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아이들은 안 본 사이에 쑥쑥 큰다. (5)
그 학생은 신호가 바뀐 동안 뒤따라온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눈치껏 다음 신호로 건널 생각인가 보다. 어차피 나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난처했던 참이었다.
‘그보다…, 나 방금 엄청 중요한 걸 떠올린 것 같은데.’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에다 손을 가져다 댔다. 방금 떠올랐던 그 목소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소리였다. …어쩌면 이 소설이 나에게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명이 잔뜩 끼어 구분을 못 해내는 걸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자신이 이곳에 온 가장 큰 원인이 될지도 모를 힌트였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알게 되다니. 영 꺼림칙한데.”
충격 요법이라도 된 모양인지, 난생 최악의 경험이었던 트럭 사고의 현장으로 다시 이 기억을 떠올렸다는 게 영 석연찮았다. 두꺼운 외투 안에 숨겨진 팔은 추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소름이 쫙 돋아난 게 느껴졌다. 그 불쾌한 느낌에 내 기분이 저조해진 건 당연지사였다.
‘역시 오늘은 징조가 좋지 않아.’
하아아. 참았던 한숨이 깊게 내쉬어졌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개학 첫날부터 일진이 너무 사납다. 오늘은 보충도 야자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푹 자야지. 나는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교문을 지나다 불쑥 중얼거렸다.
“혹시 오늘 진짜 무슨 일 나나…?”
에, 에이! 설마!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무슨 일이 계속 벌어지니까 이제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있는 힘껏 불안한 가정을 외면하며 안 좋은 생각 쪽으로 뻗치는 걸 막기 위해 볼을 찰싹 쳤다.
“정신 차리자, 정신! …으억!”
그런데 그런 날 누군가가 퍽 밀치고 갔다. 아침부터 벌써 두 번째였다.
“아, 이런 개…!”
결국 차오르는 스트레스를 감당 못 한 난 욕을 싸지르며 성질을 내려는데,
“야, 야, 대박! 빨리 와!”
“기다려!”
“진짜 왔다고? 진짜?”
어쩐지 등교하는 학생들이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방향이 학교 운동장 쪽에 뻗어 있었다.
“뭐야…?”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멀뚱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 무슨 일이 있나? 마치 연예인이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낯설어 나는 멍청하게 주위만 자꾸 둘러봤다.
“대체 누가 왔길래?”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학교는 특별한 이벤트가 터지질 않는다. 말 그대로 평범한 고등학교였다. 그런데 개학 첫날부터 이렇게 사람이 몰려 있다는 게 범상치 않게만 느껴졌다.
‘학생회가 뭔가 기획했나?’
근데 학기 초부터? 보통은 축제 때 그런 예산을 퍼부을 텐데 우리 학교는 축제에 그렇게 돈을 투자하질 않는다. 그래서 난 학교에서 연예인을 마주한 적이 여태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설을 제외하고선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교실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뭐가 됐든 지금은 쉬고 싶다. 이미 아침부터 기력을 다 뺀 기분이라 더 이상 기운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2학년 교실은 중간층을 차지해 적당히 높으니깐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 그래서 무시하고 발을 옮기려는데,
“야, 들었어?! 사대천왕 중 한 명이 여기로 왔대!”
“고찬영 왔다는 거 진짜야?!”
“대박! 완전 쩔어!”
……뭐? 나는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가며 외치는 남학생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사대천왕이…, 우리 학교에?”
대체 왜?
단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왜 이 학교에 현 사대천왕이 등장했는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소설 내용이 나 없을 때 시작했나? 아니, 난 그런 소식 전혀 못 들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살펴도 반에서 인소에 나올 법한 거창한 러브 스토리는 못 들어 본 것 같았다. 아니면, 저게 인소의 서막을 알리는 건가? 설마 그런 거야?
나는 못 박힌 듯 멍하니 자리에 서 있다가 툭, 하고 누군가 나를 부딪히며 지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우선, 상황을 파악해야 돼.’
나는 서둘러 운동장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갔다. 바리케이드를 친 것처럼 사람이 주르륵 벽을 이루고 있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사람을 파헤치고 중심 쪽으로 다다른 것 같자, 시야가 탁 트였다. 파고드느라 숙였던 허리를 펴 무리의 중심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엔 누가 봐도 타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무리들이 오토바이를 등에 진 채 몰려 있었다.
“…….”
저 교복은 어디지? 이 근방에 위치한 학교는 아니었다. 생소한 그들의 모습을 둘러보다가 문득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존재가 한 명 있었다.
‘쟤가 고찬영인가 보네.’
딱 봐도 눈에 띄는 잘생김이었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다 서글하게 생긴 것이 여자 꽤나 울려 봤을 것같이 생겼다.
‘아니, 근데 진짜 잘생겼는데.’
고찬영이라고 불리는 현 사대천왕께선 연신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인상적인 미모의 소유자였다. 이제껏 반휘혈이 가장 잘생긴 줄 알았는데 설마 이 세상에 반휘혈급으로 잘생긴 놈이 또 있을 줄이야. 역시 사대천왕을 하려면 저 정도는 생겨야 하는 건가.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 얼굴 보려고 주위에 몰려든 건 남학생뿐만이 아니라 여학생도 많았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이 몰고 온 듯한 오토바이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가히 잔뜩 보정된 패션 화보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대천왕이란 소리 안 들었으면 오늘 무슨 촬영이라도 있는 걸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근데 쟤가 여길 왜 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학교는 사대천왕이라는 네임드를 달 만한 녀석이 올 곳이 아니었다. 그것도 개학식부터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데 문득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같이 보이던 그가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 뭐야? 어?’
설마 나한테 오는 거야? 하며 긴장하는데 다가온 고찬영이 입을 열었다.
“너.”
“어, 저, 저요…?”
그런데 내 쪽이 아니라 정확히 옆옆쪽에 있는 꽤 예쁘장한 여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던지 얼굴을 붉히며 긴장하고 있었다.
“되게 귀엽게 생겼다. 역시 서울이라 그런가 장난 없네. 설마 이렇게 빨리 너같이 예쁜 애를 만날 줄은 몰랐어.”
“네, 어, 네?”
……음. 나는 저 망한 플러팅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짜게 식은 눈으로 그놈을 보는데, 어쩐지 여학생 쪽은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질 않은 것 같았다. 에잇. 끼리끼리 만난 건가. 나는 괜히 여기까지 왔나 후회가 치밀었다. 그냥 지금부터라도 조용히 빠지고 교실에나 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돌연 고찬영 쪽 무리 중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찬영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아, 참. 그렇지. 저기 전화번호 좀 줄래?”
“찬영아….”
“하하, 뭐 어때. 아직 그 녀석도 안 온 것 같은데.”
…그 녀석? 순간 그들이 말하는 대화 속에서 잡힌 이질적인 단어에 눈을 부릅떴다.
‘이 학교에…, 이 녀석이 올 만한 가치가 있는 애가 오는 건가?’
순간 드는 생각이 이것이었다. 개학식에 맞춰 등장한 사대천왕 중 한 명인 고찬영. 물론 오늘 처음 보고 이름도 처음 들었지만 얼굴이 범상치 않은 게 분명 강할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직접 오토바이까지 몰며 이 학교로 올 만한 인물은 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들 중엔 없을 거다. 그렇다면 오늘 입학하는 애들 중에 그럴 만한 녀석이 있다는 건데….
‘누구지.’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 내가 아는 아이들은 이 학교에 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아, 저기 혹시 너 알아? 최강혁이 언제 올 것 같아?”
“최…, 최강혁이요?!”
“최강혁? …그 강해중학교 일짱?!”
“최강혁이 우리 학교에 온다고?”
“걔가 왜?! 여긴 걔네 활동 구역 아니잖아! 반휘혈이면 몰라도!”
“꺄아! 어떡해! 나 오늘 화장 안 했는데!”
고찬영이 물었던 여자의 새된 비명을 필두로 빠르게 반응이 퍼져 갔다. 나는 덕분에 말로만 듣던 사대천왕 유력 후보인 강해중학교 일짱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름이 최강혁이었구나. 정말 이름만 봐도 참 강해 보이네.
나는 흐려진 눈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하늘이 선명히 눈에 담기며 나는 저절로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겨우 삼켰다.
‘벗어나긴 개뿔. 아주 대놓고 서막을 알려 주네.’
아니, 왜. 대체 왜. 걔는 걔네 지역이나 갈 것이지 왜 하필 우리 학교야…! 반휘혈과 그 친구들이 우리 학교를 안 다녀 이젠 정말 평범한 일상을 사나 싶었더니 아주 그 생각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시작이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개같더라.”
허탈한 심경에 저절로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응?”
“어?”
그런데 갑자기 내 중얼거림에 맞춰 고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응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응답하듯 대답하다가 녀석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헉, 어떡하지. 누가 봐도 명백히 나랑 눈 마주친 거다. 거의 지척이라 오해할 수도 없는 위치였다. 내 동공에 지진이 난 게 여실히 느껴졌다.
“저기, 넌 알아?”
“으응…?”
아니나 다를까, 고찬영이 말을 걸었다. 생각도 못 하게 말이 걸리자 뇌에 과부하가 왔다. 표정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어색하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진심으로 모르겠으니까 제발 나를 내버려 두고 관심을 꺼 주렴. 보니까 예쁜 애 좋아하지? 저기에 네 관심 끌려고 모인 애들이 있으니 빨리 저기로 가 버려.
“흐음~. 너 뭔가 알고 있구나?”
그런데 난데없이 고찬영이란 놈이 날 오해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려했으나 나는 침착하게 그 말을 부정하기로 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난 오늘 최강혁이란 이름도 처음 듣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