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9)
“왜?”
안경희가 그런 날 의아하게 보았다. 하지만 나도 정확히는 떠오르질 않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내가 뭔갈 까먹고 있는 것 같아서.”
“어…. 그렇구나.”
뭘까, 뭘까. 한참 고민해 봤지만 그 내용은 불투명했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지? 거기에 힌트가 있을지도 몰랐다.
“서이수는 왜 팬이 있을까.”
“으응…?”
“진짜 왜 있을까.”
아니, 진짜 걘 왜 팬이 있는 거지? 다시 생각해도 미스터리였다.
“어?? 어, 그, 그야 잘…생겨서? 친절하기도 하고?”
“응?”
생각을 타고 올라가다가 그냥 중얼거렸던 말에 안경희가 사뭇 진지하게 대답해 줬다. 나는 그 말에 고민하다 말고 경악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친절은 개뿔! 걔가 얼마나 말썽쟁이인데! 얼굴도 휘혈이나 다른 애들…, 아.”
기억났다. 내가 하려고 했던 일.
“아! 메일!!”
잊고 있던 반휘혈의 메일이 떠올랐다. 3주간 단 한 번도 연락을 못 했고, 어제 겨우 돌아오자마자 바로 뻗어서 확인도 못 했던 그 메일. 쉬는 시간이 되면 시청각실에 들르려고 했던 걸 겨우 떠올리고 말았다.
“으아, 세상에. 이걸 잊고 있었다니.”
여러 상황이 맞물려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이대로 학교 끝나고 집에 갔어도 그 메일의 존재를 한동안 잊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로 인해 따라오는 반휘혈의 분노는 덤이었다.
“…메, 메일? 아! 반휘혈 연락!”
그런데 내 혼잣말을 듣던 안경희는 내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더니 손뼉을 짝 치며 답을 유출해 냈다. 나는 그 말에 멈칫하며 안경희를 수상하게 보았다.
“……너 그런 거까지 알아?”
“어? 아, 아니. 너 2G폰이니까 미국 간 반휘혈이랑 당연히 메일로 주고받을 줄…. 아, 아니면, 미, 미안해.”
…이 녀석, 똑똑한데? 머리 돌아가는 게 수준급이었다. 간단한 정보만으로 쉽게 답을 내놓다니. 역시 정보통의 자질이 탁월했다.
‘내 안목, 생각보다 훌륭한걸?’
그걸 깨닫자 스스로의 안목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정말 든든한 뒷배가 생긴 기분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해. 너무 사생활만 안 파면 그만이지, 뭐.”
“으, 응…! 나 거기까진 안 해! 아, 무, 물론 네가 원하면 다른 사람은 조사해 줄게!”
“음. 아마 거기까진 필요 없을 거 같아. 어쨌든 마음만은 고마워.”
그런데 내 말이 꽤나 기뻤는지 안경희가 적극적인 의욕을 보였다. 확실히 듬직한 말이었지만, 거기까진 너무 간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안 가길 바라기도 하고.’
뭐든 적당한 게 좋았다. 나는 안경희가 말해 준 내용까지 뻗칠 정도로 심각한 일은 없길 바랐다.
“아, 맞아. 이왕 아니까 물어보는 건데, 오늘 시청각실 문 열렸을까?”
왠지 얘는 알고 있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금방 대답해 주었다.
“어…. 아니. 오, 오늘은 안 열릴 거야. 전산실에서도 꺼놨을 거고…!”
“역시 그렇지…?”
실망감에 입술이 저절로 삐죽여졌다. 역시 아무래도 집에 가서 확인을 해 봐야 하려나.
“그, 그으…! 내 노트북이라도 빌려줄까…?”
그런데 옆에서 희망 어린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음악실이라면…, 랜선도 있으니깐 화, 확인 가능해. 그리고 음악실은 실기생들을 위해서 매일 열어 두거든. 오늘은 개학 첫날이라 사람도 별루 없을 거구….”
“정말?!”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긴 했지만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반색하며 눈을 빛내자, 대화하는 내내 긴장하고 있던 안경희는 내 반응에 잠시 흠칫하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긍정했다.
“내, 내가 가끔 써 봐서 알아!”
정말 듬직한 말이었다. 새삼 자신의 안목에 다시 감탄하며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그럼 좀 빌릴게! 지금은… 곧 쉬는 시간 끝나니깐 다음 쉬는 시간 어때?”
“으, 응. 괜찮아.”
안경희는 얼굴을 붉히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그녀의 소극적인 자세는 상당히 귀여웠다. 순박함 마저 느껴지는 깨끗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착하고 좋은 데다가 순수하기까지 한 능력 있는 친구를 얻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내 기분은 자연스레 하늘 끝까지 솟구쳐 갔다.
“자, 이젠 반에 돌아가자. 아, 맞아. 나 번호 좀 가르쳐 줘.”
나는 품 안에서 폰을 꺼내 안경희에게 건넸다. 그러자 안경희는 왠지 모르겠지만 손을 벌벌 떨며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였다.
“어, 편하게 대해도 되는데….”
결국 참다못해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아까부터 날 너무 굉장하게 보고 있어서 모른 척해 주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너무 대단한 대우에 민망해져 머리를 긁적이니 안경희는 안 그래도 빨갰던 얼굴을 더 확 붉히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 노력해 볼,게….”
말끝이 흐지부지 끝나는 게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설마, 올해 내내 이러는 건 아니겠지?
“어, 힘내…?”
어라, 이게 아닌가? 아무튼 더는 할 말이 없던 나는 멋쩍음에 뒷목을 주물렀다. 하지만 안경희는 이런 내 보잘것없는 위로에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참 순수하고 착한 아이였다.
“여, 여기….”
“아, 고마워.”
나는 제대로 이름까지 등록한 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잘 부탁해.]
안경희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동시에 부담스러우리만치 눈을 반짝였다. 마치 크게 감동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음. 저 부분은 역시 고쳐 줬으면 좋겠네.’
살짝 부담스러움이 올라왔지만 노력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믿기로 하며 창고를 나왔다.
그런데,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응? …어?!”
투명하고도 맑은 소리였다. 그 상큼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솜사탕?”
그리고 순간 보이는 것에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웬 둥실둥실한 분홍색이 꼭 솜사탕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엇? 저 애는….”
그런데 솜사탕처럼 보였던 건 놀랍게도 사람 머리였다. 옆에서 깜짝 놀라고 있는 안경희의 말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시선을 강탈한 머리카락에서 조금 더 아래로 이동시켰다.
“워….”
동시에 이어진 건 내 감탄사였다. 눈앞엔 순간 아기 천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주 깜찍한 남자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고등학생 맞아?’
이젠 사람 얼굴 보고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건 아니었나 보다. 나는 다시금 저절로 나오려는 경탄을 억눌렀다.
‘그런데, …왜 쟤가 날 보고 있는 거 같지?’
기분 탓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랑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게다가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 혹시나 싶어 나 이외에 마주칠 만한 상대가 있나 확인해 보았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있어도 멀찍이 서 있어서 확인이 힘들었다.
‘그럼 경희를 보는 건가?’
슬쩍 옆을 보니 안경희도 나와 마찬가지로 나랑 저기 서 있는 솜사탕 머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 상황은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나 보다. 게다가 안경희가 정확히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자니, 역시 저기 저 솜사탕 머리는 날 보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외계인.”
알 수 없는 이 이상한 대치에 의혹만 더 커져 가던 중, 그 솜사탕 머리가 무언가를 불쑥 중얼거렸다.
“외계인?”
일순 내가 들은 단어가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단어였다. 뜬금없이 웬 외계인 타령?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솜사탕 머리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엇.”
그런데 느낌이 싸했다. 눈빛이 너무 과도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머릿속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뜰까 고민했지만, 솜사탕의 발걸음은 빨랐고 내 대처는 현격히 느려 버려 솜사탕이 어느새 내 앞에 당도하고 말았다.
“외계인 씨가 말한 사람!”
“으, 응???”
정말 생각도 못 한 엉뚱한 말에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얘가 뭐라고 한 거지? 저 얇고 예쁜 손가락이 가리키는 게 나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외계인 씨가 말했던 사람이다! 진짜 있었어!”
그래. 저 말. 저 말을 하면서 솜사탕 머리는 눈을 과하게 반짝이며 좋아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나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쉽사리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좀체 감이 오질 않았다. 물음표만 잔뜩 띄우며 눈만 끔뻑이고 있던 중,
“윤아. 사람 가리키면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왔다. 나는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키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려 등장한 인물에 경악했다.
“아! 맞다. 그렇지. 미안해요, 외계인 누나!”
“윤아….”
이 엉뚱한 친구의 일행은 난처하게 눈썹을 모았다. 그리고 내게로 시선을 돌려 사과했다.
“제 친구가 실례되는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미안한 듯 쓰게 웃고 있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난 여러 의미로 당황하고 있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갈피가 잘 잡히질 않고 있었다.
“윤아. 너도 어서 제대로 사과해.”
“우웅…. 나 틀린 말은 안 했는데.”
“하암-.”
방금의 행동을 지적하고 있는 웃는 상의 미남, 그 옆에서 입을 삐죽이며 그 귀여운 얼굴을 맘껏 활용하고 있는 미소년, 게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크게 하품을 하면서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미남.
“……맙소사.”
그들은 그 유명한 인소의 사대천왕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