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밝혀진 진실. (2)
“제가 궁금한 것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이 세계에 온 지 3년. 드디어 그 비밀이 밝혀질 때가 왔다.
“우선 이 이야기를 할까.”
그가 느긋한 어조로 서두를 꺼냈다. 곧이어 그가 이은 내용은 이것이었다.
세상엔 강한 운명과 인연을 타고난 이들이 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필연이며, 선택지 따윈 없는 하나의 길. 그리고 그 결과는 길과 흉이 정해진 갈래 길.
원치 않은 삶, 원치 않은 선택, 원치 않은 결말.
모든 게 자신의 의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짜여 놓은 각본과도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들.
“…그건, 휘혈이의 얘기인가요?”
이 얘기를 듣자 떠오르는 건 바로 반휘혈이었다. 나는 뭐라 말하기 힘든 심정에 차마 더는 말을 못 잇고 입을 다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저 웃음으로써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여기는 소설 속이 맞나요?”
“글쎄. 나로선 소설보단 평행 세계라고 부르고 싶군.”
평행 세계. 어쩐지 내게도 와닿는 말이었다. 이 세계는 다른 세계에서 온 내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가고 있다 보면 인위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곳은 정말 하나의 세계였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냐고 묻는다면… 내가 살았던 곳과 이곳은 세세한 디테일들이 달랐던 점이라고 할까. 예를 들어, 지명이나 역사는 같은 면을 보였지만, 내가 흔히 알던 명문대나 대기업의 이름이 달랐고, 유명한 연예인, 그리고 드라마나 소설 그 모든 게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그렇기에 난 이곳이 더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인소 요소만 추가된 똑같은 세상이라니. 오히려 이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 전 왜 이곳에 있는 거죠?”
하지만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한 건 수수께끼였다. 왜 그는 저런 이야기를 꺼낸 걸까? 나는 의아함에 미간을 살풋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결말 때문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강한 운명을 타고난 인연들은 서로를 만났고 그 결말을 맞이하였지. 그런데 그 결과에 대해 납득 못 하는 존재가 한 명 있었어.”
그리고 난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가 눈을 휘며 말을 맺었다.
“그게 누군데요?”
어쩐지 이야기를 하듯 나긋한 목소리에 저절로 집중이 되었다. 흥미로움을 참지 못하고 물으니, 그는 조용히 웃으며 툭, 하고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짚었다.
“…이윤?”
그가 가리킨 건 정확히 이윤의 몸이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눈을 홉뜨며 바라보자 정체불명의 이는 맞다는 것처럼 더 깊게 미소 지었다.
“왜…, 왜 이윤이, 아, 아니, 그보다 왜 당신은 걔 소원을? 대체 왜? 혹시 소원이 과거로 돌아가서 결말을 바꾼다든가, 뭐 그런 거예요? 시간을 되돌리는 건 대단한 일을 한 거잖아요. 그런 걸 마음대로 남용해도 되는 거예요?”
따지는 것 같은 뉘앙스가 되었지만 물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평등한 처사가 아닌가. 누구는 소원 들어주고, 누구는 안 들어주고. 변덕이라고 말하면 꽤나 열불 터질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를 보고 기억하며, 내 말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이 세계에선 기적이기 때문이다.”
“…예?”
기, 기적?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멍청하게 깜빡였다. 그는 그런 내 반응에도 괘념치 않는 모양인지 여상한 어조로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보통 이렇게 우리들 같은 존재는 연관이 없는 세계에선 우리를 우연으로 접해도 다 잊어버리거든. 그런데 이 아이는 달랐지. 일반적으로 이럴 땐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 그래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그 아이의 선택이 악하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때, 한 번의 기회를 다시 부여해 주는 거지.”
“기회….”
나는 그 단어를 입 안에서 다시 굴렸다. 기회. 그렇다면, 내가 이 삶을 받은 것도 그 기회와 연관이 있는 걸까?
“그렇다.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것. 그게 내가 이루어 준 소원이며, 그로 인해 그대가 이 세계에 온 것이기도 하다.”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곧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정해진 운명을 뒤집은 굳세고 강한 영혼은 찾기가 힘들어. 특히, 연관자로 만드는 건 더더욱 말이지. 그런데, 찾아보니 있더군. 그런 영혼이 말이야.”
끔뻑끔뻑, 그의 말에 두 눈을 깜빡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며 하는 말이 어쩐지, 그가 말하는 지칭이 나인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전 그냥 평범한데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특별히 엄선해서 골랐으니 장담하지.”
그의 말에 곧장 반박하니, 바로 단칼에 부정당했다. 아, 예…. 판타지에 나올 법한 이질적인 존재가 그렇게 말하니 그냥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나. 납득이 가진 않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제가 이곳에 온 건 뭐… 운명을 뒤집기 위함이다 뭐 이건가요?”
“본 목적은 그렇다.”
정말 앞날이 캄캄해지는 소리였다. 갑자기 어깨가 굉장히 무거워졌다. 그런 내 심리가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그는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뭐, 너무 부담 갖진 말도록. 그대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냥 앞으로도 그대 방식대로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예? 방금은 운명을 바꾸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미 흐름은 뒤집혔어. 다만, 큰 맥락은 바뀌질 않아 혼란이 좀 빚어질 수 있기야 하겠지만… 뭐, 괜찮을 거라 본다. 그냥 그대답게 살면 돼.”
…이건, 좋게 받아들이면 되는 부분인가? 그냥 나답게 살라는 건 대체 뭘까. 그냥 평소대로 굴면 된다는 건가? 이거 참,
“서두가 거창해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하하. 그것도 그렇군.”
솔직하게 말해 주자 그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으로 저 앳된 얼굴에 걸맞은 미소였다. 이제 와 새삼스럽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과연 누군가 궁금증이 들었다. 이중인격?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아는 게 많았다. 정말 내가 모르는 고차원의 어떤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이윤을 도와 이 세계의 과거로 다른 세계의 나를 빙의시켰다.
‘그렇다면…, 이곳의 서이나는?’
줄곧 궁금해 왔던 부분이었다. 이것을 묻기 전엔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다. 혹시 내가 옴으로써 그 자리를 잃은 게 아닐까,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닐까. 듣기 두려운 말이었지만 이 삶을 차지한 나로선 안고 갈 책임이 있기에 이에 대한 답을 들을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다짐과 달리 입은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긴장인지 초조일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모를 것으로 인해 손이 잘게 떨려 왔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못 물어보겠어.’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다. 아무리 각오를 다져도 한 사람의 자리를, 그 존재 자체를 지워 버렸다는 그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나약함에 환멸이 일었다. 이곳의 서이나에 대한 죄악감에 당장이라도 무릎이 꿇어질 것 같았다.
“…그대가 물었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그럴 때,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드니 그는 어느새 내 발치에 다가와 그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눈이….”
그런데 가까이서 본 그의 눈은 뭔가가 달랐다. 이윤의 눈은 갈색이라 눈치를 못 챘으나, 이리도 지척에서 보니 이윤의 갈색 눈동자 속에선 금빛이 작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가 그대와 대화하고 있다는 게.”
“…네?”
“아까 말하지 않았나. 보통 사람이라면 우연이라도 다 잊는다고. 그럼 이 시간이 꽤나 무의미하지 않겠나.”
“그건….”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뜻? 확실히 난 빙의자니깐 평범이랑 거리가 멀긴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가 말하고 있는 비범은 이러한 뜻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기억하는 이 아이도 나와 함께했던 시간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대는 이 대화를 기억할 거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그가 말을 이을수록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그의 확신이 어쩐지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의 서이나는, 어떻게 되었죠?”
그가 깊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마치, 칭찬을 하는 것처럼. 그러면서 정체 모를 존재는 내 볼을 가벼이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며 나긋하게 말했다.
“이 안엔 강인한 성품을 지닌 영혼과 상냥한 성품을 지닌 영혼이 있지.”
두근, 하고 심장이 거세게 널뛰었다. 눈이 크게 벌어지고 입 또한 자연히 벌어졌다.
“같지만 다른 영혼. 다르지만 같은 영혼. 두 개의 강한 영혼은 정해진 운명을 뒤흔들고도 남는다.”
“그렇, 그렇다면…! 왜, 왜, 저는 서른 살의 저로 생각하는 거죠?!”
나는 그의 팔을 반사적으로 붙들며 절박하게 외쳤다. 그의 말이 맞다면 내 의식은 자연스레 열다섯 살의 나로도 인식해야…
“어?”
잠깐. 나는, 그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래. 그렇다. 나는, 분명 열다섯 살의 서이나가 가지고 있던 기억을 나로서 대입하며 받아들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정말로 나는…?
“혼란스럽겠지.”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덮쳐 오는 이질감에 내 시야가 어그러지며 내 몸이 휘청였다. 그는 그런 내 몸을 재빨리 받아 들며 차분하게 내 상황을 설명했다.
“영혼의 존재가 부정당하고 좀체 자신을 인정하질 못해 이 세계에서 제대로 정착하질 못해서 생긴 일이다. 어렵겠지만 이건 그대가 감당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도록 많이 노력해야 할 거야. 어찌 됐든, 이 모든 건 그대의 선택이기도 하니.”
“내… 선택?”
그래. 이윤의 얼굴을 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생각도 못 했던 대답을 내놓았다.
“이 모든 상황은 그대, 즉,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온 그대 모두의 합의하에 진행된 일이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