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아이들은 안 본 사이에 쑥쑥 큰다. (7)
고찬영의 간단한 수긍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일순 싸늘하게 정적을 내달렸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나마저 말을 안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침묵하는 거야말로 자신이 맞다고 시인하는 꼴이었다.
“그래? 흐응-.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고찬영은 그런 내 말을 별로 안 믿는 눈치였다. 어쩐지 능글거리며 히죽거리는 게 불안감을 부추겼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발자국 더 무르며 진짜 도망이라도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 행동을 달가이 여기질 않았는지 내 어깨를 탁 붙잡았다.
“자꾸 어딜 그렇게 가? 그럼 더 수상하다고.”
깊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겉으로는 모르쇠를 일관했다.
“말했잖아. 곧 조례 시간이라고.”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어깨를 붙잡은 손을 털어 냈다. 그가 강하게 붙잡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지라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래? 흠….”
그런데 고찬영은 어깨를 붙잡았던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고 있었다. …불길하다. 저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무언가를 그가 알아챈 기분이었다.
‘혹시, 설마…!’
두꺼운 외투 너머로도 근력을 측정할 수 있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술을 가진…!
“역시 외투 입으니깐 모르겠다.”
…건 아니네. …솔직히 조금 기대했다. 인소 세계관이라 나는 뭐 그런 사기적인 능력 정돈 당연히 나와 줄 줄 알았지. 조금, 좀 많이 실망했다.
“…그럼 난 이만.”
“아, 잠깐, 잠깐.”
그리고 잠시 생긴 퇴장 타이밍에 슬쩍 자리를 빠지려고 했다. 그러자 고찬영은 그런 날 또 막으려는 모양인지 손을 뻗었다. 난 그 모습에 더는 참지 않고 한 소리를 하기 위해 녀석을 쏘아보며 말했다.
“작작 좀…!”
“작작 좀 하지?”
탁, 누군가 나보다 빨리 그 손을 쳐 냈다. 그리고 절묘하게 동시에 말이 겹쳤다.
어느새 누군가가, 내 앞에 고찬영과 나를 가로막듯 서 있었다.
어, 누구지…? 그런데 낯선 덩치인 것과는 별개로 왠지 목소리가 꽤나 익숙했다.
“넌 뭐야?”
“그런 넌 또 뭐야? 왜 남의 누나 앞을 얼쩡거려?”
남의 누나? 아!
“…서이수?!”
순간 키가 너무 커서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큰 덩치에게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서야 난 그가 내 동생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분명 나보다 빨리 등교했기 때문에 진즉 교실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녀석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밖이 요란해서 나와 본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그가 메고 있는 가방이 이제 막 등교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상황 판단이 좀체 되질 않아 어리벙벙하게 있자, 그에 대한 답이 어째선지 앞이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왜긴 왜예요. 이제 막! 등교했기 때문이죠~.”
불쑥 한쪽 어깨가 친근하게 붙잡혔다. 갑자기 실린 무게에 잠깐 휘청이자 그런 날 붙잡아 주는 자상한 손이 하나 있었다.
“누나, 괜찮아요?”
그는 무너지려는 자세를 다시 부드럽게 잡아 준 태도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왜 고찬영이….”
묵직한 게 매력인 목소리마저 들리자 나는 결국 떡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너희들이 대체 왜 여기에…!”
나는 덮쳐 오는 충격에 부들거리다가 두 사람을 팍 떼어 내고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바로 몸을 돌려 세 사람을 향해 소리치려다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말이 막히고 말았다.
“짜잔! 서프라이즈! …인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흐음. 하며 턱에 손을 올리고 있는 한 청년은 세밀한 이목구비를 자랑하고 있는 미소년 느낌이었고,
“별일 없었어요, 누나?”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익숙한 안경 너머로 보인 청년은 자꾸만 바라보고 싶게 하는 미인에,
“오랜만입니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주는 청년은 깊은 음영을 만들어 남성미를 뿜어내고 있는 미남이었다.
“…누구세요?”
아니, 사실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순간 너무 달라져서, …정확히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너무 변해서 다른 사람인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 본 사이에 각성이라도 했나? 하는 헛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말이 불쑥 튀어 나갔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혹시 한도훈, 이재현, 김시원 형님분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확인을 해 보았다. 진짜 그들의 형들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성장기라지만 이건 거의 사기 아닌가 싶을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응? 저 외동인데…, 아하. 누나. 제가 너무 잘생겨서 혹시 반했어요?”
“닥쳐라, 한도훈.”
한도훈의 짓궂은 말에 나는 곧장 정색하며 그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근데 너희들이 왜 여깄어. 다른 학교 간다며…, 유학 간다며!”
설마 이재현, 김시원 너희들마저 내게 거짓말을 치다니!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 치를 떨며 놈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두 사람은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려 댔다.
“너희들 진짜…!”
“워워, 근데 누나.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점점 험악해지려는 얼굴을 막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데, 한도훈이 능청스레 제지를 걸었다.
내가 지금 화내지, 언제 화를 내야 하는데! 열이 머리끝까지 뻗으려던 찰나, 한도훈이 내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이게 무슨 짓…,”
[AM 08:25]
뭔 짓거리냐고 화를 내려던 나는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시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언제 시간이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이곳에서 너무 시간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늦어졌음에도 주위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뒤늦게 시선이 너무 몰렸다는 걸 자각했지만 이미 이 학교에서 얘네들이랑 내가 지인 관계임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리 없다는 걸 알기에 그다지 신경은 쓰이지는 않았다. …다만, 이후에 몰려올 학생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여느 때처럼 대충 모른 척하면 흩어지겠거늘 생각하기로 했다.
“빨리 안 가 봐도 돼요?”
“…간다, 가. 너흰… 나중에 보자.”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두 손가락으로 내 눈과 세 놈을 번갈아 짚어 주며 나중을 기약하고 겁박을 가했다. 그리고 여전히 고찬영을 견제하며 서 있던 서이수에게도 한마디 쏘아 주었다.
“서이수, 너도 첫날부터 사고 치지 마!”
“내가 애야? 누나야말로 빨리 교실로 꺼져!”
아니, 저 새끼가? 동생 놈의 화려한 말본새에 뒤지고 싶냐고 응수하려던 찰나, 갑자기 주위가 웅성였다.
“우왕! 여기 사람 되게 많당!”
…뭐지? 이 상큼한 목소리는?
“그러게. 무슨 일 있나 봐.”
거기에 감미로운 미성이 뒤를 따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편에서 거물이 나타났음을 직감했다.
“호오. 드디어 왔네.”
그리고 우리를 안방극장처럼 구경하고 있던 고찬영이 돌연 사냥감을 포착한 것처럼 웃었다.
“…아이고, 늦었네. 난 간다.”
직감이 경고등을 화려하게 울렸다. 그것을 포착한 난 곧장 발을 뺐다. 내 감이 외치고 있다. 지금 여기에 끼어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귀찮은 일에 휩쓸릴 거라고 말이다.
내가 조용히 작별을 고하며 뒤로 물러서려 하자, 고찬영이 그런 내게 시선을 다시 줬지만 서이수가 그 시야를 몸으로 완전히 가려 버렸다.
“뭘 봐?”
거기에 시비조는 덤이었다. 서이수에게 가려 고찬영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지만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신경 쓰고 있어 봤자, 저 요주의 인물들만이 거리가 가까워질 뿐이었다. 나는 서이수의 도움을 발판 삼아 바로 빠져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한도훈도 그런 날 발견하고 주위 사람들을 손으로 부드럽게 내저어 길을 터 주었다. 그러곤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눈짓까지 해 주니 내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어유, 저저 얄미운 자식!’
그러나 차마 미워할 수도 없는 놈이라 새삼 느끼며 난 한도훈을 한 번 더 째려보고 후다닥 터준 길로 튀어 갔다.
너희들 나중에 두고 보자!
나는 훗날을 기약하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
잠깐 동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떠나는 서이나의 뒷모습에 주목했다. 하지만, 같은 학생이면서도 모여 있던 학생들은 좀체 떠날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그 유명한 동서의 패자. 즉, 도방중과 강해중의 네임드들뿐만 아니라 사대천왕 중 한 명이 모인 전설적인 자리를 한시라도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무슨 전설이 탄생할지도 몰라!
그런 순간은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내가 거기에 있었어! 하면서 떠벌리고 싶어 하는 게 사람 심리였다. 게다가 모인 학생들은 눈앞에 있는 이름 있는 일진들의 위세에 기가 죽을지언정 거기에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의 일인 것처럼 자랑하고 싶은 청춘들이기도 했다. 지금 이때에도 운동장에 있는 학생들의 핸드폰은 이미 일찍 등교해 시기를 놓친 아이들의 연락으로 분주히 울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목적은 반은 이뤄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 버렸네.”
그런 눈치 싸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찬영은 사라진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 앞에 선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언제 부드러운 분위기를 냈냐는 것처럼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첨예하게 기운을 내세웠다.
‘재밌는 놈들이네.’
그는 한순간에 바뀐 그들의 기세에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특히, 도련님같이 생긴 놈이 가장 재밌어 보였다. 방금까지 있던 여자와 대화하며 세상 무해한 종인 것처럼 굴더니,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맹수의 눈을 품고 있었다.
“현호야. 얘들 누구야?”
고찬영은 곁에 서 있던 이현호를 불렀다. 그의 친구이자 그의 학교 이짱인 이현호는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정보에 빠른 사람이었다. 원래는 이현호 그도 이런 분야엔 관심을 크게 가지지 않는 편이었으나, 강한 놈이랑 싸우는 걸 즐기지만 막상 조사하는 건 귀찮아하는 고찬영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전국에서 유명한 일진들은 다 꿰고 있었다.
하지만 고찬영은 그가 알려 주기도 전에 여기 있는 모두가 나름 한가락 하는 이들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은 꽤나 정확한 편이었다.
“눈앞에 있는 애는 서이수. 뒤에서 오른쪽부터 한도훈, 이재현, 김시원이야. 전부 반휘혈 그룹 애들이고.”
“오~. 그 유명한 반휘혈이?”
히죽, 그가 흥미롭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앞에 선 서이수는 그 웃음이 어쩐지 자신을 깔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기분을 가라앉히고 그를 더 살벌히 노려보았다.
“읏차, 도차-악! 우왓! 뭐야, 여기? 왜 이렇게 우중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