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80화 (80/306)

80. 밝혀진 진실. (3)

내가 선택했다고? 열다섯 살의 나와 원래의…, 아니, 서른 살의 내가?

“그게 무슨…. 전 아무것도 기억이….”

“그때 당시엔 당연히 기억이 안 나겠지. 말했잖나. 일반적인 경우는 날 기억하지 못한다고.”

아. 그렇다는 건 즉, 이 몸에 두 영혼이 하나가 되기 전의 일은 기억을 못 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갑자기 그때의 목소리… 이윤의 목소리가 떠오른 거죠?”

제 친구들을 구해 주세요.

분명 그렇게 말한 존재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분명 물을 먹은 것처럼 먹먹한 소리였으나, 그 의미만은 확실하게 전달됐다. 그리고 이자의 말로 유추해 보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윤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존재는 이윤을 지칭한 내 질문에 부정치 않고 차분히 대답을 해 줌으로써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대, 아침에 사고가 일어날 뻔했지? 그것도 사고 요인인 트럭으로.”

“어, 맞아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역시 이 양반, 능력이 굉장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턱턱 내가 있었던 일을 맞추다니. 이윤이 박수였으면 그냥 맹신하고 따랐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어떤 이유 때문일까, 나름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리자,

“충격 요법이다.”

그는 간단한 해답을 내놓았다.

“충격, 충격 요법…이구나.”

왠지 더 거창한 게 나올까 싶어 몰래 기대했던 게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던 모든 의문이 해소됐다. 나는 그 사실에 맥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 뭔가, 힘 빠져요.”

“충격 요법이?”

“아뇨. 그것도 그런데, 그냥 모든 게요.”

하하, 하고 힘없이 웃어 보이자 그가 내 앞에 쭈그려 앉으며 시선을 맞췄다.

“생각보다 의연한걸. 감당하기 힘들진 않나?”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이렇게 된걸요. 그냥 답을 찾은 것만으로 만족할래요.”

비록 내 예상보다 스케일이 더 큰 기분도 들었지만, 어쩌겠나. 이미 시합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사람… 사람 맞나? 아무튼 이 사람도 내 방식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를 살아가면 된다고 하질 않았던가.

“전 복잡한 건 싫어요. 머리도 별로 안 좋고요. 그럼 그냥 되는 대로 살래요. 오히려 예전보단 훨씬 낫네요. 이전엔 아무것도 모르고 맨땅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방법을 찾은 기분도 들어요. 그거면 된 거죠.”

열다섯 살의 나와 서른 살의 내가 하나가 됐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여전히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납득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서른 살의 나답지 않게 너무 감정적인 구석이 있더라니. 게다가 이 세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열다섯 살 서이나의 잔재된 기억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하-. 새삼스럽지만 정말 판타지 같네요. 이 모든 현실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숨을 크게 내쉬었다. 피로감이 몰려오는 기분이었지만 이 와닿지 않은 현실을 수긍하는 게 먼저였다.

“그중에서 당신이 가장 판타지 같지만 말이죠.”

“그대에게 있어선 틀린 말은 아니군.”

“서이나예요.”

“응?”

“제 이름이요. 이 세계에서도 다른 세계에서도 제 이름은 서이나예요. 그대가 아니에요.”

나는 세워 둔 무릎에 두 팔을 대충 걸친 채 맥없이 웃으며 내 이름을 소개했다. 눈앞에 있는 이는 내 소개에 잠시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웃음을 크게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 서이나. 좋은 이름이야.”

그러곤 그는 내 귓가로 다가왔다. 갑자기 다가온 그의 얼굴에 잠깐 흠칫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내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의 이름은 시프. 내 이름을 걸고 그대의 앞날을 축복하지. ‘기회’을 붙잡는 자여.”

털썩, 그의 몸이 무너졌다. 멍하니 눈이 깜빡여졌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저, 저기요?”

갑자기 내 품 안으로 쓰러진 몸뚱어리에 당황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작게 흔들자 그가 작게 신음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으- 무슨 일…, 응?”

그런데 움찔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양새가 이상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난 그는 지척에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엥??”

“어, 눈이…,”

다시 갈색이네. 나는 뒷말을 조용히 삼키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그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이로써 나는 눈앞에 있는 이가 방금까지 있었던 그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진짜 이윤임을 알 수 있었다.

“누나? 어? 제가 왜 기절했죠? 방금 무슨 일 있었어요?”

이윤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나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일 없었어. 나도 네가 갑자기 쓰러지길래 놀랐다.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구급차 불렀을 거야.”

“우-. 이런 적 없었는데. 이상하네….”

“혹시 모르니깐 병원 가 봐. 일어날 순 있겠어?”

어차피 가 봤자 원인 불명일 게 뻔했지만, 나는 철판을 깔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 그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어 주자 이윤은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어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가 뻗은 내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나는 씨익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젠 수업 들어가자. 곧 종 치겠어.”

댕대래 댕댕 댕댕~.

아. 말 끝나기 무섭게 치네. 나는 스피커에서 들려온 수업 종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새삼 방금까지 있었던 그와의 만남이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시프…, 라고 했던가.’

왠지 또 만났으면 좋겠다. 그때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과연 그럴 날이 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음-. 근데 저 쓰러지기 전에 뭔가를 본 것 같았는데.”

“…글쎄다.”

사실을 알려 줘도 좋을 법했지만, 어차피 내가 얘기해도 많은 걸 기억하지 못할 거다.

“그냥 네가 픽, 하고 쓰러지던데. 진짜 깜짝 놀랐다.”

그래서 난 진실을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나는 문을 열려고 뻗었던 손을 잠시 멈추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넌 왜 그렇게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해?”

“음?”

문득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왜 아는 꿈으로, 헛것으로 치부해도 될 만한 그 존재를 확실히 믿고 있는지. 그런 의문이 말이다.

“그야 있으니까요?”

그런데 조심스러웠던 나완 달리 이윤은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 당돌한 대답에 나는 문을 보던 시야를 돌려 이윤을 마주 보았다. 이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는 제가 본 걸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깐 전 외계인이 있다고 굳게 믿어요. 물론 증거는 없지만요! 아, 혹시 누나 외계인 맞는데 제가 믿음직 못해서 그런 거였다면…!”

“아니야.”

“우잉….”

쓸데없는 추측을 단칼에 부인하자 이윤이 풀이 팍 죽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았다. 이윤은 곧 어깨를 펴며 당돌하게 외쳤다.

“외계인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전 누나가 마음에 들었는걸요! 저 누나 반에 자주 놀러 가도 돼요? 아! 저랑 번호 교환해요! 연락처 알려 주세요!”

“싫….”

멈칫, 나는 그의 맑은 웃음을 마주하곤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그의 티 없이 맑은 얼굴이 어쩐지 방금까지 마주했던, 마지막에 그 정체 모를 이가 보여 줬던 웃음과 겹쳐 보였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품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자.”

“어? 어어??”

“안 찍고 뭐 해?”

들고 있는 핸드폰을 흔들며 재촉하자 이윤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나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다가 곧 크게 웃음 지으며 받아 갔다.

“저장했어요!”

“어어. 아, 근데 반에는 필요한 일 아니면 찾아오지 마.”

나는 그것을 시큰둥히 받아 들며 추가 사항을 던졌다.

“네에~?”

그러자 이윤이 못마땅하게 소리 지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놀러 갈래요!”

“안 돼.”

“왜요!”

“시끄러우니까. 나 공부해야 돼.”

쓸데없는 설전을 하다가 불현듯 자신의 상황이 떠올랐다. …나, 그러고 보니 3주 동안 문제집을 한 번도 못 봤네? 젠장. 강원도에 문제집 한 권이라도 들고 갈걸! 강원도는 말 그대로 일주일 정도 쉬기 위해 갔었으나, 설마 3주 동안 일만 주구장창 하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음부턴 가게 되면 문제집 몇 권을 가져가겠다고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래도 3월에 있을 모의고사는 죽 쑬 예정이 틀림없었다. 3주 동안 표백이 완료된 머리에 다시 이론을 새기려면 또 얼마나 걸릴까? 하하. 진짜 싫다. 정말. 나는 공허해지는 눈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누나, 공부 잘해요?”

그런 와중에 이윤은 옆에서 쫑알쫑알 계속 쓸데없는 말을 걸어 왔다.

“아니…, 내가 왜 이걸 너한테 설명해야 되는 건데.”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 곧 정신을 차리고 언짢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윤은 아주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제가 누나랑 친해질 거라서?”

“…너 되게 뻔뻔하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특히, 혁이한테!”

자랑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연락할게요, 누나!”

곧 계단이 나타나 헤어질 타이밍이 되자 이윤은 그 순간에도 상큼발랄함을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네 왔다.

“지금 수업 시간이다. 조용히 해.”

“합.”

그래서 친히 정숙을 요구하자 이윤이 두 손으로 입을 텁, 가렸다.

‘…진짜 고등학생 맞나?’

방금 좀 귀엽다고 생각이 든 게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저게 진짜 고등학생, 특히, 내가 아는 놈들이랑 같은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이젠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소리 없이 인사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2학년 교실이 있는 3층을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그가 안 보일 즈음, 나는 고개를 돌려 그가 있을 법한 위치를 바라보았다.

“저런 애가 납득이 가질 않을 상황이라….”

모든 면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 같은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현실을 부정하며 바꾸려 들었을까. …그리고 반휘혈은 어떤 일을 겪었던 걸까. 그 정체 모를 이, 시프라고 밝힌 이는 그에 대한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아마 말해 줘선 안 될 문제였겠지.

‘뭐,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모르면 모른 대로 좋고.’

그게 만약 최악의 결과라면, 차라리 알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좋았다. 이미 흐름은 바뀌었다고 했다. 난 있는 그대로 평소처럼 살면 된다. 그게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고, 앞으로 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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