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63화 (63/306)

63. 아이들은 안 본 사이에 쑥쑥 큰다. (3)

***

그렇게 할머니 댁에서 중노동을 보내면서 또 2주일이 지났다. 중간에 돌아갈 수 있긴 했었지만, 갑자기 할머니가 날씨로 인해 관절 통증을 호소해 잡일을 도와드리다 보니 또 미뤄지고 엄마만 돌아가게 됐다. 결국 내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개학 바로 전날이었다.

“늦어!”

그리고 난 귀가하자마자 서이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아, 미안. 근데 이건 내 탓보단 날씨… 탓…, 어…?”

그래서 반사적으로 사과하던 난 먼저 보이는 것에 순간 멈칫했다.

어라? 보통 이 정도쯤에 서이수 얼굴이 보였는데?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어쩐지 넓어 보이는 어깨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에 시선이 저절로 떨려 왔다. 혹시나 싶어 시선을 올리자 그곳에 보이는 건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서이수가 있었다.

“너…, 뭔가 바뀌었…?”

나 없는 3주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분명 나와 15센티 정도밖에 차이가 없었을 놈의 높이가 확연히 달라졌다. 게다가 무엇보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선이 바뀌었다. 좀 더 진해진 것이 아이 티를 벗어났다고 해야 될까, 아니, 그보단…!

“흐흥~. 잘생겨졌지?”

“왜 이렇게 징그러워졌어?!”

으악! 징그러워! 난 질색하며 문에 찰싹 붙었다. 자신의 변화에 자랑스레 웃던 동생의 얼굴엔 쩌적 금이 갔다.

“…강원도에 있더니 눈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봐도 잘생겨졌구만! 눈만 보더니 미적 감각 상실된 거 아냐?!”

“시끄러! 나 둘 다 2.0이거든?! 그리고 징그러운 걸 징그럽다 하지! 작을 땐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이렇게 크다니…, 에잇! 저리 가!”

나름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다 보니 기억 속 얼굴이 지나치게 환상으로 가득했단 걸 깨달았다. 작년부턴 거의 속을 안 썩이기 시작했고, 제설 작업이란 중노동에 시달린 불쌍한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져 간간이 떠올리는 인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이놈이었다. 비록 시작이 안 좋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내 마음속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이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억 속의 그는 이렇게 멀대처럼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좀 더 젖살이 있어 둥글둥글한 인상이었다. 이렇게 시퍼런 남정네가 아니었다고! 젠장, 과거 서이수 돌려도!

“야! 서이나! 야!!!”

나는 녀석을 퍽 밀치며 방으로 들어갔다. 내 행동에 잠깐 넋 나갔던 녀석이 뒤늦게 왁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모르쇠를 일관하며 풀썩 몸을 뉘었다.

“어이구…, 삭신아아.”

이번 방학은 유난히 더 피곤한 기분이었다. 무슨 놈의 눈이 사람 가지고 놀 듯 오냔 말이다. 이렇게까지 오래 있을 예정은 없었으나, 변칙적인 날씨 덕에 난 예상치 못한 전원생활을 누려야만 했다.

무엇보다 시골에서 내가 할 일이 얼마나 있겠나. 눈 치우다 돌아오면 저녁이었다. 겨울은 해가 빨리 졌으며, 시골의 저녁은 시커멓다. 등불 따윈 기대하면 안 됐고, 겁이 많은 나로선 밖에 나간다는 선택지는 일절 없었다. 그래서 밥 먹은 후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핸드폰에 이 세계의 참고용 겸 재미 겸으로 저장해 둔 소설들은 이미 닳도록 읽은 지 오래였다.

결국 무료함을 견디질 못해 팔 굽혀 펴기, 윗몸 일으키기 등 운동만 주구장창 했다. 그러다가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자세를 잡던 것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어디선가 샌드백을 가져왔다. 이웃집 철구네가 쓰던 건데 이젠 안 쓴다나 뭐라나. 그래서 얼결에 받아 든 난 그것을 쳐 대며 원 없이 훈련한 기분만 잔뜩 내고 왔다.

“게다가 내일 개학이라니, 이건 꿈이야….”

방학인데 방학다운 생활 하나 못하고 집에 돌아오다니. 시골의 아침은 이르다 보니 푹 자본 적도 손에 꼽았다. 얼마 없는 휴일이었는데,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속이 쓰려지는 기분에 헛웃음마저 흘러나왔다.

“아, 몰라, 몰라. 잘래.”

이른 저녁이었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어차피 내일 일찍 일어날 거 오늘 저녁에 일찍 자 밀린 잠을 보충하겠다는 기적의 논리를 선보이며 나는 후다닥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씌웠다.

“나 잘 거니까 깨우지 마!”

“뭐? 밥은!”

서이수가 버럭 외치는 게 들렸다. 나는 안 먹는다고 소리치며 그대로 취침 모드에 들어갔다. 물론 내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핸드폰도 매너 모드로 바꿔 저 멀리 던져 버렸다.

***

[일어나! 아침이야! 일어나! 아침이야!]

“크헉. …엇.”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번쩍 떠졌다. 익숙한 알람 소리였다. 그리고 저게 울린다는 건 보통 아침이었고 말이다.

어라. 나 눈 붙인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아침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에 순간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어스푸레한 빛은 동이 터 오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퉁퉁 부은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이럴 수가. 하지만 저 멀리 던져 둔 핸드폰을 기어서 주워 확인해 봐도 시각은 정직하게 당장 일어나야 할 시각을 알리고 있었다.

“…….”

잘 가. 내 방학.

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내겐 너무나 찰나였던 방학 씨에게 작별을 고했다. 하하. 난 오늘부터 다시 공부의 늪에 빠져야 하는구나. 정말 너무 싫다. 하하하하.

허탈한 미소를 흘리며 터덜터덜 방 밖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 세수를 하고 나오자,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퉁퉁 부은 얼굴의 서이수와 마주쳤다.

순간 뭔가 이상해 멀뚱히 보자, 동생의 키가 달라졌음을 떠올렸다.

‘진짜 3주 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전에도 170센티라 나보다 키가 컸으나, 이젠 180센티는 더 되어 보였다. 반휘혈이 딱 이 녀석만 했던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도 너무 징그럽게 커 버렸다. 귀여웠던 그 시절은 이젠 안녕인가. 갑자기 서운함과 동시에 씁쓸함이 찾아왔다. 누나, 누나 하면서 따라다녔던 때가 엊그제 같…,

“어…?”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 기억은 내 기억이 아니라…,

두근. 불시에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 같은 감각이 일었다. 그 이질감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자 서이수가 그런 날 부축했다.

“뭐, 뭐야, 왜 그래? 어디 아파? 토할 것 같아?”

고개를 들자 나보다 더 안색이 나빠 보이는 것 같은 서이수가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불쑥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있잖아, 이수야….”

네 눈앞에 있는 내가 네 진짜 누나가 아니면 어떻게 할래?

“혹시 체한 거야? 근데 어제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갑자기 왜 그래.”

하지만 내 말과 동시에 속사포로 내뱉어진 그의 걱정에 의해 내 말은 막히고 말았다. 그 덕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아무리 정신이 나갔었다고 해도 방금 그 질문은 해서는 안 됐었다. 특히 몇 년간 나를 누나로 보아 준 그에겐 절대 해선 안 될 잔인한 물음이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허리를 바로 세우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아니, 나 괜찮아. 잠깐 좀 어지러워서 그랬어. 기립성 저혈압인가? 아무튼 그런 거 아닐까? 하하.”

하지만 그는 납득 못 한 것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수야, 왜 그래? 누나 어디 아파?”

그러자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엄마마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나 진짜 괜찮아. …그냥 피로가 덜 풀려서! 그래서 그런 거야! 아무래도 눈 치우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 하핫.”

점점 일이 커지는 기분에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이대로 가다간 응급실에 끌려갈 판이었다. 실제로 이런 증상 때문에 큰 병이라도 난 게 아닐까 걱정돼 요즘 기력이 안 좋다는 핑계로 병원에 가 본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인소 세계로 와 버린 것이다 보니 그런 염려를 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사 소견은 늘 한결같았다.

‘스트레스성 빈혈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다행인 한편 얼마나 맥이 빠지던지. 나는 안도의 숨을 뱉으면서도 역시 자신은 인소 세계관의 태생적으로 여리여리한, 그런 흔한 여주 상이랑은 아주 멀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음엔 눈 치우지 말고 그냥 와. 이렇게까지 몸이 안 좋아질 줄 알았다면 그냥 같이 오는 건데.”

엄마가 내 말을 듣곤 속상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그에 어떤 항변도 못 하고 그냥 웃기만 하였다. 실제로 이번엔 좀 많이 고되기도 했던 건 사실이기도 했다.

“어쨌든 어서 밥 먹어. 빈속으로 가서 진짜 쓰러지면 큰일 나.”

“알았어, 알았어. 걱정 말고 출근 준비해.”

손을 내저으며 재촉하자 엄마는 마지못해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서이수는 여전히 미심쩍은지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꽤나 걱정을 시킨 모양이었다. 평소 박정한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챙겨 주려는 모습을 보니 흐뭇함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자신이 너무 야멸차게 굴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녀석 또한 마찬가지였을 텐데 너무나 달라진 동생 놈의 모습에 당황했나 보다. 동생은 내 마중까지 나와 반가워했는데, 정작 내가 돌려준 것은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그래선지 아침에 마주친 그의 얼굴은 똥 씹은 얼굴 그 자체였었다.

“…잘 잤냐?”

“…….”

미안해져 뒤늦게 인사를 건네주었으나, 서이수는 말없이 날 보기만 하고 있었다. …얘가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지? 방금 내 상태가 그만큼 안 좋았나. 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매만지는데 서이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방금 하려던 말 뭐였어.”

“어? 뭐?”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묻는데 서이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재차 말했다.

“방금 나한테 뭐 말하려고 했잖아.”

아. 그 대답에 나는 방금 전 내뱉을 뻔했던 실언을 떠올렸다.

“누나, 너 방금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