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1)
그런데 그 칼날과 같은 첨예한 공기 속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대치하고 있던 이들 모두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엇. 도훈이당! 도훈이 방가방가!”
“…쯧.”
통통 튀는 듯한 밝은 음성이 한도훈을 발견하곤 인사를 해 왔다. 그러나 한도훈은 그러한 주인공에게 질색해 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흔치 않은 그의 반응에 친구들이 한도훈을 의아하게 보았다.
“엥? 왜 혀를 차?! 유니 상처받았어!”
“…….”
그 말에 다른 친구들 모두가 한도훈과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경악마저 포함되어 있다는 부분뿐이었다.
“나 상처받았다니깐? 응? 응?”
한도훈은 앞에서 얼쩡거리는 이를 철저하게 무시했지만,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은 그런 주인공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먼저는 그의 분홍색 머리였다. 그가 오기 전 가장 눈에 띄던 색은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한도훈이었다. 하지만, 분홍색 머리가 무리에 끼어든 순간부턴 검은 머리가 대부분인 한국인들 사이에선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런 튀는 머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둥실거리는 스타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의 천사 같은 얼굴!
이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구경꾼 중엔 그의 천사 같은 귀여움에 심장을 붙잡고 있는 이들이 곳곳에 속출하고 있을 정도였다.
“우웅-. 혁이도 그렇구, 도훈이도 그렇구 왜 다들 유니한테 차가운 거야?”
그러나 계속되는 무시에 기분이 나빴는지 천사 같은 소년이 뿌-, 하고 불퉁하게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뒤에서 쓰러지는 이들이 도미노 무너지듯 잇따랐다. 서이수는 깜짝 놀라 그쪽을 보았지만 그러든 말든 온 군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한도훈은 그런 그를 완전히 무시하며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안녕, 우리 거의 다 초면인가?”
그의 시선 끝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여유롭게 자신들을 관망하는 것같이 서 있던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손에 팔꿈치를 괸 채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한도훈은 그를 바라보다 뒤에 나타난 커다란 남자를 보았다.
“…….”
무념무상. 어떤 표정도 짓고 있지 않는 남자였다. 어쩐지 졸려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그저 일행을 따라온 것뿐인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도훈은 이 난데없는 불청객들을 알고 있다. 아니,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들을 알고 있다면, 여기 있는 이 녀석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정한, 서강이, 이윤. 강해중 놈들이 왜 여기 있어.”
바로 서쪽의 패자. 강해중학교의 최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 사람이 빠져 있긴 했지만 이들이 모여 있단 사실만으로 다른 한 명도 이 학교에 왔다는 건 뻔한 일이었다. 사실 한도훈은 강태중 녀석들이 이 학교에 온다는 소식을 진즉에 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놈들은 그다지 이 학교로 올 것이란 걸 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개학 직전까지 진학 사실을 감춘 건 자신들이었다. 이유는 단순히 서이나에게 깜짝 서프라이즈를 하기 위함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그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반휘혈의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미리 등교해 기다렸다가 서이나를 놀라게 하는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다. 첫 스타트부터 불안하더라니 도착한 학교엔 난데없는 놈이 출현했다.
물론 서이나를 놀래는 덴 성공했다. 나름대로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긴 하지만, 그는 이것보다 더 큰 반응을 바랐다. 오로지 자신들에게 집중해 주길 바랐건만 별 이상한 놈들에게 전부 분산되어 더 짜증이 일고 있었다.
“남의 영역에 멋대로 침범해 놓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런. 환영받지 못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야박한걸.”
“야박하긴. 쌍욕을 퍼부어 주고 싶은 걸 눈이 많아서 참고 있는데. 왜 듣고 싶어? 해 줄까?”
한도훈이 활짝 웃었다. 다정한도 말하는 내용과 달리 웃는 낯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상큼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들의 표정과는 반대로 그들 사이의 온도는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하하. 사양할게. 그래도 이제부터 같은 학교잖아? 잘 지내 보는 게 어떨까.”
“내가 왜?”
“그럼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치고받고 싸우게? 난 그런 건 별로 취향이 아닌데. 아. 혹시 이건 네 취향이려나?”
“…….”
싱긋. 미소 짓는 그 낯을 보며 서이수는 질린 얼굴을 했다. 와, 저 새끼. 존나 세. 설마 한도훈의 입을 막아 버릴 정도의 말솜씨를 가지고 있는 놈은 반휘혈을 제외하곤 거의 처음이었다. 물론 반휘혈은 닥치라고 한마디만 할 뿐이긴 하지만, 저렇게 나긋나긋한 어휘로 한도훈을 먹이다니. 보통 놈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한도훈도 아니지만.
아니나 다를까 한도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서이수는 저럴 때의 녀석은 특히 조심해야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무언가 한 방 크게 먹일 때 그는 저런 고요한 전조를 보이곤 했다.
‘저 사이에 휩쓸리고 싶지 않은데.’
서이수는 조용히 한 발자국 뒤로 발을 뺐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끼어들긴 하겠지만 당장은 저 둘 사이에 끼어 봤자 아무것도 득 될 게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보이진 않지만 냉랭한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공기가 몇 도는 더 내려간 것만 같았다. 게다가 번갯불이 튀는 것 같은 시선이 한도훈과 다정한 사이로 예리하게 부딪혔다.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아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중,
“워워, 진정해. 애들아. 싸움 걸러 온 건 난데 왜 너희들끼리 싸워?”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고찬영이 그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난처하게 머리를 한번 긁적이더니 다정한과 한도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희 둘이 싸우지 말고 나랑 싸워. 나랑. 그리고 이왕이면 말 말고 주먹이었으면 좋겠는데.”
고찬영이 눈을 휘며 씨익 웃었다. 일견 여유로워 보이지만 포식자의 눈을 가진 사내였다. 서이수는 현 사대천왕 중 한 명인 고찬영에 대해 떠올렸다.
미친 들개. 싸움광.
우선 당장 떠오르는 것은 이 별칭들이었다.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별명에 어울리게도 그는 싸움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내임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개학 첫날부터 싸움을 걸러 몸소 타지까지 올 정성이면 그가 얼마나 싸우는 걸 낙으로 여기는지 보여 주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싸움을 좋아하는 만큼 잘한다지.’
그는 사대천왕 중 세 번째로 강하다는 평이 있다. 세 번째라고 하니 어중간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전국 서열로 따지면 압도적인 순위였다. 무엇보다 그 위에 있는 건 정태우와 김율이었다. 그들은 우선 사람으로 분류되는 존재들이 아니니 고찬영은 인간의 범주 내에선 가장 강하다는 후한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였다.
기실 서이수는 그가 싸우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폭력성이라든가 여러 문제로 내려갔지만 한때 인터넷에선 그가 싸우던 모습이 떠돈 적이 있다.
처음 본 감상평은 마치 피에 굶주린 야수를 보는 것 같았다. 스무 명 남짓한 무리들이 무기를 들고 덤비는 중에도 자신은 단 혼자서 기교 따윈 하나 없이 맨손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게다가 그와 싸우는 측은 평범한 학생들로 보이질 않았다. 곳곳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우락부락한 몸매. 소위 조폭이나 깡패라고 불리는 게 어울릴 법한 인상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을 처참하게 으깨고 짓밟았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승리였다.
무엇보다도 제일 화제가 된 부분은 싸움이 다 끝난 후 그가 보여 준 모습이었다. 그는 타인에 의해 절여진 핏물을 옷에 슥슥 닦더니 싱긋 웃으며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쪽을 보며 말했다.
‘아, 재미없어. 현호야. 다른 재밌는 녀석들은 없어?’
나름 유명한 패거리래서 기대하고 왔는데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며 그는 게임을 하고 온 것처럼 그렇게 평이하게 말하고 있었다. 서이수는 그런 인간미라곤 전혀 느껴지질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일순 소름이 돋았다.
‘역시 불편해.’
방금은 자신의 누나에게 해코지를, …물론 누나가 쉽게 당하고 있을 만한 인물은 아니란 건 안다. 하지만 곤란하도록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 욱한 마음에 상대방이 누군지도 잊고 튀어 나가고 말았다.
무엇보다 아침부터 서이나의 상태가 좋질 못했다. 갑자기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질 않나, 누가 봐도 안색이 좋질 않은데 괜찮다고 우기질 않나. 하지만 그런 그의 걱정에도 그녀는 그에게 못된 말만 남겼다. 그래서 화가 난 서이수는 누나인 서이나를 보지도 않고 그렇게 집을 나오게 되었다.
‘어디서 수작질은 수작질이야?’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지금도 방금 자신의 누나가 이 자식에게 잡혀 있던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빴다. 저 자식은 뭔데 처음 보는 우리 누나한테 집적대고 있던 건가. 혹시 관심 있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떠나는 서이나를 잡지 않고 금세 신경을 꺼 버리는 모습을 보곤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안도하려던 찰나였다.
“아, 맞아. 근데 방금 그 여자애가 조커야?”
…관심을 끈 게 아니었나 보다. 고찬영은 서이나가 떠나간 쪽을 가리키며 흥미로운 얼굴로 묻고 있었다. 서이수는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조커?”
“어, 조커?! 정말 조커 있었어?”
그러자 다정한과 이윤이 동시에 반응을 보였다. 다정한은 가늘게 웃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고, 이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딨어? 그 조커란 사람! 나 보고 싶어!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혁이한테 얼른 이 사실을 알려 줘야지!”
왜인지 이윤은 꽤나 흥분한 모양이었다. 그는 방방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아, 잠깐. 윤….”
그리고 다정한은 그런 이윤을 말리기 위해선지 손을 뻗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그의 핸드폰은 이미 컬러링이 요란히 울리며 전화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