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62화 (62/306)

62. 아이들은 안 본 사이에 쑥쑥 큰다. (2)

“이나야? 무슨 일이야?”

“우리 큰손주 입맛이 없어?”

“어? 아, 아니이! 그, 그냥…, 어, 아무것도 아냐.”

나는 갑자기 몰린 시선에 황급히 휘휘 물리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 다 날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곧 시선이 물려졌다.

“눈이 작작 와야 할 텐데….”

“그러게. 어휴, 강원도는 왜 이렇게 눈이 많이 오나 몰라. 아무래도 회사에 연락해야 되겠어.”

금세 내게서 신경이 꺼진 두 사람의 한탄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물을 벌컥 들이켰다.

‘어우, 왜 갑자기 그때 일을 떠올려선.’

거참, 살아 있는 유죄 인간 반휘혈은 그때 얼마나 잘생겼던지 지금 와서 생각해도 심장 떨리게 잘났었다. 그걸 거리감이 적은 상태에서, 즉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던 난 녀석이 떠난 뒤에는 거의 넋을 빼놓는 불상사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그 파장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우리들이 그렇게 굳어 있는 사이, 반휘혈은 저 혼자 홀가분하게 떠나 버렸다.

‘…물론, 나중엔 도훈이 그 자식이 신나게 놀려 댔지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놀려 댔던 몇 달을 떠올리니 지금도 이가 갈린다. 자기도 벙쪘으면서 아닌 척하긴! 나는 총각무를 씹어 대며 올라오려는 열불을 다스렸다.

‘근데, 그럼 스토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앞으로의 일이 어떤 식으로 흐를지가 걱정됐다.

우선 세 사람이 다른 학교로 진학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반휘혈은 남주 후보에서 자연스럽게 빠졌다. 역시 인소는 사대천왕이 아니던가. 그것도 친구들은 보통 고등학교에서 즉흥 만남보단 소꿉친구일 확률이 높았다. …현재 상황으로선 그것도 전부 무의미해졌지만.

‘무엇보다 휘혈이가 미국에 거주한다면, 이 세계에 주역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이 세계의 한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가면 되는 걸까? 어쩐지 그 ‘평범’이란 말이 썩 와닿지 않았다.

‘…어쩌면, 휘혈이가 남주나 서브남주라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을지도.’

이 세계 자체가 인소 세상이다 보니 반휘혈 같은 인물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름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더 그렇게 생각했던 부분도 있다. 그러나 실제론 강해중학교에도 유명한 애들이 있었다. 거기에 현재 사대천왕의 자리는 공석이 아니었다.

‘현 사대천왕 중에서 가장 강한 게 정태우…, 였었지?’

강해중이나 다른 현 사대천왕들은 다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이름이었다.

…비슷해서 그런가.

나는 지난 생에서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던 어떤 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러곤 바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응? 뭐가?”

“아, 아…. 김치 맛있다고.”

“그래? 마이 묵어라. 애가 삐쩍 마른 게 보기 안 좋다. 쯧…, 마이 묵어.”

할머니는 혀를 차며 반찬을 내게 더 드밀었다. 나는 그 말에 허허허, 쓴웃음을 지으며 감사 인사를 하곤 말없이 밥을 먹었다.

***

서이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 요 며칠이 그랬고,

“이럴 수가. 내 완벽한 졸업식이 물 건너갔어….”

눈앞에서 찡찡거리고 있는 한 놈 때문에 더 그랬다.

“누나가 안 오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 도훈아.”

“알아…, 안다고! 그래서 더 스트레스야! 내 완벽한 계획이 다 무너졌어!”

한도훈은 머리를 감싸며 테이블 위로 무너졌다. 그는 스트레스받고 있단 걸 여실히 보이기 위함인지 엎어진 테이블 위를 쾅쾅 두드리며 분개했다.

“그놈의 자연재해! 으악! 누나 못 온다니까 반휘혈도 안 오고!! 내 퍼펙트해야 될 졸업 사진에 오점이 생겼어…, 크윽.”

내가 이래서 예상 못 할 변수가 싫은 거야. 한도훈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테이블에게 화풀이하듯 두들겨 댔다. 솔직히 한도훈에게 있어서 가장 화나고 어이없는 건 반휘혈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서이나가 못 온다는 연락이 왔을 때부터 짐작을 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반휘혈이 안 간다고 통보를 보내왔다.

“…누구야. 휘혈이한테 누나 못 온다고 한 거!”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중에 반휘혈에게 사실을 알린 범인이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체 그 범인이 판명되질 않았다.

“…….”

세 사람은 동시에 그를 외면했다. 한도훈의 예상대로 그들 중 범인이 있는 건 맞았다. 사실 누군지를 알리면 몇 년 동안 시달릴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숨기고 있는 게 컸고, 그 범인이 누군지도 대략 짐작이 가다 보니 그를 위해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고 하는 게 더 옳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너무 그러진 마. 아직 네가 기대하는 건 하나 더 남았잖아?”

이재현이 밝게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하자 김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면 누나는 무조건 오겠지.”

그 말에 한도훈은 엎어져 있던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러곤 돌연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날카로이 눈을 빛냈다.

“…맞아. 오히려 더 잘된 걸지도.”

“응?”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이재현은 불길해졌다. 서이수는 그런 한도훈을 또 무슨 꿍꿍이인가 하는 시선으로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한도훈의 요청대로 이제껏 서이나에게 어떤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던 그들이었다. 특히 서이수는 거짓말을 잘 못하다 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 다행히 아직까지 의심을 하지 않아 한도훈의 계획은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졸업식에 못 왔기 때문에 더 재밌어졌어.”

후후후. 그가 낮은 웃음을 스산하게 뇌까렸다. 그것을 목격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똥 씹은 얼굴로 변했지만 한도훈은 개의치 않고 생각했다.

‘이거, 더 극적인 연출이 되겠는데.’

약 반년 전부터 공을 들인 이 계획은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맞이하긴 했지만 오히려 더 원하는 방향으로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게 웃었다. 어차피 반휘혈은 입학식이 있기 전까진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이나가 강원도 시골에 갇혀서 언제 돌아올지 미지수이다 보니 그냥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에 돌아오겠지. 게다가 그 또한 적극적인 참여 의사는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의 계획에 암묵적으로 발을 담그고 있었다. 반휘혈도 그 계획이 싫진 않다는 반증이었다.

‘자, 과연 누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한도훈은 그 순간을 맞이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이수, 너 그때까지 입단속 잘해야 돼.”

그러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조치가 서이수였다. 서이수는 그 말에 부루퉁해졌지만 자신의 연기 실력에 할 말이 없다 보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한도훈은 그런 그를 곁눈질로 확인하곤 미심쩍게 보았지만 당장은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

모든 게 완벽했다. 그는 배부른 포식자처럼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기지개를 쭉 펴며 두 손을 머리 뒤에 둘렀다.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맡긴 그는 눈을 슥 접으며 히죽 웃었다. 빛을 내는 그의 눈은 장난스러운 기색이 다분했다.

“솔직히 나만 기대하는 거 아니잖아?”

주어가 생략된 질문이 모두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말에 그들은 서로를 잠시 보다가 각자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를 달았다.

“틀린 말은 아냐.”

“…나도 좀 기대하고 있긴 해.”

“네 계획이라 찝찝하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에 들긴 했어.”

마지막에 초를 치는 것 같은 서이수의 말에 한도훈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곧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날짜를 계산했다. D-Day까지 2주도 안 남았다.

“크크큭, 정말 기대된단 말이지. 우리 이나 누나는 과연 어떻게 나올까?”

어딘가 사악한 음모라도 꾸미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세 사람은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에게 동조해 미소를 더 깊게 그리며 공감의 뜻을 나타냈다.

지금 이 순간,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네 명의 악동의 마음이 흔치 않게 통하는 순간이었다.

***

“에췌엣-!”

어우, 추워라. 코가 다 근질거리네. 나는 장갑 낀 손으로 코를 비벼 댔다. 훌쩍, 흐를 것 같은 콧물을 들이마시고 난 눈 속에 박아 놨던 삽을 다시 들었다.

“에잇, 더럽게 많이 쌓였네.”

푹푹, 쌓인 눈을 열심히 퍼 날라 길을 만들고 있던 난 끝이 나지 않는 양에 입을 삐죽였다.

“어느~ 세월~에~ 이걸~ 다~ 치우~나~.”

눈동자엔 이미 감정이 쏙 빠진 지 오래였다. 공허한 넋두리를 흥얼거리며 눈을 치우길 몇 시간째인가. 여전히 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고, 어린 아가가 일도 참 잘하네~.”

“손도 참 야무져~. 남자 손주만 있었어도 소개시켜 주는데 참 아깝구만~.”

“아하하…. 감사합니다.”

마을 독거노인의 집 앞까지 전부 치워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엔 젊은 피가 귀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해도 그냥 내버려 뒀다간 혼자 계실 독거노인분들께 어떤 사달이 날 줄 알겠는가. 어차피 이 일은 지난 생에서도 했다 보니 그리 어렵진 않았다. 다만 근력과 체력, 지구력이 필요한 중노동일 뿐이지…. 그리고 예전부터 인간 굴삭기라고 불릴 정도로 삽질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다년간의 노하우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마을 어르신들의 러브 콜이 자꾸만 쇄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 좀 먹고 일해.”

“이것도, 이것도.”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거부할 수 없는 수입까지. 난 쥐어 주는 음식들을 마다하지 않고 넙죽 받아들였다. 방금 꿀고구마와 양갱을 얻긴 했었으나, 이미 배 속으로 소화된 지 오래였다. 한창 당이 떨어져 인생이 재미없어지려던 와중, 귀중한 음식이 수중에 떨어졌다. 게다가 이번에 받은 건 따뜻한 호빵과 데운 달달한 캔 커피였다. 정말 최고의 조합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행복하게 쥐며 호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입안엔 밖의 추위와 대조되는 따뜻한 앙금의 맛이 잔뜩 퍼졌다.

크-! 역시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야!

나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힘차게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코가 근질거려 한 번 더 크게 재채기를 했다.

“푸엣췌-!! 아, 근데 오늘따라 코가 엄청 근질거리네.”

크흥, 나는 코를 들이마시며 앞으로 다가올 일을 한 치도 모른 채 코밑을 비비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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