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72화 (72/306)

72.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5)

***

지금 학교는 난리였다. 이미 학교 입학식이나 조례 따윈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선생님은 8시 반에 간단한 인사만 하고 긴급 교무 회의를 이유로 교실을 비운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모든 학생들이 운동장을 보기 위해 진을 치며 흥분하고 있는 이 광경을 말릴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와중이었지만! 나는 예외였다. 오히려 최대한 그곳에 동떨어져 앉아 있고 싶었다. 하지만 다들 창문 쪽으로 몰려 있는 판국에 나만 혼자서 덩그러니 앉아 있기도 뭐했다. 대충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분위기에 맞추면서 상황을 살폈다.

“대박. 진짜 대박!! 지금 우리 전설을 지켜보고 있는 거야?”

“도방중이랑 강해중 탑들이 전부 우리 학교로 왔다고? 미쳤나 봐!”

“고찬영! 저기 가운데 있는 애! 쟤 맞지?!”

“꺄아!! 여기 좀 봐 줬으면 좋겠다!!”

“반휘혈도 있어?!”

“우리 혁이도 왔어? 꺄악-!!”

“아, 밀지 마!”

“누가 내 발 밟았어!”

정말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나는 그들을 질린 눈으로 보다가 슬그머니 뒤쪽에서 정보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학교엔 도방중 네임드를 비롯한 강해중 네임드들이 입학했다. 당장 일짱이던 두 놈이 안 보였지만, 지금 운동장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놈들이 이 학교에 있다는 건 자연스레 그곳의 탑들도 이곳에 입학했다는 반증이었다. 우선 반휘혈은 몰라도 최강혁이란 놈은 확실했다.

‘그리고 방금 들었던 목소리….’

그 통통 튀는 상큼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미성이 귓가에서 잊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걔네들이 내가 예상하고 있는 그놈들이 맞는 것 같았다.

인소 세계관 사대천왕의 대표적 상징. 그중 >-< 와 ^-^ 가 틀림없었다.

끄응. 나는 저절로 아파 오는 골치에 머리를 짚었다. 팔에는 진즉 소름이 돋아 있었다.

세상에, 왜, 왜…, 일이 이렇게 꼬였지? 정말 한 치 앞도 모를 인생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파란만장할 일이던가. 신은 대체 어쩌자고 이런 개판 오 분 전인 상황을 만든 걸까…?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하. 쥐 죽은 듯 살고 싶다.’

하지만 이미 서이수를 통해 한도훈네랑 제대로 얽혀 있어서 그럴 확률이 제로에 수렴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외면하면 괜찮을까 싶지만, 내 성격상 동생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진짜 날뛴 전적이 있기도 했고.

“으으. 어쩌지….”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솔직히 인소 세계관이다 보니 앞으로 있게 될 내용도 얼추 예상은 갔다.

‘문제는 그 스토리지만.’

뭔 놈의 고등학생들이 그렇게 파란만장하게 일을 벌이던지, 내가 괜히 이곳에 빙의한 초장부터 서이수 사고 칠까 염려한 게 아니었다. 특히 태산고의 일짱을 본 이후 난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내 동생 놈의 미래가 저 돼지 따까리 중 한 명일 수도 있었구나.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미래였다. 그래서 서이수가 상고인 태산고 같은 곳이 아닌 일반고인 도방고로 진학한다는 소식을 알려 줬을 때 얼마나 만감이 교차하던지….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꽤 좋았었다. 덕분에 사고 칠 확률도 낮아질 것 같고, 내가 직접 감시하기에도 훨씬 수월해졌다. …분명 그런 와중이었는데,

‘저것들이 단체로 사기를 쳐?!’

으드득. 저절로 이가 살벌하게 갈렸다.

“이나, 헉. 이, 이나야. 얼굴, 얼굴…!”

그때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내게 말을 걸려던 이혜인이 내 얼굴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가왔다. 그러곤 스스로의 미간을 툭툭 두드리며 진정하란 제스처를 보였다.

“아, 고마워.”

아빠를 닮아선지 화가 난 게 티가 나면 얼굴이 저절로 험악해진다. 그리고 그게 꽤 사납고 무섭다는 말을 줄곧 듣고 자랐다. 오래 알고 지낸 이혜인은 이젠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화난 내 얼굴을 보면 흠칫거리며 멀리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오늘은 개학 첫날이었다. 초면인 아이들도 꽤 있다 보니 첫인상부터 망가지고 시작할 순 없었다. 이혜인은 그런 날 위해서 배려해 주다가 내가 화나 있을 때마다 저런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근데 왜?”

차츰 진정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심기는 불편했다. 그래서 목소리가 조금 불퉁하게 나오고 있자니 이혜인은 멋쩍게 웃으며 슬쩍 창문을 눈짓했다.

“으음. 아니. 저기에 이수가 있는 건가 싶어서.”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이혜인의 태도가 소심했다. 그래도 주위가 듣지 못하게 속삭이는 배려는 그녀다워 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어. 맞아. 방금 보고 왔어.”

나 또한 남들이 듣지 못하게 같이 속삭였다. 그러자 이혜인은 더 눈을 빛내며 신기한 듯 밖을 내다봤다. 그녀는 나를 배려해선지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리 크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정말이지. 내 친구는 이렇게 착한데 왜 쟤네들은 날 이렇게 배려하질 못해서 안달인 걸까.’

이젠 좀 인생이 평탄해지나 싶었는데 방심한 틈을 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문질러 펴며 조용히 혀를 찼다.

‘쯧. 아침부터 재수 옴 붙었다 싶더니.’

보통 같으면 액땜했네~,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앞일이 예상 가서 그런지 쉬이 그런 태평한 사고로 흐를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인소의 흐름이 어땠던가.

첫 번째. 남주와 여주가 우연찮게 만난다.

두 번째. 어디서든 유명한 남주를 여주가 모른다. 보통 여기서 남주가 여주에게 관심을 가지든가, 아니면 남주는 관심이 없었어도 주변이 여주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세 번째. 두 사람은 갑자기 사사건건 일에 얽히기 시작한다. 특히 여주가 형제가 있다면 그 형제 때문일 확률이 높다.

네 번째. 여주는 평범하단 설정이지만 외모든 성적이든 절대 평범하지가 않다. 게다가 성격도 지나치게 착하다. 남주는 그런 여주에게 감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다섯 번째. 악역 등장!

쓰읍. 정말 단어 하나만 생각했는데 스트레스가 쫙 오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저혈압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고쳐졌을 거다. 분명.

가장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인소 세계관의 악역이 어땠더라. 소설마다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악역이 원하는 건 하나였다. 여주의 파멸. 그리고 그 방식은 또 작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비인도적인 차원으로 가려고 했던 방법도 있었다.

‘그리고 어찌 됐든 나에게 여긴 현실이야.’

소설은 그래도 전체 연령가를 의식해선지 모르겠지만 결국 소설의 남주가 모든 걸 막았으니 만사 OK! 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러나저러나 소설 속 환상 따윈 개나 주게 되는 곳이었다. 물론 반휘혈과 그 친구들에게 엮인 이후부턴 내게도 그런 환상을 경험할 기회가 생긴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목숨이 걸린 일이면 이야기가 달랐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선 나와 내 동생 놈은 거의 조연 확정이었다.

‘최악이면 진짜 죽는다.’

인소 세계관은 참… 현실적인 건지 아닌 건지 그 경계가 애매할 때가 있었다. 고등학생이라고 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좀 전형적으로 죽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예를 들어, 조연에게 있어선 억울한 일이지만 여주의 각성을 위해 친구가 죽는 장면도 있었다.

물론 여주가 죽기도 한다. 불치병이나 난치병에 걸려서. 가장 잘 쓰였던 소재가 암이었던가, 백혈병이었던가…. 가끔씩 이름마저 들어 본 적 없던 극한의 희귀병을 찾아와 적어 내는 작가도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아무튼 엮이고 싶지 않아.’

아침부터 끔찍했던 경험이 되살아났었다. …어쩌면 그 사고를 다시 상기시킨 건 이 일을 위한 전조 현상일지 또 모른다. 진짜 이 세계가 나에게 경고라도 보내는 걸까?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서이수가 여주에게 잘못 얽혀 크게 다치는 것도 싫었다. 더불어 한도훈, 이재현, 김시원 그리고 반휘혈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들의 싸움을 방치해 왔던 건 내가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저 녀석들이 다른 누구에게 쉽게 지지 않을 거란 믿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남주로 추정되는 녀석이 이 학교에 왔다고.’

벌써부터 파란의 예고였다. 만약, 정말 만약, 반휘혈도 이 학교로 온다면? 진짜 누가 남주가 될 건지 피가 말릴 것이 눈에 훤했다.

‘남주 후보, 남주 후보 그렇게 생각한 건 맞지만…, 진짜 원한 건 아니었는데.’

물론 반휘혈만큼 남주 같은 녀석이 없긴 했다. 재벌에 무시 못 할 가정사, 사교성 없고 제멋대로인 성격까지. 사실 --^의 특징은 다 갖춘 놈이었다.

아니, 인소면 인소답게 라이벌은 다른 학교에 좀 있으면 안 되냐고. 왜 경쟁 상대 두 학교가 같은 곳을 고르는 건데…! 특히 강해중 놈들! 너넨 너희 지역 학교를 고를 것이지, 왜 우리 학교로 골라서 이 소란을 일으키는 건데, 어?

‘아, 몰라.’

결국 아무리 생각해 봤자 지금은 모조리 제자리걸음이었다. 강해중 놈들이 이 학교로 온 진의도 몰랐고, 도방고에 여자 주인공이 다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나랑 내 동생들만 안전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앞으로 정보에 더 민감해져야겠는데.’

그동안 설마, 라는 심정에 대충 넘기며 살았더니 이렇게 역풍을 맞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앞으로의 학업이 솔직히 엄청 걱정되긴 했지만 동생들의 안위도 중요했다. 모를 땐 몰랐어도 친하게 지내는 판국에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이번엔 반 정보통이랑 친해져야 되려나.’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 누구보다 정보에 민감한 것. 요 몇 년 동안은 그냥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해도 소식이 들려와서 금세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다 아는 얘기가 아니라 더 세밀하고 정확한 내용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다음 싸움이 어디서 일어날 예정이라든가, 어떤 학교의 분위기가 이렇네 저렇네 라든가, 요즘 누구의 관심사가 누구라든가, 그 관심 대상의 정보… 같은 것들 말이다.

“흠.”

부디 얘기가 좀 통하는 애면 좋겠는데. 나는 몰려 있는 학생들을 대충 훑어보며 이 중에 과연 누가 이반의 정보통일까 가늠해 봤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밀집되어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확인이 되질 않아 잠시 뒷전으로 미루기로 했다.

‘난 머리 쓰는 거 진짜 젬병인데.’

아직 얘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진 않았지만 벌써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맞지도 않은 감투를 억지로 쓴 기분이라 영 마땅찮은 기분이었지만 이미 난 건너면 안 될 강을 열심히 건너고 있었다.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건너는 저편이 험악한 가시밭길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