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6)
“하아….”
역시 스스로 피곤한 길을 가는 건 아빠를 닮은 걸까. 내가 느끼기에도 귀찮은 성격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어? 흩어진다.”
“뭐야, 뭐야. 대체 무슨 얘기를 했을까?”
“안 싸워? 안 싸우는 거야? 이대로 끝이라고??”
“그래도 서열 전쟁 나는 거 맞지 않을까? 저렇게 사대천왕이 등판했잖아.”
“그럼 고찬영이랑 싸우는 거야?”
“와, 그럼 2년 만에 사대천왕 자리 엎는 거임??”
드디어 운동장에 몰려 있던 유명인들이 흩어지려 하자 이번엔 다른 의미로 반이 어수선해졌다.
“야, 그래도 고찬영이 서열 3위인데 쉽게 지겠냐.”
“확실히 그건 그래.”
“그래도 최강혁이나 반휘혈은 차기 사대천왕 후보잖아. 실력도 괴물이라던데 혹시 모르지? 단번에 밟아 버릴지.”
“야, 근데 우리 학교 일짱은 누가 되는 거야?”
한참 고찬영이 사대천왕 타이틀 방어전에 성공할지 말지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중 누군가 불쑥 중얼거렸다.
“반휘혈 아냐?”
누군가 그에 대해 답했다.
“야, 최강혁 몰라? 전승 무패 최강혁.”
그러자 누군가 그에 반박했다.
“너야말로 뭘 알아. 반휘혈도 전승 무패거든?”
“걘 잘 안 싸우잖아.”
“상대할 가치도 없단 거지!”
“쫄아서 도망간 걸지 누가 아냐!”
“뭐, 이 새꺄? 그럼 중학교 1학년 때 그렇게 화려하게 부수고 다녔겠냐?!”
음? 나는 갑자기 들려온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숴? 뭘 부숴?’
새로운 소식이었다. 귀를 기울여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반휘혈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동쪽 지역을 제패했다. 그 시기의 반휘혈은 굉장히 난폭한 상태였다. 걸려 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언가 화풀이하는 것처럼 타 학교를 부수고 다녔다고 한다.
정말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예민해지면 그 누구의 말도 안 들어 먹는 그의 성격을 고려해 보자니 이해 못 할 건 또 아니었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사춘기가 접어들 즈음에 가정사가 그런 모양이니 스트레스를 안 받곤 못 살았겠지.
‘…이걸 모르고 있던 나도 참 나다.’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 모양이었지만 이 소식을 처음 듣는 나로선 참으로 뻘쭘해졌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그때의 난 꽤나 정신이 없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당시 중학교 2학년이 된 것도 모자라 없던 동생까지 생겼다. 게다가 그 유명한 일진에다 술, 담배까지 하질 않나, 잘못하면 진짜 나쁜 길로 빠질 것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동생 한 명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탄 날 순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동생 놈 갱생, 공부, 운동, 더불어 세계관 적응 등 이 모든 걸 잡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보니 2년은 순식간에 지나 있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난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나랑 내 가족 챙기기도 벅찬데 어떻게 남을 챙겨. 어우, 다시 돌아가서 하라 해도 그건 무리다.’
아마 반휘혈이랑 그 당시에 부딪혔으면, 최악의 꼴이 났을지도. 나도 걔도 극한으로 예민한 상태인데 좋은 꼴이 날 수가 있겠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씁쓸한 현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래. 반휘혈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턴 거의 활동이 없긴 했어도 1학년 땐 걸어 오는 싸움 안 가리고 다 받았잖아. 그리고 내가 도방중 다녀 봐서 아는데 걔 1학년 때 멀리서 보기만 해도 잘못 걸리면 하나 잡아 죽일 것처럼 무서웠어.”
오. 2학년 때부턴 얌전했다니. 생각보다 빠르네. 하지만 냉정한 그의 성미를 생각하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화풀이할 대상이 잘못되었음을 어린 그 역시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땐 좀 무기력해 보였지.’
비록 반년 전이긴 해도 내가 봐 왔던 반휘혈은 조금이지만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친구였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당시에 보았던 얼굴은 그 어떤 감정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지금에 와선 그게 결핍으로 인한 공허함의 표출이었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새삼 많이 변했네.”
몇 개월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얻은 걸까? 내가 해 준 거라곤 딱히 없는 것 같아 더더욱 신기한 감정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야, 그래도 중학교 1학년인데 무섭긴 뭐가 무섭냐? 이 새끼 허언증 있네.”
“골목길에 중학생이 담배 피우고 있으면 눈도 못 마주칠 새끼가 뭐래. 거짓말 아니고 진짜거든?”
내가 반휘혈의 변화에 대해 감회를 새롭게 하고 있는 그때, 아직까지도 한참 설전을 벌이는 두 학생의 가운데 어떤 학생이 다른 친구를 향해 물었다.
“근데 다 떠나서 반휘혈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이 지역 일짱인 건 맞지 않아?”
“맞지.”
“그럼 강한 거 맞잖아.”
‘그러게.’, ‘어, 누가 반휘혈 약하대?’, ‘헐. 미친 거 아냐?’. 갑자기 분위기가 자신에게 불리해졌다는 걸 감지한 학생은 당황하면서도 말을 정정했다.
“누, 누가 반휘혈 안 강하대? 난 최강혁이랑 비교하면 최강혁이 위라 했지.”
나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쫄아서 도망갔네, 어쩌네 라고 했으면서 모른 척하는 그 모습이 아니꼽지만 잠자코 지켜봤다.
“확실히 최강혁이 강하긴 존나 강하지. 이름도 어떻게 최강혁이냐.”
“난 솔직히 둘이 한 번쯤 붙을 줄 알았는데 안 싸우더라.”
“근데 왜 하필 최강혁은 이 학교로 왔대. 반휘혈이야 이 지역이라 그렇다 쳐도….”
“그러게…. 걘 진짜 왜 왔냐.”
최종적으론 왜 최강혁이 이 학교로 왔냐고 귀결됐다.
“이 학교에 뭐 있나?”
“아니면 반휘혈한테 도발하는 거 아님? 자기 부하로 삼겠다거나, 뭐 이런 거.”
“와, 그럼 성격 진짜 대박인데.”
“이사한 걸 수도 있잖아.”
“…강해중 애들 전부 왔는데 단체로 우연히 이사했겠냐? 당연히 입 맞추고 온 거잖아.”
반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추측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무언가는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근거 없는 말들이 난무하는데,
“야, 야! 대박! 대박 소식! 최강혁, 조커 때문에 이 학교에 온 것 같대!”
어떤 아이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나는 그 단어에 반사적으로 몸을 흠칫거리며, 떨리는 눈으로 소리친 학생을 보았다.
“뭐? 조커? 뭔 소리야?”
“내가 방금까지 저기 운동장 있던 애랑 연락했는데, 이윤이 조커 발견했다면서 신나게 최강혁한테 전화했대. 최강혁도 거기에 관심 보였다고 하던데?”
“헐. 대박.”
“조커가 뭐야?”
“몰라. 처음 들어.”
“와, 씨. 미친. 조커 때문이었어?”
“그니까 그 조커가 대체 뭔데?”
반 아이의 말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그리고 동시에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조커에 대한 소식을 들어 본 자와 아닌 자. 이렇게 양극으로 나누어지자 소식을 들어 본 어떤 아이가 잘난 척하듯 입을 열었다.
“이렇게 소식에 둔감하면 쓰나. 조커는 말이지, 반휘혈 그룹의 히든카드라고.”
“히든카드?”
“그래. 그 태산고 일짱 알지?”
“걘 또 누구야.”
“그, 왜, 덩치 큰 돼지 있잖아. 성격 더럽고.”
“아. 길 지나갈 때 이상한 눈으로 본 그 변태?”
“어, 걔.”
…그 태산고 돼지 자식, 정말 가지가질 하는구나. 나는 구겨지는 얼굴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그 태산고 일짱을 일격에 쓰러트린 사람이 바로 그 조커라고. 쩔지 않냐?”
“허얼.”
“와, 대박. 걔 190cm 넘어 보이던데.”
“그 덩치를 일격에? 걘 또 무슨 괴물임?”
“쩐다.”
“그런 사람을 히든카드로 숨겨 놨었다고?”
“야, 근데 그 조커를 왜 여기서 찾아?”
“…설마 우리 학교 학생이야?”
누군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잘난 척 떠들던 아이는 더욱더 자기 일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그래! 그 조커가 우리 학교 학생이래! 그것도 여학생!”
“여자? 여자라고?!”
“야, 사기 치지 마.”
“와, 여자라니. 멋지다.”
“누굴까?”
“짱이다!”
정보가 하나둘 늘수록 반응이 아주 난리가 났다. 그럴수록 나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걸 참아 내야만 했다.
“근데 그거 찌라시 아니었어?”
“아냐, 내 친구가 그러는데 고찬영이나 이윤이나 걔네들이 전부 여자를 찾았어.”
“아, 진짜?”
“게다가 서이수 누나 아니냐고 막 꼬치꼬치 캐묻던데.”
아, 젠장.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 있어서 최악의 단어가 뿌려졌다.
“어?”
“응?”
“서이수 누나…?”
화악, 한순간에 부담스러운 시선들 짜 맞춘 것처럼 내게로 몰렸다. 나는 그 시선들에 당황하면서도 곧장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 아냐.”
그러니까 이쪽 보지 마. 나 이런 걸로 주목받고 싶지 않아.
“진짜 아냐?”
“아냐.”
“이나 너 체육 되게 잘하지 않아? 체육 시간엔 완전 날아다니던데.”
“그 정돈 그냥 하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5반 그 키 큰 여자애도 싸움 잘하겠다?”
나는 그들을 최대한 외면하려 했지만 한번 붙은 의심은 좀체 떼어 놓을 수 없는지 자꾸만 내게 캐물어 댔다.
“너희 집 무에타이 체육관 운영하지 않아? 너 야자도 빼고 거기 가잖아.”
쓰읍.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지만 나는 가까스로 할 말을 찾곤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나 거기서 그냥 기초 체력만 하거든? 기술이나 그런 거 배운 적 없어. 여기에 우리 체육관 다니는 애 있으면 알걸?”
“아, 나 주말에 거기 다니는데 이나는 진짜 기초 체력 위주의 운동만 하더라. 스파링이나 샌드백 치는 걸 본 적이 없긴 해.”
어휴, 나는 그 말에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주말에 우리 체육관에 다니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속으로 들킬까 안달복달했던 만큼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에이, 조커가 우리 반인 줄 알고 괜히 기대했네.”
“아쉽다.”
그리고 그 말을 기점으로 아이들의 시선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나는 괜히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슬쩍 이마를 쓰는데 내 곁으로 어떤 단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