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7)
작았지만 어쩐지 귀에 박히는 말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굳히며 그쪽으로 빠르게 얼굴을 돌렸다.
“…흐익! 어, 아, 저, 어.”
그런데 그 단호했던 말과는 다르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아이는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그 반응 덕에 되레 침착해진 난 최대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내게서 멀어졌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 난, 그, 별거 아니야!”
아이는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도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 뭐지? 왜 저렇게 긴장한 거지? 난 이해할 수 없는 그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게, 어, 나는 그만 자리에 가 볼게…!”
그리고 그 아이는 부리나케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에 얼떨떨해졌지만, 의자에 앉자마자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숨어 버리는 아이의 행태에 더는 별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동안 눈을 깜빡이며 담요로 가려진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나야, 왜 그래?”
“아, 혜인아. 너 혹시 쟤 알아?”
“응? 방금 너랑 얘기 한 애지?”
“응.”
이혜인은 책상에 엎드린 아이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이번에 처음 봐. 왜?”
그녀가 의아한 듯 나를 보았다. 나는 이혜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엎드려진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았다.
‘덥수룩한 머리랑 두꺼운 뿔테 안경….’
내 눈꺼풀 사이가 저절로 좁혀졌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조합이었다.
“…설마, 여주?”
“자! 이제 조용히 하고 앉읍시다! 수업 시작했어요!”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릴 때, 교탁을 탕탕 두드리며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정숙을 요청했다. 나는 그 소리에 퍼뜩 놀랐다가 내 가방이 놓인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만 엎드려진 그 아이에게 향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이번 해에 이 반을 맡게 된 박미혜이고…,”
이번 반을 맡게 된 담임 선생님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소개를 끝마친 담임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서이나.”
“네.”
이름 순서로 되어 있는 순번은 곧 내 이름을 호명했다. 그래서 손을 들어 대답하자 내 순번이 지나고 다음 순번에 있는 아이의 이름이 불렸다.
“안경희.”
“네에….”
소심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안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순조롭게 다음 번호로 이어 갔지만 내 시선은 다음 순번이었던 그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름이 안경희구나.’
참으로 기가 막힌 우연인지 몰라도 내 다음 번호가 저 아이였다니. 운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지만 어쨌든 이름을 알아냈으니 그만이었다. 게다가 안경희라. 좀 신기한 구석이 있는 이름에 내 의심은 점점 박차를 가했다.
“다 온 것 같네요. 그럼 방금 불린 이름대로 자리를 맞추도록 할게요.”
그런데 연이어 들려진 담임의 말에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네에??”
“아, 싫은데….”
여기저기서 불만이 새어 나왔다. 친구와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은 못마땅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친구와 동떨어져 어색하게 홀로 앉아 있던 아이들은 차라리 잘됐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첫 한 달은 좀 봐주시지. 너무해.”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이혜인은 전자였다. 중학교 때부터 4년 연속 같은 반이 된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짝꿍 운은 안 따라 주는지 옆자리가 되어 본 적은 실제로 손에 꼽았다. 나는 실망해하는 이혜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내 자리를 찾아갔다.
“오, 창가 자리.”
게다가 적당한 뒷자리였다. 안 그래도 나와 이혜인 둘 다 빨리 온 편은 아니라 그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질 못했다. 그래서 애매한 중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자리가 변경됨으로써 뜻밖의 이득이 찾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녕?”
“어, 어….”
마침 정체가 궁금했던 그 여자아이가 내 짝이 되었고 말이다. 나는 당황해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이름이 안경희, 맞지?”
“으, 응. 그러니까….”
안경희가 나를 힐끔 보며 우물쭈물했다. 손끝을 꼬며 내 눈치를 보는 모습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내 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서이나야. 잘 부탁해.”
“아, 응. 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저기… 만나서 바, 반가워.”
안경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 모습에 그녀가 낯을 정말 많이 가린다는 걸 느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나는 신중하게 옆자리의 아이를 탐색했다. 방금 했던 그 말은 무슨 뜻이며, 무엇보다 지금 쓰고 있는 그 안경 좀 벗어 보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그러면 분명 도망가겠지. 내 곁엔 이런 타입은 좀체 많이 없다 보니 다가서는 방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나 무서운 사람 아니니깐 겁먹지 마? 위험하지 않아?
“…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말주변 없는 나로선 여간 까다로운 일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깐 여주가… 맞나?’
담요로 몸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언뜻 봐도 마른 몸매는 아니었다. 방금은 당황해서 제대로 살피질 못했지만 여유가 있는 지금으로선 찬찬히 몰래 이 아이를 관찰할 수 있었다.
‘통통한 여주가 있었던가.’
기억을 뒤져 그런 타입의 여자 주인공이 있었나 확인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간혹 통통했지만 살을 빼면 미인! 이런 스타일의 여자 주인공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저 안경이 문제구나. 안경으로 인해 얼굴이 다 가려져 분별이 되지 않는 그녀의 외향에 나는 볼을 긁적였다. 저게 미모 봉인구가 맞다면 이 아이가 여주일 확률이 대폭 상승하리라. 그런데 저걸 어떻게 벗기지? 다짜고짜 벗어 달라 할 수도 없어 막막했다.
‘…우선 다른 것부터 물어볼까.’
나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가방 안에서 수첩을 꺼내 간단히 메모했다. 그리고 앞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계시는 담임의 눈치를 보며 슬쩍 옆으로 밀어 안경희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아까 거짓말이란 건 무슨 뜻이야?]
처음부터 너무 본론인가 싶었지만 두루뭉술하게 접근하는 것은 적성에 맞질 않아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게다가 방금 들었던 그 말은 그냥 넘기기엔 다소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조커가 아님을 증명하고 난 후, 바로 들려왔던 그 말에서 느껴진 단호함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혹시 이 녀석은 내 정체를 아는 걸까? 어떻게 아는 거지?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대다수가 모르는 사실을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식으로 파고들어 알게 된 건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어, 어….”
그런데 안경희는 꽤 놀란 모양인지 말을 더듬으며 몸을 심하게 경직시켰다. 의도치 않게 더 겁을 먹어 버린 것 같은 그 태도에 나는 되레 놀라 눈을 깜빡였다. 낯을 많이 가릴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놀랄 일인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황급히 다시 펜을 놀렸다.
[나 위험한 사람 아니니깐 안심해.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해.]
혹시라도 정말 이 아이가 날 조커라고 의심하고 있다면 이렇게 놀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딱 보아도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그런 애가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이렇게 접근하면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난 이 아이를 겁박할 생각도, 해할 의도도 전혀 없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또 모를 일 아니겠는가. 아무튼 소심한 사람은 이럴 수도 있다고 책에서 읽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안경희는 내 메모를 확인하고 나를 다시 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최대한 무해하게 웃어 보이며 펜으로 수첩을 툭툭 두드렸다. 겁먹지 마. 겁먹지 마. 이 언니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야. 진정하고 나와 대화 좀 하자. 간절히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자 안경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내가 건네준 펜을 잡았다.
[알고 있어. 너 위험하지 않은 거.]
‘응?’
그런데 그녀는 내게 아주 뜻밖의 말을 전해 왔다. 생각도 못 한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안경희를 보니, 그녀는 나를 흘끗 보다가 흠칫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느릿한 손놀림으로 종이 끝자락에 작게 무언가를 적었다.
[저기, 그니깐….]
안경희의 손이 망설이는 것처럼 자꾸만 손을 멈칫거렸다. 그러다 그녀는 곧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겠지만… 내가 네 팬이라 그래!]
“…….”
정말 갑작스럽다. 상상도 못 한 내용에 나는 벙찌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경희는 두르고 있던 담요를 들어 올려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서 내게 보이는 건 잔뜩 빨개진 그녀의 귀뿐이었다.
팬? 내 팬…? 내 팬……?!
반휘혈도, 한도훈도, 이재현도, 김시원도, 하물며 서이수 팬도 아니고…, 내 팬?!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안경희를 멍하니 보았다. 안경희는 아직도 얼굴을 묻은 채, 내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내 팬이 된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고민해 보아도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접근한 거의 모든 이들이 반휘혈과 아이들에 대한 소식과 정보를 탐내기 위해, 또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용하려 한 아이들이 태반이라 이 말이 너무나 얼떨떨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최대한 침착하게 펜을 주워 차분히 적어 갔다.
[저기, 경희야? 내 팬이라고 해 줘서 고맙긴 한데,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냐.]
이전 생에서 선수 생활을 뛰긴 했지만 팬은 거의 전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시아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는 건 짧았고 제대로 퍼지지도 않아 인지도가 너무 낮았다. 응원의 말은 들어 본 적은 있지만 대부분 세계 챔피언이었던 선수의 팬으로 빠져 내게 향해지는 관심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그 선수는 꽤 잘생겼고.’
같은 여성 선수였지만 굉장히 잘생겼다고 호평 일색이었다. 게다가 아시아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니만큼 굉장히 강하니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