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징조가 안 좋을 땐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좋다. (10)
왜, 왜 바로 눈치를 못 챘을까. 저 화려한 외향과 독특한 말투를 보자마자 바로 눈치를 채고 도망을 갔어야 했다. 아니, 너무 특이한 내용을 들어서 어쩌면 사고가 정지됐었는지도 몰랐다. 설마 살면서 외계인 어쩌고 하며 지적당할 일을 누가 예상했겠는가. 소리 없이 굳어 버린 난 경악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이 학교로 입학을 한 것은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아침부터 시끄러웠으니 귀가 먹지 않고선 들릴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그러니 내가 놀란 건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였다.
‘설마 이모티콘이 바로 연상될 줄은 몰랐는데.’
하긴, 목소리만 들어도 대충 어떤 이모티콘일지 짐작은 갔지만…. 방금까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이상할 정도인 분홍색 솜사탕 머리는 분명 >-< 였다. 그리고 시종일관 웃는 인상이 달려 있는 것 같은 미남은 ^-^ 일 테고, 옆에서 조용히 벽에 기대고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은 -_- 가 틀림없었다. 그래선지 이름도 유추가 가능했다. 분명 순서대로 다정한, 이윤, 서강이일 게 뻔했다.
“소설이 찐일 줄이야….”
정말 알고 싶지 않았지만, 들이밀어진 현실에 나는 허망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네? 소설?”
그런데 웃는 상의 남자가 의아한 듯 날 돌아봤다. …아니, 인소 주조연이면 주조연답게 큰 소리로 중얼거려도 못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저렇게 귀가 좋은 거야?
“아, 어…. 소설에 나올 것처럼 진짜 잘생겼단 소문이 사실이었다고요.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결국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던 난 대충 둘러대며 사과했다. 엄마가 면전에 대고 외모 평가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귀에 딱지가 생길 만큼 들었었다. 어쩌면 그로 인해 기분이 불쾌해졌을 수도 있어서 나는 멋쩍게 눈썹을 모았다. 그러자 ^-^…가 아니라, 다정한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도 실례를 저질렀는걸요. 그리고 편하게 말 놓으세요. 저희보다 한 학년 선배시죠?”
그가 내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1학년은 아직 명찰이 없다. 게다가 내 명찰은 2학년을 가리키는 붉은색 띠가 있어서 더 분간이 잘될 터였다.
“음? 서이나?”
“응?”
그런데 다정한이 내 이름을 갑자기 읊조리더니 가늘게 웃음 짓고 있던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뭐지, 이 불길함은. 왠지 느낌이 별로 좋질 않았다.
“어, 나 왠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서이수.”
이윤은 서이나라는 내 이름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다, 다정한이 한 이름을 나직하게 꺼냈다. 나는 그 이름에 얼굴이 구겨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혹시 서이수 누나실까요?”
“아! 서이수! 서이수였구나!”
…씁.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틀리질 않더라니. 살다 살다 서이수 이름을 얘네들 입에서 듣게 되다니. 요즘 부쩍 인기가 많아진 건 알았지만 설마 그 유명한 인소 조연들에게서까지 내 동생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서이수가 유명인이 된 걸 축하해 줘야 할지, 일진으로 유명세를 탄 걸 통탄해야 될지 참으로 난감해졌다.
‘뭐…. 이 세계의 일진은 그렇게 나쁜 이미지는 아니니깐.’
오히려 싸움 잘하는 아이돌 느낌? 여하튼 그런 분위기가 강세였다. 왜 서이수가 그렇게 일진 서열에 집착했는지 이 세계에 살면 살수록 자연스레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나 같아도 한다면 얘네들 덕질할 거 같아.’
웬만한 연예인보다 훨씬 잘생긴 외모. 게다가 공부도 잘하는데 싸움마저 강하다. 인기가 없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연예인이 아니다 보니 팔 수 있는 시기는 한정적인 게 흠이었지만 말이다.
“와! 그 서이수 누나예요?!”
“어? 어어….”
그런데 솜사탕, 이윤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기세가 너무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긍정해 주며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티 나게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이윤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더 밀착했다.
“누나! 그 반휘혈이랑 한도훈이랑 친하다는 거 정말이에요?”
“응? 휘혈이랑… 도훈이?”
그가 갑자기 엉뚱한 이름을 꺼냈다. 지금 상황에 왜 저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걔네들이 왜?”
“우와-! 친한 거 맞나 보다! 나 걔네들 이렇게 편하게 부르는 사람 처음 봤어!”
“…….”
도대체 반휘혈과 한도훈은 이 녀석한테 무슨 이미지인 걸까. 반휘혈은 몰라도 설마 한도훈마저 이미지가 이상한 걸로 보이니 이 녀석들 사이에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누나, 누나! 걔네들이랑 어떻게 친해졌어요? 전 걔네들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애들은 본 적이 없어요!”
어어, 그래. 알겠으니까 진정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진 않니? 나는 지척에 보이는 얼굴 때문에 땀이 저절로 나오는 것만 같았다.
“윤아. 선배가 난처해하잖아.”
한참 너무 가까운 얼굴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다정한이 이윤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잡아끌었다. 그 배려에 난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이윤은 다정한에게 붙잡혀 있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내게 물어 왔다.
“누나 몇 반이에요? 저 놀러 가도 돼요? 저 놀러 갈래요! 저랑도 친해져요!”
아니, 제발 오지 마.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거절을 꾹 눌러 참았다. 이 말을 꺼냄으로써 받게 될 따가운 눈총들을 생각하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쩍 그의 눈을 외면했다.
‘…그보다 도방중이랑 강태중은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분명 그런 식으로 소문을 들었던 것 같은데, 역설적이게도 이윤은 내가 도방중 애들이랑 친하다는 걸 알게 되자, 오히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눈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윤아, 선배가 싫어하잖아. 그만둬.”
“웅… 하지마안-!”
“이윤. 너 진짜 오늘따라 왜 그래? 평소엔 이 정돈 아니었잖아.”
다정한의 만류에도 이윤이 쉽게 굴하지 않자, 다정한은 의아한 듯 자신의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이윤은 그런 다정한의 시선과 마주하지 않고 잡혀 있는 자신의 목덜미를 뿌리치며 볼을 잔뜩 부풀렸다.
“외계인이랑 닮은 사람은 처음 봤단 말야!”
“…….”
“…….”
“…….”
깊은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나는 이윤이 한 말을 조용히 다시금 되새겼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저거 지금 무슨 뜻이지? 욕? 욕인가? 욕 맞지?! 파들파들 입꼬리가 떨려 왔다. 미간은 험악하게 찌푸려지는 게 느껴져 검지로 그 사이를 꾹꾹 누르며 그것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얘가 이상한 소릴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엔 차마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는지 다정한이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며 이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 이윤이 밑에서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지만, 다정한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배 사람같이 생겼어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
네가 더 나빠. 이 자식아. 나는 저게 위로인가 고도의 놀림인가 진심으로 의심이 됐지만 너무 진지한 다정한의 얼굴에 화도 낼 수가 없었다.
“…그래. 사람 같이 생겼다고 해 줘서, 고-오맙다.”
나는 이를 악물며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지금 상황에서 화를 내 봤자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았다.
“그럼 곧 종 칠 거 같으니깐 이만 가 볼게. 너희들도 들어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여기 있으면 스트레스만 더 쌓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시간을 핑계로 대며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 나 아직 할 말 더 있는데!”
아니, 그 입 다물어 주길 바란다. 나는 옆에 있던 안경희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쏜살같이 그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저들과 더 엮여 봤자 나만 더 피곤해질 것 같아 모두 무시했다.
***
“우읏-! 정한이 너 때문에 가 버렸잖아!”
“누가 봐도 너 때문 아닐까?”
이윤은 재빨리 사라진 서이나의 뒷모습을 보며 곁에 있던 다정한에게 투덜거렸다. 그러자 다정한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웃는 낯으로 응수했다.
“이게 뭐야아…. 외계인 씨가 말해 준 사람을 드디어 만났는데.”
이윤이 불만스레 뺨을 크게 부풀렸다. 다정한은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참으며 그에게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외계인이라면 그 꿈에 나왔다는, 그거 맞지? 윤아. 난 네가 너무 걱정돼. 차라리 강이처럼 대놓고 서서 조는 게 더 나을 거 같아.”
“꿈 아니라니깐! …됐어!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면서. 흥!”
다정한은 진지하게 이윤의 상태에 대해 염려했지만, 이윤은 오히려 화를 내 버리며 거친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다정한은 평소와 달리 더 외계인에 집착하고 있는 이윤의 모습이 의아했지만, 어차피 그의 말대로 자신은 그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도 맞아서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서강이를 흔들어 깨웠다.
“강이야. 곧 수업이야. 너희 반으로 가야지.”
“…아.”
소란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꿀과도 같은 잠을 자던 서강이는 눈을 끔뻑이며 일어났다.
“너도 참…. 걸어 다니면서 자면 위험하니깐 되도록 그러진 마.”
끄덕. 서강이는 다정한의 조언에 고개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정한은 그런 그의 대답에 만족스레 웃으며 그의 등을 밀며 각자의 반으로 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정한이는 바보야! 멍청이!”
그때, 이윤은 한참 툴툴거리며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평소라면 금방 기분이 풀려 웃고 다녔을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그러기가 쉽지가 않았다.
“꿈 아니야, 거짓말도 아니란 말이야!”
그도 그럴 게, 그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윤은 억울함에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가 눈가에 걸리는 자신의 분홍색 머리칼이 보였다. 그것을 매만지며 슬프게 눈을 내리깔았다.
“외계인 씨가 정말 그랬단 말이야….”
이윤은 몇 년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주기는 불명확하지만, 간혹 그에게 나타났던, 방금도 제게 속삭여 줬던 그 신비한 존재는, 무언가를 알리고 난 후 다시 사라졌다.
“자기랑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분명 그랬어.”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할 사실을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