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71화 (71/306)

71.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4)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강태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새끼들이 상황 분간도 못하고….’

강태석이 연장을 바로 잡았다. 한도훈과 김시원은 지금이 승부수라는 걸 바로 파악했다.

‘뭐, 분간할 필요 있나? 겨우 너 같은 쥐새끼 상대하는 걸 가지고.’

한도훈이 고개를 치켜들며 도발했다. 그사이 김시원은 조용히 타이밍을 탐색했다.

작전은 간단했다. 자신들의 분투로 수가 반 이상 줄어든 지금은 방금처럼 잔챙이들이 섣불리 강태석을 돕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한도훈이 도발되어 흥분한 강태석의 품으로 파고들어 손목을 걷어차 무장을 해제하여 강태석을 당황시킨다. 그 후, 한도훈보다 근력이 좋은 김시원이 곧장 카운터를 날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사실 말은 굉장히 쉬웠지만 태산고 일짱인 강태석은 보기와 달리 재빠른 편에, 보는 바와 같이 맷집도 강했다. 모든 건 완벽한 타이밍과 충분한 근력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즉, 웬만한 놈들은 그에게 쪽도 못 써 보고 당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중학생인 그들이 허울로만 고등학교를 제치고 동쪽을 제패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간혹 눈앞에 있는 놈들처럼 겁 없이 구는 놈들도 있었다. 이유는 일짱인 반휘혈의 성향에 따라 다른 지역에 비해 싸움의 빈도수가 현격히 낮아서 생긴 일이었다. 혹시 그들이 반휘혈의 후광만 등지고 실력이 없는 거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이었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놈들은 그대로 밟아 버리면 나중엔 설설 기는 경우가 많았기에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저 자식은 너무 질겼다. 뭐가 이리도 멍청한지 밟아도 밟아도 잡초처럼 또 나타났다. 서이나가 상대하기 이전에 먼저 겨뤘던 적이 있던 만큼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너무 적당히 상대했나. 아니면 더 이상 개기지 못하게 뿌리를 뽑아야 하나? 한도훈은 제게로 못 박힌 몽둥이를 휘두르기 위해 다가오는 강태석을 차게 노려보았다. 그 품으로 파고들기 위해 자세를 낮추려는 순간,

‘이익! 너 이 색…, 흐억!’

강태석의 낯이 급격히 희게 질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려던 찰나, 뒤에서 강한 외침이 들렸다.

‘김시원, 허리 숙여!’

익숙한 목소리였다. 김시원은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바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무언가가 재빠르게 그 등을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한도훈의 눈에 느릿하게 그 정체가 비쳐졌다.

빡-!!

누군가의 무릎에 강태석의 얼굴이 뭉개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한도훈은 갑자기 등장한 주인공에 눈을 크게 떴다.

‘누, 누나?’

‘후-….’

그 정체는 바로 서이나였다. 뒤를 돌아 그녀가 온 자취를 확인하니 뒤쪽에 있던 무리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도훈은 어떤 녀석이 어깨를 붙잡고 있는 것을 봤다. 그는 자신의 어깨와 서이나를 몇 번이고 번갈아 확인하고 있었다.

한도훈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처음은 저 녀석의 어깨를 디딘 후, 김시원을 발판 삼아 강태석의 안면에 무릎을 강타했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진짜….’

그런데 서이나의 낌새가 심상치가 않았다. 분위기도 평소와 달리 살벌함 그 자체였다.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고 손끝이 저릿해지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 감각은 어디선가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지난여름, 분명 해변가에서 반휘혈에게 느꼈던-,

‘내 동생들한테 무슨 개짓거리야…!’

살기였다. 그리고 그 무게는 그때완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숨 막히게 다가왔다.

두근. 그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한도훈의 심장이 뛰었다. 이것은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 아니었다. 이는 분명 언젠가 그의 소꿉친구에게서도 느꼈었던 박동이었다.

‘야, 니들. 똑바로 걸어서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서슬 퍼런 음성이 좌중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날, 김시원과 한도훈은 한 마리의 야수를 목격했다. 어둑한 공터 속에서 빛을 내는 건 가로등 하나뿐. 그 사이에서 무리를 휩쓸고 있는 그 모습은 흉포한 곰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한도훈만큼은 남달랐다. 태산고 놈들이 낙엽처럼 쓰러져 가는 그 광경을 담고 있는 그의 눈은 더 없이 반짝였고, 그의 볼은 황홀하게 볼을 붉혀져 있었다.

그날 이후, 한도훈은 서이나가 원하는 모든 걸 조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조용히 살고자 한다면 그녀의 원대로 해 주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누군가의 입을 막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주위가 어두웠다든가, 우연찮게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든가 그런 일이 많기도 해 그의 작업은 순조롭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그 지경까지 왔는데도 지금껏 안 들킨 게 용하긴 했다. 한도훈은 그 과정에서 우스갯소리로 세상이 작정한 듯 그녀를 숨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고 그저 우연에 불과했겠지만 말이다.

어찌 됐건 현재 조커에 대한 이미지는 그들의 비밀 전력과도 같은 위치가 되어 버렸다. 사실 이것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신비감이 강할수록 그 정체에 대한 환상이 커지는 편이었다.

서이나는 외형과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성격 때문인지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눈에 띄질 않았다. 그래선지 그들과 가장 가깝고 친하게 지내고 있는 여성이란 걸 주변에서 많이 알고 있음에도 서이나를 조커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다수의 이목이 집중된 운동장 한복판이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런 곳에서 일이 벌어지면 더는 서이나 본인이 원하는 조용한 생활은 끝이었다.

“…….”

한도훈은 조용히 팔짱을 꼈다.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한층 진정된 그를 본 김시원과 이재현은 붙잡고 있던 어깨와 팔을 놓아 주었다.

[사대천왕이고 뭐고 관심 없어.]

“에이~, 그러지 말고~. 나 너랑 싸워 보고 싶어서 광주에서 서울까지 왔다고.”

[내 알 바는 아니지.]

그 와중에도 대화는 착착 진행됐다. 그런데 어쩐지 최강혁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오히려 기분이 꽤나 저조해 보였다.

[이윤. 넌 나중에 보자.]

“엇!”

뚝-. 그러곤 최강혁은 자기 할 말만 내뱉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고찬영은 갑작스레 끊긴 연락에 당황해했지만, 자못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에 이윤은 울상을 지었다.

“힝….”

“너무 성급했어. 윤아.”

“하지만….”

다정한이 그의 어깨를 도닥이면서 쓴소리를 내뱉었다. 이윤은 그런 그의 말에 더 어깨가 위축되며 눈썹을 모았다.

“외계인이 여기에 있었다고 했단 말이야.”

외계인? 귀를 사로잡는 이상한 단어에 서이수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그래, 그래. 자, 이젠 들어가자. 저기 선생님들 몰려온다.”

“우웅….”

그런데 정작 그 말을 직접 들은 다정한은 태연하기만 했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옆을 보니 눈이 마주친 이재현의 얼굴도 이상해져 있었다. 게다가 김시원도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아까부터 계속 이윤이 말할 때마다 거의 질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도훈이 여지없이 찌푸리고 있는 걸 목격하자 서이수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 이 시간까지 여기 몰려서 뭐 하는 거야!”

거참, 가장 늦으신 분이 되레 성내네. 일찌감치 와서 사태를 수습했어야 할 선생이라는 작자들의 모습에 서이수는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달려오는 덩치 큰 남자를 대충 힐끗 보곤 아직도 이곳 학생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고찬영을 바라보았다.

“슬슬 가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아, 너라도 나랑 싸울래? 방금 눈빛 마음에 들던데.”

“…아니, 난 됐어.”

서이수는 순간 솔깃했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휘말려 버리면 개학 첫날부터 사고 치고 싶냐고 자신의 누나가 얼마나 구박을 할지 쉽게 상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럼 너흰?”

“대타는 사절.”

“저도 싸움은 별로….”

고찬영은 바로 타깃을 바꿔 김시원과 이재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강한 이와 싸우는 건 좋아도 대리로 싸워야 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김시원은 대번에 거절했고, 실제로 싸움을 그다지 즐겨 하지 않는 이재현도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남은 건 단 한 명뿐이었다. 고찬영의 시선이 떨떠름하게 한도훈으로 옮겨지자 한도훈은 고개를 치켜들며 오만하게 웃었다.

“무릎 꿇고 빌면 고려해 줄게.”

“……하아.”

정말 이 학교는 왜 이렇게 제대로 된 녀석이 없는 걸까? 고찬영은 불만족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아, 재미없어. 서울 놈들은 다 왜 이렇게 숫기가 없는 거야? 괜히 좋게 좋게 말했어.”

그는 투덜거리며 뻐근해진 고개를 뒤로 젖히곤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쓸어버릴까.”

고찬영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의 건조한 중얼거림에 한순간 싸늘한 정적이 내달렸다. 하기야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예의 차리고 싸움을 걸었던가. 서울에 왔답시고 괜히 기합이 들어갔나 보다. 그는 손의 관절을 꺾으며 가볍게 근육을 풀었다. 그곳에 몰려 있던 학생들은 이제껏 가볍기만 해 보였던 그의 달라진 모습에서 위기감을 느끼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당장 교실에 들어가!”

그때 타이밍 맞춰 선생님이 그곳에 당도했다. 학생들은 그 말에 맞춰 슬쩍 하나둘 교실이 있는 건물로 향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대체 어떤 학교 애들이길래 개학 첫날부터 딴 학교에 쳐들어와?!”

덩치 큰 선생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를 냈다. 고찬영은 그런 그에게 싱긋 웃었다.

“선생은 빠지죠. 괜히 병원 신세 지기 싫으면.”

“뭐, 뭐?! 이, 이 새끼가…!”

선생이 뒷목을 잡았다. 학창 시절 이름을 날렸던 학교 주임이자 체육 교사인 그는 단번에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 버렸다. 그래서 그가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녀석에게 엄격한 처벌을 내리려는데,

“진정하세요. 선생님. 당신도 그만하고 슬슬 가시죠.”

가만히 서 있던 다정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중재에 나섰다.

“내가 왜?”

이곳까지 온 목적을 달성도 못 하고 무시만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고찬영은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다정한을 서늘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다정한은 기죽지 않고 태연한 어조로 그에게 제안을 했다.

“상대가 필요하다면 제가 해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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