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예상치 못한 통보 (1)
***
“나 미국 가.”
“푸웁-!!!”
토요일 점심. 같이 밥 먹자고 불러내더니 다 먹고 나서 하는 말이 바로 이거였다. 나는 물을 마시다 반휘혈의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제대로 물을 뿜어내고 말았다. 그동안 만화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물 뿜기가 실제로도 가능하단 걸 체감한 순간이었다.
“가, 케헥, 갑, 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티슈로 뱉어 낸 물을 닦아 내며 들은 말을 재차 확인했다.
“다음 주에 미국으로 떠나.”
“뭐, 어어어?!”
연이어 터진 폭탄이었다. 난데없는 이 소식에 기함해 소리치자 반휘혈은 여전히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말했다.
“월요일 오후 1시 45분 비행기야.”
“월요일? 그럼 이틀 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웬 미국이야?!”
제 할 말만 툭툭 내뱉는 꼴에 답답해진 난 테이블을 탕! 치며 물었다.
“제대로 정리하려고.”
“…정리?”
뜬금없이 무슨 정리? 해소되지 않는 의구심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형을 만나고 올 거야.”
그리고 바로 펴졌다. 하지만 이번엔 놀라움과 당황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형?”
형을 만나고 온다고? 갑자기? 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결심을 내린 건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이어지는 정보가 당혹스러워 말을 못 잇고 있으니 반휘혈은 그런 나를 향해 작게 웃었다.
“언젠 잘 지내 보라며?”
“그, 그야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 거지! 이렇게 갑자기… 빨리 마음을 바꿀 줄은 몰랐다고.”
장난스레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니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괜히 민망함이 차올라 툴툴거리며 말하자 반휘혈은 재밌었는지 작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훗, 그러게.”
…소름 돋았다. 훗. 훗이라고…??? 아니, 내가 방금 그 유명한 훗. 소리를 들은 거야? 이제껏 녀석이 웃은 것을 목격한 건 무음으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거나 그냥 표정만 미소 짓고 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방금 그 소설에서 볼 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놀라운 건 저게 왜 이렇게 어울리는지 모르겠어! 이게 얼굴의 힘인가?! 이게 바로 개연성…!
“…나도 이렇게까지 쉽게 결정할 줄은 몰랐는걸.”
놀라운 사실을 목도해 속으로 난리를 치고 있는데 반휘혈이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 소리에 가출했던 정신을 돌이키며 똑바로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나?’
위태롭기만 해 보였던 이전의 그와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좀 더 단단해졌다고 할까? 잠시 생각에 잠겨 내리깔아져 있던 반휘혈의 눈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미소를 더 깊게 그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은 어딘가 편해진 모습이었다.
“…그래. 그럼 언제 돌아와?”
그렇다면 내가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당황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어 주며 귀국 일정을 물었다.
“아마 반년 정도.”
“반년? 그럼 학교는?”
“교환 학생으로 가는 거야.”
“아~. …응?”
잠깐만. 도방중에 교환 학생 제도가 있었던가? 아니, 그보단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그거 신청하려면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가는 거지?
“너 학교 성적은…? 그거 없어도 갈 수 있는 거야?”
보통은 교환 학생 대상자로 심사를 거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물론 반휘혈이 아버지를 뒷배 삼아 밀어 넣었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의 드높은 자존심과 받아 온 상처를 생각하면 그런 일을 했을 거라고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건….”
아니나 다를까 반휘혈의 말끝이 흐렸다. 근데 뒤가 구리다기보단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 모습에 내 시선은 당연스럽게 가늘게 좁혀졌다. 거기에 반휘혈은 내 시선까지 슬쩍 피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튼, 오늘은 나랑 놀아.”
“야, 말 돌리지 말고… 으엉?”
나는 대놓고 말을 피하는 녀석의 말에 딴죽을 걸다 말았다. 그도 그럴 게 방금… 놀자고? 누구랑? 나랑? 네가?
“…휘혈아. 너 혹시 아파서 미국 가는 거야?”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날이 다가온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설마 인소 세계관의 뜬금없는 시한부 법칙이 반휘혈에게 작용한 건가? 안 그럼 얘가 나한테 적나라하게 놀자는 표현을 쓸 리가 없어…!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그런데 반휘혈은 그런 내 걱정을 한심하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한심하게 저어 댔다.
“드라마 그만 봐.”
그러곤 되레 진지하게 조언하더니 휙, 하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황망히 지켜봤다. 아니,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걱정을 하는 건데!
“…으이씨. 같이 가!”
하지만 매정하게 가게를 빠져나가는 녀석 때문에 나는 불평을 뒤로하며 황급히 따라 나갔다. 반휘혈은 그런 날 힐끗 보더니 다시 앞을 향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
그런데 정작 내게 놀자고 하는 놈이 무계획인 것 같다. 나는 끝없는 침묵을 유지하는 놈을 어처구니없이 보다 픽 웃어 버렸다. 그럼 그렇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녀석의 팔을 잡았다.
“내 방식대로도 괜찮지?”
그대로 끌어당기며 묻자 반휘혈은 잠시 날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만족스레 웃으며 녀석을 데리고 번화가로 향했다.
***
“읏-차! 재밌었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기지개를 쭉 폈다. 솔직히 내가 데려간 곳은 그리 거창한 곳은 아니었다. 주로 이혜인이나 반 친구들이랑 노는 곳이었다. 노래방이나 오락실이나 뭐 이런 곳 말이다. 물론 열창은 거의 나만 했다. 이놈은 정말 딱 한 곡만 불렀다. 그런데 역시 최소 인소 남주급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수 뺨치게 잘 불러서 몇 곡만 더 불러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른 오락실에선 둘 다 승부욕에 불타올라 치열하게 싸웠다. 아니, 실은 대부분의 게임에서 내가 처참히 졌다.
‘죽치고 앉아 게임만 했나 왜 이렇게 잘해?’
특히 철권에서 압도적으로 발렸다. 다음번엔 무조건 이기겠다고 벼르며 퇴장하는 악당처럼 중얼거린 해프닝이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금방 훌훌 털어 내어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가 스티커 사진도 보이길래 장난삼아 찍기도 했다. 아무튼 이것저것 하다 보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래? 아, 우리 집에서 먹고 갈래?”
아무래도 엄마가 반휘혈이 이리 급작스레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면 서운할 것도 같았다. 틈만 나면 휘혈이는 잘 지내냐며 또 놀러 오게 하라고 할 정도인데 얼굴도 비치지 않으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겸사겸사 서이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확인도 해 보고 말이다.
반휘혈은 내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내 머리보다 하나는 더 커 보이는 반휘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반휘혈이 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빤히 바라보며 새삼스레 말했다.
“…아니, 그냥 반년 동안 안 보는 게 갑자기 이상해서.”
서로를 안 세월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 이상의 기간을 알고 지냈던 기분이었다. 자주 만나는 것도 최근 들어서였던 걸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 사귀는데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들어 왔지만 그걸 실감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반휘혈은 상상 이상으로 단시간에 내게 큰 위치를 차지한 기분이었다. 막상 떠난다는 걸 떠오르니 섭섭해지려는 기분이 드는 게 그 증거겠지.
“가서 메일 할 거지? 나 안 본다고 바로 내 연락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럼 나 진짜 서운해? 난 자꾸만 헛헛해지려는 마음에 괜히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반휘혈은 그런 날 뚫어져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일은 없어.”
단호한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녀석을 보았다. 마주친 두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하, 하하! 그, 그렇구나! 그럼 다행이고!”
그래서 난 시선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과장스럽게 웃으며 척척 발을 옮겼다. 뭐지, 왜 눈을 못 마주쳤지? 내가 한 행동이었지만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의문을 띄우며 무의식적으로 볼을 쓸었다.
헤어질 생각에 기분이 많이 예민해졌었나? 볼에 닿은 손끝이 뜨거웠다. 당혹스러운 나의 상태에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어쩐지 여러모로 기분이 이상한 밤이었다.
***
다음 날 반휘혈이 일찍 집으로 돌아가서 준비해야 됐다 보니 아침부터 배웅해 준 뒤, 바로 어제 출석하지 않은 체육관을 찾았다. 문을 열고 재빨리 안을 둘러보자, 체육관 개장 시간과 맞춰 도착했는지 저 멀리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은 한도훈을 발견했다. 원하던 인물을 찾은 난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도훈아!”
내 부름에 한도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내게 다가왔다.
“누나! 혹시 그거 알았어요?!”
“한도훈! 너 이 소식 알고 있었어?!”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치레는 건너뛰고 본론부터 들어갔다. 그리고 각자의 말에 서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알았어?”
“전 오늘 아침…, 누나는요?”
“난 어제….”
우리는 잠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곤 빈자리에 찾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휘혈이가 알려 줬어요?”
“어, 응. 넌?”
“전 부모님이 알려 주셨어요.”
그렇구나…. 우린 다시금 침묵했다. 그러다가 한도훈은 살풋 인상을 찌푸리더니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걘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랑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런 이야기도 부모님 통해서 알게 하냐고요.”
그는 입을 뚱하니 내밀며 자신의 서운함을 표출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난처하게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정말 이렇게 갑자기 떠나면 떠난다고 얘기해 주면 덧나나. 아무리 내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어도 그렇지, 걘 정말 의리도 뭣도 없는 놈이에요.”
“그러게…. 걔가 너무했네.”
나는 한도훈의 말에 수긍했다. 반휘혈이 타인에게 야박한 건 하루 이틀도 아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한도훈은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쉬며 조금 가라앉은 눈을 한번 꾹 감았다.
“알고서도 좋다고 따라다니는 제가 더 바보인 거죠!”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그 잠시의 우울은 씻은 듯 자취를 감춘 것처럼 그는 명랑히 웃음을 그려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