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70화 (70/306)

70.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3)

그런데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정태우? 그 정태우?”

“어. 어엄청 잠깐이긴 했지만.”

그는 친구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하면서도 쉽사리 의심을 거두질 못했다. 고찬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서이나가 사라진 방향을 다시금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도훈은 골치가 아파 왔다. 그는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고찬영 같은 타입은 그에게 곤란한 타입 중 하나였다.

‘감이 너무 좋아.’

하필 비교해도 정태우라니. 현 사대천왕 중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라는 루머가 떠돌 만큼 비인간적인 실력의 소유자였다. 물론 여기서 그를 포함한 친구들은 서이나가 엄청 강하다는 걸 알고 있다. 아마 힘은 몰라도 기술로는 반휘혈보다 강할 거라고 예상을 할 정도였고, 반휘혈 본인도 인정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한계는 함께 살고 있고 가장 많이 대련-을 빙자한 구타-을 해 본 동생인 서이수마저 아직까지도 확인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한도훈은 고찬영이 정태우의 이름을 거론해 놀란 한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들킬 수는 없지.

한도훈은 천연덕스럽게 서이수와 고찬영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착각은 자유지만, 남의 학교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쓰나. 그것도 평범한 일반인에게… 그 유명한 사대천왕 수준이 그렇게 떨어지는 줄 몰랐는걸?”

그는 비죽 웃음을 그리며 고찬영을 업신여겼다. 그러자 고찬영의 눈이 한순간에 험악해졌다. 그의 관심을 바로 돌리는 데 성공한 한도훈은 그런 그를 보며 더 깊게 웃음 지었다. 고찬영은 한도훈을 서늘히 노려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재밌네. 조커는 됐어. 네가 나랑,”

[그러니까… 조커는 못 발견했다?]

그때 차가운 미성이 팽창됐던 공기를 가로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에 목소리가 나온 곳으로 향했다.

“앗. 어…, 그런가 본데?”

헷. 하며 이윤이 멋쩍게 웃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콩하고 찍는 거까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다른 이가 했으면 바로 매장당했을 포즈였지만 이윤이 하니 그냥 당연하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런 그를 역겹게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

[야, 이윤.]

“우…. 나도 고의는 아니었어. 근데 너 어차피 일어나야 했잖아. 오늘 개학이라고. 너 까먹고 있었지?”

[……시끄러.]

침묵이 상당히 길었다. 그로서 그가 오늘이 개학임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는 걸 모두가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튼 또 쓸데없이 연락하지 마.]

“아, 잠깐. 잠깐.”

당장이라도 끊으려는 최강혁을 막은 건 다름 아닌 고찬영이었다. 그는 최강혁 목소리가 끊어지려 할 때쯤 먼 타지에서 이곳까지 왔던 목적을 겨우 떠올렸다. 지금 아니면 그다지 기회가 찾아오질 않을 것 같았기에 그는 불쑥 최강혁에게 본 목적을 던졌다.

“네가 최강혁이지? 너 나랑 싸울래?”

[뭐야. 이건.]

갑작스러운 싸움 신청에 서이수는 이 미친놈은 뭐지, 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방금까지 아무에게나 싸움을 거는 모습을 못 봤기에 이 뜬금없는 행동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광주에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있던 것도 이상한 일이긴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나? 고찬영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불쾌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태평하게 대답하는 모습은 정상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역시 이놈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서이수는 경계 어린 마음으로 조용히 그를 노려봤다.

“나, 무시당한 거?”

고찬영을 도발하다가 한순간에 덩그러니 팽개침을 당한 한도훈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무시당하는 걸 좋아하질 않았다. 관심 대상에서 바로 뒷전으로 버려지다니. 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야, 이….”

“도훈아. 진정해. 여기 학교야.”

그리고 험악해진 그의 낯에 바로 몸으로 가로막으며 말린 건 계속 그들의 대치를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던 이재현이었다. 이재현은 한도훈의 팔을 잡고 힘으로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한도훈은 그런 이재현을 뿌리치기 위해 팔을 내저었지만 다른 손이 불쑥 끼어들어 막히고 말았다.

“일 크게 만들지 마.”

이번엔 김시원이었다. 그는 한도훈의 어깨를 억누르며 눈을 차갑게 내리깔고 있었다. 사실 김시원도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불쾌했다. 이렇게까지 개무시를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소란이 일어나 봤자 가장 곤란한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아니었다.

“여기서 싸움 나면 누나가 알 거야. 그럼….”

가장 큰 문제는 이곳엔 없는 사람, 바로 서이나였다.

김시원이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진 않았다. 그저 그의 무언으로 함축된 시선이 잠시 한도훈에게 닿았다가 사라졌다.

“…쯧.”

그러자 놀랍게도 한도훈은 곧장이라도 한 대 걷어차 버릴 것 같은 태도를 고쳐먹고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단지 혀를 차며 발을 가볍게 신경질적으로 흙 위에 굴렸다. 그런 그의 급격한 변화에 그를 지켜보던 다정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한도훈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그 시선을 눈치채질 못했다.

“후-.”

한도훈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숨이 가다듬어지자 감정이 차분해졌다. 그래. 이제까지 말을 돌렸던 이유가 무엇이었던 건가. 바로 서이나의 정체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관심받는 걸 별로 좋아하질 않았다. 그래서 그들도 합심하여 그녀를 배려해 그 정체를 가려 주고 있는 편이었다.

근데 만약 여기서 싸움이 터진다?

약 9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그녀는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럼 그 싸움에 휘말릴 확률은?

약 95퍼센트의 확률로 굉장히 높았다.

서이나는 의식하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그녀는 처음에 잘 숨어 있다가 점점 몸을 빼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열 싸움에 종종 휩쓸리곤 했다.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거겠지만, 평소엔 누가 서이나에게 시비만 안 걸면 그냥 구경만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물론 예외도 당연히 존재했다.

가장 먼저는 동생인 서이수가 위험할 때였다. 평소 몸을 사리던 게 우습게도 그 순간만큼은 얼굴 가리는 것도 잊을 정도로 일이 순식간에 일어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놀랍게도 이들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리 먼일이 아니었다. 바로 작년 말, 약 3개월 전 태산고등학교에서 서열 싸움의 앙갚음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한도훈, 이재현, 김시원은 하교 후 오락실에서 가볍게 논 뒤, 평범하게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노린 것처럼 공터에서 어떤 무리가 싸움을 걸었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다 보니 사위가 어두워 처음엔 그 정체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곧 교복이 익숙해 한도훈을 포함한 친구들은 그들이 태산고등학교 출신임을 바로 파악했다. 무엇보다 가장 돋보이는 덩치, 강태석이 버젓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살인이라도 일으킬 생각인지 각자 살벌한 연장 하나씩 챙기고 있었다.

…뭐, 사실 여기까진 괜찮았다. 태산고 놈들이 무기 들고 치사하게 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바로 이재현의 컨디션이었다.

정황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지난 1학기 기말고사에서 1등을 놓친 이재현이 오기가 발동했다. 그는 자신을 더 몰아붙여서 공부를 했다. 정작 그 자리를 탈환해 간 장본인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 모습은 평소 그 부분엔 간섭을 별로 하지 않던 한도훈과 김시원마저 쉬엄쉬엄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은 시험이 끝나고 나타났다. 기말이 끝나고 나서 이재현은 감기에 걸렸다. 한동안 열이 계속 떨어지질 않았는데도 출석 때문에 무리하게 학교에 나왔다. 그 질긴 모습에 다들 혀를 내둘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니 이재현의 상태가 좋질 못한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

한도훈은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싸우기도 도망치기에도 컨디션이 저조한 이재현으로 인해 힘든 상황이었다. 이재현은 두 사람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은 괜찮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타일렀으나 한도훈과 김시원이 들은 체도 하질 않았다.

사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태산고는 강태석을 제외하곤 별 볼 일 없는 무리들이었다. 그래서 강태석이 무너지면 자연스레 와해될 게 뻔했다. 실제로 그런 전적도 여러 번 있었다. 본보기로 우두머리인 강태석만 잡아 족치면 그만이었으나, 그 강태석은 커다란 덩치에 비해 잔머리가 많고 겁도 많았다. 자신이 우세한 상황이 아니고선 절대 앞으로 나오질 않는 비열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나한테 개털렸지만.’

강태석을 때려눕힌 서이나는 몸집이 작았다. 190cm에 육박하는 강태석의 입장에선 155cm밖에 안 되는 서이나는 어린아이같이 느껴졌을 터였다. 거기에 여자라는 것까지 알았으니 얼마나 만만했겠는가. 노래방 사건은 우연이라고, 없는 셈 치는 것 같긴 했으나, 정작 다리 밑 사건에서 제대로 때려눕혀진 강태석은 그 이후로 잠잠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원한을 이때까지 칼을 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저 인간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아서 졸업 전까진 무조건 보복을 하고자 말겠다는 건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한도훈은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였다. 이 상황만 벗어나면 저 찌질이를 절대 가만두질 않겠다며 살벌하게 각오를 다졌다.

‘야, 이재현. 넌 가.’

‘하지만….’

‘너 있어 봤자 짐이라는 말을 굳이 해야 알아들어?’

‘……미안.’

이재현은 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도훈은 그를 보지도 않고 강태석을 노려봤다. 김시원은 이미 몸을 풀고 있었다.

‘조금만 버텨 줘.’

그리고 이재현은 아픈 사람 같지 않게 쏜살같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이재현이 도망가자 동시에 그를 쫓으려는 무리들이 달려들었다. 곧바로 한도훈과 김시원이 그들이 이재현에게 닿지 못하도록 빠르게 막아섰다. 두 사람의 방어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뭐래. 돼지가. 아니, 돼지 탈을 쓴 쥐새끼인가? 뭐 이렇게 잘 도망쳐?’

그 대치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한도훈과 김시원은 서로의 간격을 유지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빈틈이 드러날 때마다 그 공간을 메꿨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황이 쉽게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강태석은 야비하게도 그 몸집을 십분 활용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이 유리할 때만 그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것을 피하면 근처에 있던 잔챙이들이 연장을 휘두르니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즉, 그와의 전면전을 치를 타이밍이 좀체 나오질 않아 한도훈과 김시원의 체력만 소비하는 상황이란 뜻이었다.

젠장. 어디서 이렇게 긁어모아선.

머릿수가 다리 밑에서 봤던 것보다 더 많아 보였다. 고등학생이라고 하는 놈들이 중학생들 잡겠다고 징그럽게도 모여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기세가 크게 기울어 있진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들은 겨우 두 명뿐이긴 해도 한 지역을 제패한 도방중 이짱과 삼짱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히, 요 몇 달 사이, 정확히는 다리 밑 사건 이후 서이나와 간간이 스파링을 시작한 김시원은 안 본 새 부쩍 실력이 향상되어 있었다.

‘김시원. 너 이짱 해도 되겠는데? 나보다 강해진 거 아냐?’

‘안 그래도 너한테 결투 신청하려 했어.’

한도훈은 긴장을 풀지 않았지만, 아닌 척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김시원도 그에 맞추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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