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생각지도 못한 만남. (1)
***
‘어, 잠깐. 그래서 왜 서른 살의 나라고 생각한 거지?’
우뚝, 필기하던 손이 멈췄다. 지금은 자습 시간이었다. 한 학기 내신 성적 기준을 설명을 마친 선생님은 자습을 명하며 단상에서 졸고 계셨다. 그래서 난 열어 놨던 문제집 위에 침착하게 메모장을 꺼냈다. 메모장 위엔 15, 30이라는 숫자가 슥슥 적혀졌다. 나는 그것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당장 중요한 건 다 해결돼서 괜찮긴 하지만, 묘하게 신경 쓰였다. 왜 나는 내가 서른 살의 서이나라고 생각했던 걸까?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며 들고 있던 펜은 30이란 숫자가 적힌 곳을 규칙적으로 두드려졌다.
‘그러고 보니… 나보고 강인하고 상냥한…, 어우, 아무튼 그런 영혼이 있다고 했지?’
낯간지러운 표현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생각을 그만둘 순 없었기에 나는 재차 마음을 다잡고 상황을 다시 메모를 시작했다.
[30 → 강인]
[15 → 상냥...??]
“흐음.”
대충 이렇게 되는 건가? 톡톡, 펜촉이 적힌 글씨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다가 나는 30이란 숫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 옆에 물음표를 그리며 생각했다.
‘서른 살의 내가 더 세서 자아도 더 강하단 뜻이 되나?’
허. 자연스레 실소가 흘러나왔다. 물론 이 세계의 서이나가 다른 세계에서 온 나보다 상냥하단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른 살의 자아를 더 존중해 준 걸 수도 있지만, 파릇파릇하고 자아가 가장 강할 시기인 10대 청소년을 이긴 어른이라…. 정말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열다섯 살도 그렇고, 서른 살도 그렇고 나도 참 나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메모장을 다시 보니 깨끗했던 페이지는 생각의 흔적으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덩그러니 적혀진 숫자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두 명이 하나라.’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아니, 몸의 감각은 알고 있는데 머리가 극도로 거부하는 기분이었다. 빙의 자체가 판타지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으나, 설마 이런 큰일이 일어났을 줄이야. 게다가 정해진 운명을 흔들어 놓는 역할을 맡고 있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 숫자로 분리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평생 이해 못 할지도.’
심란해진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뚫어져라 그 숫자들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몰라, 몰라. 될 대로 되라지. 그 양반도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된다고 했잖아. 그 뭐냐, 열다섯 살의 기억이 내 경험처럼 느껴져도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면 되는 거지?’
음…! 시간이 걸릴 것 같긴 했지만 못할 것도 없을 터였다. 빙의도 모자라 살던 세계도 달라지고, 난생처음 정체가 판별되지 않는 존재를 만나고도 나름 의연했다. 그러니 자아 성찰 개념으로 받아들여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그만 아닌가. 무엇보다 앞으론 정체성이 혼란이 올 때마다 이전처럼 고통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이걸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수 얼굴도 당당히 볼 수 있게 됐고.’
서이수의 진짜 누나인 열다섯 살의 서이나가 어디 안 사라지고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니 그걸로 그만 아니겠는가. 사실 이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나는 가벼워진 마음을 느끼며 뿌듯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요란스럽다 했더니, 역시 뭔가 있으려고 경고를 준 게 분명했던 것 같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들을 알았으니 이걸로 충분했다.
‘이젠 남은 하루는 좀 조용하게 지내면 좋겠다.’
그렇게 작은 소망을 품으며 난 다시 문제집을 열어 내용을 훑었다.
***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람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나는 더 그렇다.
“누나-!!!”
쾅! 하고 교실의 뒤쪽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그에 깜짝 놀라 정리하던 책을 도로 책상 위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뒷문을 보자 그곳엔 씩씩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한도훈이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지금의 사태가 좀체 이해가 가질 않아 어리벙벙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한도훈은 그런 내게 부쩍 다가오더니 덥석 내 어깨를 붙잡았다.
“누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니, 뭐가….”
“뭐긴 뭐예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난데없이 무슨 개소린가 싶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얘한테 뭐 잘못했나?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오히려 잘못은 이 녀석이 나한테 한 것밖엔…,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나한테 거짓말 쳤었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시선이 너무 많이 몰려 있어서 나중을 기약하였다.
‘두고 보자. 한도훈. 그리고 다른 세 놈도.’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우선은 꽤 흥분해 있는 한도훈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하고…,”
“누나 번호를 왜 이윤이 알고 있냐고요!”
“…….”
씁. 한발 늦었다. 한도훈이 잔뜩 성질이 나 외치는 그 한마디의 파급력은 남달랐다. 한도훈에게 일방적으로 몰렸던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이번엔 내게도 모여든 게 피부로 확 느껴졌다.
‘뭔 얘긴가 했는데, 설마 그 얘기였냐!’
하필 꺼내도 그런 내용이라니. 안 그래도 이전 쉬는 시간에 이윤이 놀러 와 잔뜩 주목받은 기분이었는데, 이번엔 한도훈마저 찾아와 난리를 치니, 이젠 조용한 학교생활은 없다는 것처럼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
간간이 찾아왔던 녀석들의 팬들이 나날이 들이닥칠 건 기본이었고, 이젠 이윤의 팬마저 몰려들게 생겼다. …어쩌면 가장 최악으론 강해중 녀석들의 팬들이 다 내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도훈아, 우선 진정하고…,”
그렇다고 계속 여기서 얘기할 순 없었다. 잘못하면 개학 첫날부터 어마어마한 소문이 따라붙게 생겼다. 그래서 조용한 곳에서 얘기 좀 하자고 하려는데 한도훈이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누나가 어떻게 저한테 그래요! 누나한텐 제가 있으면서!”
아니, 이 새끼가?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버럭 소리쳤다. 아니, 이 자식이 누가 들으면 백 퍼 오해할 말을 하고 있네?! 당황인지 흥분인지 모르겠지만 내 얼굴이 새빨개진 게 느껴졌다. 하지만, 식힐 시간도 없이 한도훈은 내게 지지 않고 반박했다.
“누나는, 누나는…! 안 넘어갈 거라고 믿었는데! 실망이에요!”
“아니, 진짜 얘가 뭔 소릴 하는 거야! 뭘 넘어가!! 누가 보면 내가 바람피운 줄 알겠다!!!”
“바람이잖아요!”
이 새끼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그의 단어 선택에 열이 올랐다.
“아니라고!!! 아니, 그보단 내가 언제부터 너랑 사귀었는데?!”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화병만 더 도지게 생겼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혹시 나도 모르게 얘랑 사귀었나? 한 번 의심해 봤지만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 얘가 날 좋아하고 멋대로 착각을…?
“제가 누나랑 왜 사귀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
아니, 이 새끼가? 나는 곧장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꾹 참으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으름, 왜 그뜬 스그르 믈흐스 스름 측극흐그 믄드르.”
조금이라도 이성을 놓으면 한 대 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그러자 한도훈은 그제야 분노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내 상태를 눈치챈 모양이다. 그는 차츰 진정되었지만, 그래도 불만을 없애진 못한 기색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누나가 이윤한테 번호 줬잖아요.”
“아니, 그니깐 그게 왜. 내 번호를 내 맘대로도 못 해?”
“저한텐 그렇게 야박했으면서!”
“내가 언제!”
“작년이요! 정확히 날짜랑 시각까지 읊어 줘요?!”
“됐어! 네 말이 맞겠지!”
가끔 무서울 정도로 이상한 구석에 기억력이 좋은 그였기에 나는 바로 항복을 외쳤다. 젠장, 이 녀석은 말로 이기기 더럽게 어려웠다. 도대체 이게 뭐길래 이리도 유난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이윤의 한도훈에 대한 평가도 그렇고, 지금 한도훈 모습도 그렇고, 두 사람 사이가 꽤나 안 좋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고, 두야.’
갑자기 또 피곤해졌다. 좀 편안해지려던 기분이 다 날아갔다. 그래, 내가 그렇지, 뭐. 대충 이 세계에 대해서나 내 정체성에 대해 해결 좀 봤다고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일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 일이 생겼다. 그것도 대형 사고가 말이다. 앞으로 대체 무슨 흉흉한 소문이 날지 가히 짐작이 가질 않았다.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집에 가고 싶어….’
정말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집이 그리웠다. 운명을 흔들기 위해 나를 불렀다고 했나? 설마 이것도? 그렇다면 아주 뽕을 뽑으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하아…. 도훈아, 우리 자리 좀 옮기자, 제발.”
이러고 있어 봤자 이목만 더 끌 뿐이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지 벌써부터 복도 쪽에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질린 얼굴로 보고 있자, 한도훈도 주위 상황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달려와 흥분하는 건 정말 의외의 모습이긴 했지만, 이럴 때 보면 친구는 닮는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방금 그 오해하기 좋은 말들이 아주 반휘혈과 판박이었다. 물론 금방 풀리긴 했지만 순간 답답함에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런 감각을 얼마 만에 느꼈는지 모르겠다.
‘휘혈이는 잘 살고 있으려나.’
반휘혈을 생각하니 저절로 근황이 궁금해졌다. 이번 쉬는 시간에야말로 메일을 확인해 보려고 했으나, 또 물 건너갔다. 이렇게 가다간 집에 가서야 겨우 확인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정말 까먹고 답장을 못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든가….
“으.”
벌써부터 그 녀석이 말없이 노려보고 있던 게 연상됐다. 혹여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 미국에 계속 살더라도 한 번쯤은 한국에 올 텐데 만나자마자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게 며칠간 이어질 걸 떠올리니 팔에 소름이 돋았다. 원래 말이 없기야 했지만, 침묵으로 계속 화를 내고 있는 당사자를 마주하는 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기에 정말 그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