 재밌었어?”

“음-, 나쁘진 않았어.”

첫날은 바다에서 놀고, 둘째 날은 스파에서 충분한 휴식. 그리고 셋째 날은 근처에 있다는 놀이공원까지 방문한 뒤 불꽃놀이까지 즐기고 왔다. 이 정도면 아주 알차게 논 것 같았다. 정말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던 휴가였다.

조금 흠이 있다면, 나도 예상치 못했던 내 불심 검문으로 서이수와 그 친구들이 술 마시고 있던 걸 발견했던 일일까. 그냥 엄마가 몇 번을 해도 전화를 안 받는다고 내 쪽으로 연락이 와 재촉에 못 이겨 서이수를 찾으러 나섰다가 우연찮게 발견했다. 내가 뒷목을 잡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서이수의 귓불도 같이 말이다.

‘아악!! 나 아직 안 마셨어! 안 마셨다고! 나 억울해! 억울하다고! 야, 한도훈! 악!!!’

‘시끄러! 너 손에 잔 든 거 다 봤어!’

비록 서이수가 억울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이미 술잔을 들고 있던 시점부터 아웃이었다.

물론 호기심과 치기 어린 마음 다 이해한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술 찾는 거야 흔하다고 듣기도 했고! 그리고 이렇게 놀러 왔으니 얼마나 들떴겠는가! 하지만 그건 내가 모를 때 이야기였다. 나는 바로 모든 술을 압수했고 그 자리를 파투 내게 했다. 당연히 내게 너무하다는 야유가 빗발쳤지만 항의는 링 위에서 받겠다는 한마디에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런 답답한 일이 있었지만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반휘혈이 그 자리에 없었단 점이었다. 서이수의 말로는, 제의는 했지만 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것 같다고 했었다. 그래서 걱정돼 다시 찾아가 봤지만 반휘혈은 곧 말해 주겠다며 걱정 말라는 듯 나를 돌려보내 버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근심 어린 기색은 없어 보여 나도 마음 편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진은 없어?”

“응?”

이혜인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와 회상에서 벗어났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깜빡이다가 뒤늦게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있어. 근데 많이는 없고….”

나는 사진 폴더를 뒤적여 사진을 찾았다. 폴더엔 음식이랑 다 같이 찍은 사진 몇 장과 엄마의 재촉을 못 이겨 찍은 내 단독 샷과 억지로 같이 찍은 나와 서이수 사진이 다였다.

실은 이번 휴가 사진을 한도훈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한도훈네가 고용한 사진 기사가 우리들을 찍어 주고 있었다고 한다. 그걸 들었을 땐 소름이 돋았지만 한도훈이 너무 천연덕스럽게 말해 내가 이상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서이수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이 같이 질색해서 내가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해 줬다. 그래서 다 같이 항의하니 한도훈은 이해가 잘 안 가 보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다음부턴 사전 동의를 얻겠다는 서명까지 받아 냈다.

어쨌든 인화된 사진은 따로 출력해서 보내 준다 했으니 곧 오겠지. 지금 당장은 내가 폰으로 간단하게 찍은 사진밖에 없었다. 나는 사진을 휙휙 확인하곤 보여 주기 위해 고개를 드는데,

“뭐, 뭐야.”

수많은 쌍의 눈이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관심에 기겁한 난, 나도 모르게 발을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역시 그 서이수랑 같이 놀러 간 거지?”

“혹시 반휘혈이랑 한도훈도 갔어?”

“시원이, 시원이는?!”

“우리 재현이도 같이 갔어?!”

그러자 기폭제가 된 것처럼 반 아이들이 우르르 내게 몰려왔다. 나는 당황해서 어버버하다가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혜인아! 도와줘!’

‘미안해!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애들이 길을 안 비켜 줘!’

하지만 연약한 이혜인은 나를 가로막은 인파에 이리저리 튕겨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안타까운 모습에 입을 틀어막으며 날 에워싼 아이들을 제지했다.

“애들아, 진정. 진정해.”

그동안 한두 번씩 체육관에 다니는 녀석들의 근황을 물어본 적이 있다 보니 이 상황은 그리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좀체 적응이 안 되다 보니 처음에 당할 땐 얼마나 당황했던가. 이번은 우리 체육관에 도방중 일진 써클 랭커들이 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보단 적은 수였으나, 여전히 위세는 만만치는 않았다. …아마 바다에 같이 놀러 갔단 사실이 들키면 온 학교가 떠들썩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 가족 여행 다녀온 거야.”

그러니 내가 할 말은 정해졌다. 단호한 나의 말에 모여 있던 모두가 실망 어린 낯이 되더니 언제 모였냐는 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 광경에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이혜인에게 다가가…려는데,

“저기, 그럼 이수 사진은 있는 거지?”

…응?

“맞아! 가족 여행이라며!”

“동생이니깐 찍은 거 한 장이라도 있지 않아?”

“체육관 사진 보니깐 이수 몸 좋아 보이더라. 어린데 일도 잘하고!”

경악했다. 진심으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내 눈앞에 있는 애들을 보았다. 방금의 인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였으나 세 명의 여자애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서이수 패애앤?! 우욱! 생각했더니 토할 거 같아!

내가 느끼기에도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진 게 느껴졌다. 아니, 진짜로! 진짜로 서이수 팬이 있었다니?! 있을 수 없는 현실에 나는 그 아이들의 눈 하나하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 안과 가 봐.”

“우리 이수는 어땠어? 수영복 사진 있어?”

“막, 막 복근도 있어?!”

“이나 님! 이나 언니! 제발 사진 공유 좀!! 아니, 팔아 주세요! 제가 사겠습니다!”

하지만 내 뼈 있는 조언은 단번에 무시당했다. 얘들아! 언니는 너희를 위해 진지한데! 통탄할 만한 현실에 벼락 맞은 충격을 받은 난 어깨를 붙잡혀 흔들리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사생활 보호입니다. 가세요.”

훠이, 훠이. 손을 내저으며 쫓아내자 세 사람은 야유를 퍼부었다.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같은 반 동급생 의리로 팔아 달라나 뭐라나….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한 귀로 흘려 내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 수업 시작종이 쳤다.

‘어우, 피곤해….’

한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피곤한 아침이었다.

***

“…그게 네가 원하는 거냐?”

중후한 원목 가구가 진열된 서재 내부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렀다. 남자는 방 안의 손님을 보지도 않고 있었으나 그 손님은 개의치 않은 기색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남자는 그것만으로 대답이 되었던 모양인지 별다른 힐책 없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비서에게 말해 두지.”

그 말에 서재의 손님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탁, 매정히 닫히는 문에 남자는 그제야 몸을 돌려 그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보는 그의 손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여러 과목이 적힌 가운데 1이라는 숫자가 가장 돋보였다. 그는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러한 한숨을 들을 일이 없고 관심조차 없는 손님이자 서재 주인의 아들인 반휘혈은 냉랭한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까지 그는 혐오스러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참아 냈다. 그에겐 이곳까지 찾아와 전해야 했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소리와 동시에 반휘혈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한동안 마주치지 않았던, 만나고 싶지 않았던 존재를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제 건너편에서 굳어 있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아이는 겁을 먹은 건지, 긴장을 한 건지 모를 모양새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그런 아이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무시하고 지나갔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어. 그는 아이를 지나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 아이의 어미라는 작자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보였다면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신경이 어떻게 터질지 몰랐다.

반휘혈은 그렇게 한참을 걸어 제 방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누구의 출입도 금하는 것처럼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하아….”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몹시 피로한 기색이었다. 반휘혈은 잠시 멍하니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손가락 틈 사이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남는 손으로 허공을 대보며 작게 손짓했다.

“…이 정도, 되나.”

제 허리보다도 더 낮은 위치를 재 보던 그는 곧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 하는 짓거리인지. 그는 스스로에게 욕을 뇌까리며 혐오에 치 떨었다. 그리고 베개를 제 얼굴에 덮으며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곁에서 낮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반휘혈은 처음엔 그것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곧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손이 느릿하게 알림을 확인했다.

[한도훈 (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곧장 다시 끄려고 하는데 터치를 잘못 눌렀는지 알림 창에 있던 게 열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무시하려 했다. 한도훈의 연락을 무시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바다에서 찍은 사진이야! 이거 이나 누나 꽤 잘 나왔지?]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 나자,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로 물을 튀기며 말갛게 웃고 있는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반휘혈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바보 같아 보여.”

그는 제가 무슨 얼굴을 하는지도 모른 채. 어느샌가 한껏 풀어진 기분으로 그렇게 한동안 계속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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