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64화 (64/306)

64. 아이들은 안 본 사이에 쑥쑥 큰다. (4)

네 눈앞에 있는 내가 네 진짜 누나가 아니면 어떻게 할래?

‘이딴 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내 딴에는 한껏 발뺌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글러 먹은 것 같았다. 너무 불시에 던져진 질문이라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의 난 너무 어색했다. 그러니 서이수의 눈이 의심으로 가득 채워지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불어.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서이수의 낯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쓰읍. 키가 더 커서 그런가 화를 내니깐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 상황에선 뜬금없지만 어쩐지 아빠의 모습이 보일락 말락 한 것이 얘도 아빠 아들이 맞구나 싶었다.

‘역시 쓸데없이 커졌어.’

3주 전에 봤던 작은 서이수가 새삼 그리워졌다. 서글퍼지는 기분에 나는 입꼬리를 내리며 미간을 못마땅히 찌푸렸다.

“알고 싶냐?”

“그럼 모르고 싶어서 묻겠냐?”

아이고, 말하는 꼬락서니 하곤. 내 귀여웠던 동생은 이제 없구나! 물론 태도는 이전과 변함없지만, 아무튼 그전엔 작아서 귀엽기라도 했지 이젠 아주 큰 멀대만 남아 있는 현실에 나는 침통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너 너무 커서 징그러워졌다고 하려 했다. 왜!”

“뭐…? 이익…!”

쾅! 서이수는 열이 잔뜩 받았는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외쳤다.

“됐어! 걱정한 내가 바보지! 쓰러지든 말든 맘대로 해!”

그러곤 나를 휙, 제치고 크게 문을 닫으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일 났다.”

뒤늦게 낭패감이 찾아왔다. 그에게 한동안 엄청 무시당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는 난처함에 머리를 긁적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어, 이수는?”

교복을 다 입고 나오자 보여야 할 서이수가 안 보였다. 이제 막 문을 나서려고 하는 엄마에게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친구랑 같이 간다고 먼저 갔어.”

“뭐?”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원래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였어도 함께 등교하지는 않긴 했다. 그래도 오늘은 입학식이니만큼 같이 갈 줄 알았건만 먼저 출발하다니. 아무리 삐졌어도 말도 없이 나가 버린 서이수에게 괜히 서운해졌다.

‘…쳇. 입학 첫날부터 무슨 친구야.’

차라리 그럴싸한 변명을 더 생각하지. 서이수에게 중학교 시절 친구 중에 제대로 된 녀석이라고 해 봤자 한도훈, 이재현, 김시원뿐이었다. 그런데 이 셋은 모두 다른 학교를 희망하지 않았던가. 한도훈은 무려 유학까지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배웅하질 못했다. 하필 한도훈이 떠난다고 했던 전날에 또 눈이 올 게 뭔가. 마치 강원도에서 못 빠져나가게 하겠다는 하늘의 음모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껏 서운해하는 한도훈이 마음에 걸려서 사과를 전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나도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질 못한 아쉬움이 크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한국에 올 땐 꼭 마중 나가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다.

어찌 됐건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결국 서이수에겐 첫 등교부터 함께 갈 친구는 전무하다는 거다. 그러니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며 나를 피한 녀석의 모습에 난 잔뜩 섭섭함이 몰려왔다.

‘내가 말을 심하게 하긴 했지만…, 매정한 자식.’

안 그래도 이젠 그 아이들을 쉬이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마음 한구석에 헛헛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서이수마저 이렇게 비정하게 떠나니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휘혈이는 어떻게 됐으려나.’

어젯밤은 까무룩 잠이 들어 메일을 확인하지 못했다. 졸업식 때도 연락이 없어 의아해 한도훈에게 물었으나 한도훈은 그 녀석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줬다.

‘누나가 없는 졸업식 따윈 관심도 없었나 봐요.’

툴툴거리며 말했으나, 그 내용은 내게 있어 착잡한 심경만 가져다줬다. 한 번뿐인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가족이 싫다는 이유로,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만으로 불참 사유가 되다니. 여러모로 기분이 복잡해졌다.

‘…결국 한국엔 안 돌아왔나.’

졸업 사진으로라도 그의 안부를 확인해 볼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갔다. 게다가 졸업식을 제외하고서도 핸드폰이 너무 조용했다. 그 흔한 안부 문자 보내지 않은 걸로 보아 이제껏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럼 고등학교 진학은 미국에서 다니는 거려나?

어제 아무리 피곤했어도 메일은 확인할 걸 그랬다며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점심시간에 시청각실 들러 볼까.”

가끔 운이 좋으면 인터넷 사용이 가능했기에 한번 들러 보기로 결정했다.

“하아….”

왠지 기분이 별로 좋질 않았다. 개학 첫날부터 시작이 별로였다. 부디 오늘은 조용히 넘어갔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문밖을 나섰다.

‘뭐 어차피 소설 내용이든 인소 세계관이든 이젠 나랑 상관없으니 괜찮겠지.’

그리 큰 확신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후보였던 애들이 전부 다 떠난 판국이었다. 그래서 그리 큰 걱정을 들지 않았다. …라고 하면 참 좋겠지만,

“왜 이렇게 찝찝하지?”

아침부터 징조가 좋질 않아서 그런가, 영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냥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우, 몰라, 몰라. 어차피 오늘은 수업도 거의 안 하니깐 남은 시간 잠이나 자야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붙잡고 있어 봤자 피곤한 건 나였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으악!”

“으웍!”

퍽, 하고 누군가 내 등을 밀쳤다. 나는 식겁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전신에 힘을 강하게 주며 기울이지 않게 버텼다. 겨우 중심을 잡고 서자, 눈앞으로 커다란 트럭이 날쌔게 지나갔다.

“흐이익…!”

나는 그 아찔함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쿵쿵쿵.

심장이 아프도록 울려 댔다.

허억, 헉.

거친 숨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전신에서부터 지난날 자신을 덮쳐 왔던 충돌의 고통이 엄습했다. 아찔한 죽음의 통증에 몸이 떨려 왔다.

…기! …찮, …요!

귀에서 이명이 들려온다. 트럭에 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흐릿한 잔상 속에선 그 누구 하나 분명치 못했다.

나는 그렇게 죽어 가고 있었다. 발버둥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의식이 점멸되어 갔다.

살려, 사, 살려 줘….

누구든 좋았다. 제발 이 끔찍한 고통을 덜어 내 줬으면 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누구든 좋으니깐 제발 이 꺼져 가는 의식을 붙잡아 줬으면 했다. 엄습한 죽음의 공포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주세요.’

그럴 때 어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 걸까. 나는 그 목소리에게 묻고 싶었지만 고통으로 잠겨 버린 목에선 어떤 말도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다행히도 내게 다시 한번 더 말을 걸었다.

‘…와, 주…요.’

그런데 이번엔 이질감이 강하게 들었다. 웅웅거리는 이명이 자꾸만 그 목소리를 방해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게 마음속으로 강하게 되물었다.

다시 말해 주세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그 목소리가 화답하듯 이전보다 세차게 외쳐 왔다.

‘…도와 주세요!’

도와… 달라고? 무엇을?

주어가 빠진 말에 의문이 들었다. 몸이 으깨져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순전한 호기심이 차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나 절박한 소리를 내는 걸까. 대체 뭘 도와 달라길래 이렇게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걸까?

‘제 …을, 제 …들을!’

…들을? 여전히 중요한 한 마디가 들리질 않았다. 그런 의문이 꼬리를 물 때, 목소리는 다시 한번 절박한 외침을, 선명히 내뱉었다.

‘제 친구들을 구해 주세요!’

철썩!

“저기요! 정신 차리세요!”

“헉.”

까무룩 정신이 잠겨 들 찰나 뺨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점멸될 뻔한 시야를 빠르게 깜빡였다.

“어….”

여, 여기는, 어디지? 순간 상황 판단이 안 돼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니 주변의 시선에 나를 향해 몰려 있었다.

“이게 뭔….”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이게 무슨 상황인가 멀뚱히 눈을 깜빡이는데 앞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쪽을 보았다. 거기엔 불안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어, 괜찮은…, 것 같아요.”

“하아아. 다행이에요.”

그 모습에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학생이 그제야 가슴을 쓸며 안도를 했다. 그러곤 비장한 시선을 보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급하게 뛰어가다가 발을 헛디뎠어요. 놀라게 해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아.”

나는 그 말에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방금 이 여자아이에게 부딪혀 사고가 날 뻔했다는 소리였다. 그 아찔한 감각이 다시 상기되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안색은 거울을 안 봐도 분명 죽을 것만치 푸르죽죽한 상태임이 분명했을 거다.

“그, 으! 정말 죄송해요….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호, 혹시 위, 위, 자료! 피, 필요하실까요…?”

그러자 학생이 울상이 되며 눈을 꼭 감았다. 돈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이럴 때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비용에 대한 말을 꺼내면서도 학생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돈은 됐어요.”

차마 이 어린아이에게 돈을 받을 순 없었던 난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보니 좀 휘청이긴 했으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파란불로 바뀐 신호를 힐끔 확인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학생도 등교해요. 보아하니 같은 학교인 것 같은데 난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 봐요. 그럼 먼저 가 볼게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상황을 수습했다. 계속 이러고 있어 봤자 쓸데없는 시선만 끌 뿐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지각하기까진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신호를 건너며 뒷목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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