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75화 (75/306)

75.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8)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자 속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었다. 설령 그녀가 이 세계에도 있다고 해도 이젠 나완 상관없는 일이었다. 물론 기회가 있다면 만나 보고 싶긴 하지. 될 수 있다면 연습이라도 좋으니 스파링도 한번 붙어 보고 싶고.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질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신기하긴 하네.’

선수는 아니었지만 이제 와 내 팬이 생겼다는 말은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 무언가를 이룩한 적도 없어서 더 당황스럽다. 내가 한 일이라곤 길거리에서 얼굴 가리고 싸움 몇 번 한 게 다였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말해 뭐 한가. 그냥 평범하게 학업에 집중한 일밖에 없었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팬이 되어서 대체 뭐가 이득이라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신기한 듯 안경희를 보자, 안경희는 고개를 재빠르게 내저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렇지 않아…!”

“거기 조용. 첫날이라고 해도 수업 시간이니 조용히 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는지 안경희는 외치고 나서 바로 합, 하고 입을 다물며 당황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장 담임에게서 지적이 들어왔다. 안경희는 낯을 붉히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시 반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지만, 곧 담임의 목소리가 재차 이어져 흩어졌다.

나는 교탁 쪽을 잠시 보다가 안경희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곤 그녀는 조심스레 펜을 다시 잡아 내 말에 대한 답변을 끄적였다.

[너 대단한 사람 맞아. 그리고 나 말고도 팬 있어. 물론 그 사람들은 대부분 네 정체를 잘 모르기야 하겠지만.]

역시. 나는 그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안경희는 아니나 다를까 내 정체를 조커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은 모르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아니, 그보단 얘 말고도 내 팬이 있다고?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왜 나를 조커라고 확신해?]

하지만 당장 짚어야 할 부분은 다른 팬의 유무보단 이 문제였다. 세상에 비밀이란 건 없기야 하다만, 번거로운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조커라 확신하고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

[어……… 마, 말하자면 기이이인…데……….]

그런데 안경희는 이제껏 덤덤히 잘 쓰다가 이제 와 글씨를 쓰는 걸 머뭇거렸다. 손끝에서부터 그녀의 당황이 여실하게 보일 정도였다.

[알려 줘.]

대답이 필요했던 나는 지체치 않고 곧장 물었다. 안경희는 그런 날 힐끔 보던 얼굴을 슬쩍 붉혔다. 그러곤 망설이는 것도 잠시, 그녀는 이제껏 망설이던 모습과 상반되게도 빠르게 적어 나갔다.

[내가 실은 이런 서열 싸움에 관심이 없었는데……. 근데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어떤 소식을 들었어. 그게 바로 조커야. 이 동네에 살다 보면 반휘혈 소문은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잖아. 또 반휘혈을 상대로 서열 싸움을 건 학교는 흔하니깐 그냥 그러려니 했어. 근데 그 서열 싸움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대. 덩치는 작은데 엄청 강하다고 하더라고. 처음엔 그냥 흔히 있는 루머일 줄 알았어. 실제로 그런 허위성 소문은 많거든.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소문이 구체적으로 바뀌더라. 그래서 호기심이 들어서 정보를 모았……. 아, 내가 컴퓨터를 좀 다룰 줄 알아!!! 아, 아무튼 그렇게 정보를 모으고 모으다 보니깐 점점 방향이 잡히는 거야. 조커에 대한 소문은 정말 많았어. 하지만 필요 없는 걸 없애고 핵심만 바로 잡으니깐 나온 말은 이거였어.]

‘무에타이, 키 작음, 여자, 도방고등학교, 반휘혈 그룹과 친해 보이는 누나.’

우다다다 적어 가는 메모를 홀린 듯 따라 가다 최종 지점에 시선이 고정됐다.

‘누가 봐도 나네.’

너무나도 납득이 가는 결론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다시 그 내용을 찬찬히 살피며 그에 대한 답변을 적었다.

[그런데 이래도 내가 아니면? 도방고등학교에 걔네들이 몰래 알고 있는 누나가 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수긍해 주진 않았다.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잡아 시치미를 떼는 게 좋았다. 나는 과연 이번엔 이 아이가 어떻게 나올까 지켜봤다. 안경희는 그런 내 대답을 물끄러미 보며 펜을 툭툭 두드리더니, 조심스레 답변을 달았다.

[…실은 내가 너희들을 조사해서. 너를 제외하곤 따로 친하게 지내는 누나가 없다는 걸 알아. 특히 반휘혈이.]

“…….”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조사? 조사를 했다고? 어떻게? 그런 의문이 여실하게 드러났는지 안경희는 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설명을 추가했다.

[그, 말했다시피, 내가 컴퓨터를 좀 잘 만지거든.]

나는 그 문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맙소사. 생각도 못 한 인재가 이렇게 굴러들어 오다니. 나는 예상치 못한 인재 발굴의 현장을 목도한 기분으로 안경희를 보았다.

‘이, 이건… 여주를 떠나서 대단한데.’

여주라고 해서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물론 여주였으면 더 피했겠지. 그러나 점점 대화를 할수록 이 아이는 여주와는 거리가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다. 인소에서 이런 타입의 여주는 등장한 적이 없었다. 힘이 강하거나, 노래를 잘하거나, 춤을 잘 추거나 뭐 이런 능력이 있다는 설정은 여럿 봐 왔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에 트이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여주는 내가 알기론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엇보다 여주든 아니든 간에 이 정도의 능력자를 내 지인으로 만들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 같았다. 그토록 원하던, 아니, 그 이상을 보여 주는 정보통의 자질에 내 심장이 설렘으로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경희야. 정말 실례인 거 알지만 안경 좀 벗어 보지 않을래?]

그래도 혹시나 싶은 가정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나는 절실한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요청했다. 안경희는 의아하게 나를 보았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슬쩍 안경을 내려 보였다. 그것을 집요한 눈으로 탐색하자,

나타난 것은 아주아주 평범한 얼굴이었다.

“……!!”

감동이 차올랐다. 나는 입을 당장이라도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아 내며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경희야!”

“어, 어??”

“거기, 조용히 하세요.”

수업 시간만 아니었으면 더 격하게 환영해 줬을 텐데 너무나 아쉬웠다. 안경희는 갑작스러운 내 접촉에 꽤나 당황해했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여전히 얼굴은 새빨갰지만 말이다.

나는 그것을 하등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붕붕 흔들며 진심으로 반갑게 웃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이로써 정보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아, 아침부터 언짢았던 기분이 한층 덜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나는 아침부터 그렇게 고생한 걸지도 몰랐다. 이 정도의 인맥을 만든다면 그 정도쯤이야! 나는 납득하며 신나게 두 손을 연신 흔들었다.

***

“솔직히 말할게. 난 네 정보력이 필요해.”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안경희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물류 창고로 쓰는 빈 교실이었는데 나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 정보?”

내게 엉겁결에 끌려온 그녀는 뜬금없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했다.

“나는 이런 쪽으로 진짜 거의 몰라. 알아도 소문 수준이고… 너처럼 제대로 파악할 순 없어.”

“저기, 그, 한도훈도 정보 쪽엔 밝을 텐데….”

그러자 안경희는 망설이면서도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꽤나 예리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걘 안 돼.”

확실히 한도훈은 정보에 밝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녀석은 너무 자기 위주로 정보를 굴린다는 점이었다. 공유를 해도 딱 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 안에서였다. 또 그게 진실일진 그 여부도 제대로 확인이 안 됐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건 작년에 나와 반휘혈이 싸우고 화해한 후였다.

‘그 자식이 분명 휘혈이가 형 오피스텔에 없었다는 걸 몰랐을 리 없어.’

보아하니, 한도훈은 반휘혈의 형과 연락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몰랐다? 아주 이상한 얘기였다. 분명 한도훈은 알면서도 그 사실을 감췄을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 녀석이 밉다거나 배신감이 들진 않았다. 나름 가벼운 충격을 받긴 했어도 그 녀석이 내게 악의를 가지고 그러질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녀석은 지나치게 반휘혈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끔 저건 스토커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만 좀 괘씸해서 한 대 때렸지만.’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얻어맞은 한도훈이 억울해했던 것 같지만 나는 별말 않고 한 대 더 때려 버렸다. 너도 좀 당해 보라는 내 소심한 항의인 셈이었다.

“아무튼 부탁할게. 원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어….”

나는 안경희에게 진지하게 부탁했다. 그녀는 내 청에 당혹스러워했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 저기, 부탁 안 해도 뭐, 뭐든 들어줄 수 있어. 내,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되었다면 난 그걸로 기쁘거든.”

안경희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내 말이 아주 기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빛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물었다.

“혹시 지금 궁금한 거 있어? 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다 알려 줄게…!”

이제껏 없던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짜 팬인가 봐.’

어쩐지 남 일같이 느껴졌지만 그녀가 내 팬이란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왠지 기분이 쑥스러워졌다. 나는 시선을 사선으로 올리며 볼을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잠깐. 이 좋은 걸 서이수 그 자식은 잔뜩 느꼈단 말이지? 나는 갑자기 떠오른 사실에 떨떠름해졌다. 아직까지도 서이수의 팬을 자처하는 친구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갔다. 아마 평생 이해 못 할지도 몰랐다.

‘휘혈이나 다른 애들이면 몰라도… 응?’

문득, 나는 머릿속에 걸리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뭐지?”

왠지 내가 뭔가를 까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 뭐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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