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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소에 갇혀버렸다 !-82화 (82/306)

82. 생각지도 못한 만남. (2)

그런 생각을 하며 이동하니 어느새 한적한 곳에 도착했다. 오늘만 해서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 창고로 쓰이는 교실을 찾아오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변을 대충 훑어보니 어수선한 게 우리를 따라온 것 같은 애들이 있단 걸 눈치챘지만, 무시하고 문을 꼭꼭 닫았다.

“그래서, 우리 한도훈 씨는 왜 그리 답지 않게 구실까?”

나는 언짢은 기색을 가감 없이 뿜어내며 녀석을 노려봤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식으로 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정말 이 녀석답지 않게 흥분해 있었다.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긴 했지만, 그건 다 자신의 잘남을 드러낼 때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감정 조절을 못하는 건 처음 봤다.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화가 풀리고 진심으로 의아함이 찾아왔다. 그러나 한도훈은 그런 날 뚱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휙, 하고 돌려 버렸다.

“흥.”

“…….”

얘가 진짜 오늘따라 왜 이래? 평소의 그였다면 벌써부터 조잘조잘 털어놨을 텐데, 그러질 않고 있었다. 정말 내가 번호 하나 줬다고 이렇게 감정이 상한다고? 그게 그렇게 큰일이었어?

“너 이윤이 그렇게 싫어?”

당장 떠오르는 건 이거였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틀린 말도 아닐 것 같았다. 설마 번호 하나 가지고 이렇게 유난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번호 달라고 해도 거절할걸.

“완전 싫어요.”

아니나 다를까, 한도훈이 바로 정색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뭐, 아무튼 난 일이 귀찮게 꼬여 가는 게 느껴지자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도훈아. 이미 번호는 줘 버렸으니깐…, 그만 기분 풀어라.”

“…번호가,”

응? 난처하게 그를 보던 중 한도훈이 입을 꾹 다물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제대로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자 한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곤 아랫입술을 툭 내밀더니, 불쑥 소리쳤다.

“번호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누나는 바보야!”

“억. 야, 도훈아?!”

쾅-! 문이 세차게 열리는 것과 동시에 한도훈은 사라졌다. 나는 어리벙벙해진 얼굴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쟤 왜 저래?”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자 그가 떠난 여파로 남은 잔재 속에서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다고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난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피곤해. 미치도록 피곤하다. 그냥 자고 싶다. 빨리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

뇌가 정지된 것만 같았다. 혼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자꾸만 정신이 멍해졌다. 드디어 길고 긴 학교 일정이 끝났다.

아침 댓바람부터 쓰러질 뻔하질 않나, 트럭에 치일 뻔하질 않나, 사대천왕이 등장하고 도방중 애들과 강해중 애들이 동시에 입학하질 않나,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이상한 존재도 만나 보고. 이렇게까지 화려한 일상을 지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 좀 조용해졌나 싶었더니 한도훈이 한바탕 난리를 쳐서 그 잠깐 사이에 괴상한 소문이 퍼졌다.

바로 이윤과 한도훈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미친 소리였다.

물론 반 아이들은 안 믿는 눈치였지만, 복도에서 슬쩍 본 학생들이 가장 문제였다. 그들은 한도훈이 소리치는 것만 대충 듣고 반으로 돌아가 온갖 이상한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이윤이 서이나한테 고백했대!

한도훈은 어떻게 바람피울 수 있냐고 소리쳤어!

헐, 그럼 삼각관계?

아니, 한도훈 여자 친구가 서이나야?

둘이 사귄다고???

진상은 뒤로한 채 그들끼리 수군댄 결과 불과 1시간 만에 그 괴상한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 갔다. 그 이후로 나는 모든 쉬는 시간을 그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을 잠재우는데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었다. 소문 따위 시간이 지나면 잠재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한도훈과 이윤의 팬을 너무 만만히 보았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이고 쉴 새 없이 질문 세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거 다 개소문이라고!! 나한테 말고 한도훈한테 가서 따져!!’

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이것도 한두 번 물어야 친절하게 대답해 주든 말든 하지, 뭘 하려고 하면 들이닥쳐서 내 할 일 방해하는데 어쩌겠나. 결국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맞이하자 난 인상을 험악하게 구겨 버렸다. 그러자 점점 오는 사람 빈도수가 줄더니, 하교 시점이 되어서야 겨우 난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결국 메일 못 봤어….”

기회가 찾아왔지만 자유 시간이 하나도 없어서 음악실 근처도 가 보질 못했다. 속상함에 저절로 기분이 우울해졌다.

“어, 아, 어, 미, 미안.”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 봐. 이젠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이나 자야지…. 하며 넋을 빼놓고 속으로 다짐하는데, 옆에 있던 안경희가 내 말을 듣고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난 뜬금없는 안경희의 사과에 천장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내려 그녀를 보았다.

“갑자기 웬 사과야?”

“어, 어, 그,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미, 미안.”

“아니, 사과 안 해도 되는데. 너 잘못도 없잖아.”

“아, 응, 미안, 아, 아니, 이게 아니라…!”

결국 그녀는 사과를 끊지 못하고 볼을 붉히며 얼굴을 감쌌다. 정말 수줍음이 많은 친구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내 곁에선 보기 힘든 유형의 친구였다.

“괜찮아, 괜찮아. 차차 고치면 되지. 뭐.”

어쩌면 사과를 입에 달고 사는 게 버릇일지도 모른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고칠 일은 아니니 시간을 들여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다. 내가 웃으며 그녀를 위로하니 안경희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곧 감동한 눈으로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응!”

와, 눈이 반짝거리는걸? 아침에 본 이윤만큼은 아니었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참으로 순진하게 다가왔다. 왠지 얘랑 얘기하고 있으면 괜히 쑥스러워지는 것만 같아서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오, 오늘 야자 안 하게?”

“응. 어차피 머리도 안 돌아가.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거든….”

난 창밖 너머의 하늘을 흐린 눈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안경희는 그런 내게 말없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만 답했다.

“이나야, 오늘 야자 안 해?”

그때, 나와 먼 자리에 배치된 이혜인이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곧 그녀는 내 초췌한 안색을 보더니 납득하곤 내 어깨를 두드렸다.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래….”

우리는 더 말하지 않고 그렇게 헤어졌다. 선생님에게도 미리 하교한다고 얘기해 뒀다. 다행히 빡빡한 스타일은 아니셨는지, 아니면 소문을 들어서 내 사정을 파악하셨는지 몰라도 하교 신청을 허락해 주셨다.

“인생아….”

오늘따라 내 인생이 구슬퍼진다. 기분이 나빴다가 좋아졌다가, 좋은 일이 생겼다가 아니었다가, 아주 바쁜 날이었다. 개학 첫날이 이 수준인데 앞으로의 학교생활은 얼마나 난리일까? 벌써부터 앞날이 캄캄해졌다. 게다가 하늘도 그런 내 우울한 기분에 공감해 주는지 흐릿하기 그지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완전히 발을 빼?’

그냥 방관자로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운명이 바뀌었다며. 그럼 난 소설에 나오지도 않을 엑스트라처럼 조용히 있어도 되지 않나?

“어, 진짜 좋은 생각인데?”

너무 피곤해서 아무거나 막 생각했던 것이 마음을 확 끌었다. 내가 생각했지만 굉장히 강한 유혹이었다. 그리고 그 구상은 점점 구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가장 좋은 방법은 애들이랑 잠시 거리를 벌리는 건데…. 우리 주말 체육관에서만 만나는 사이가 되자. 근데 늘 이렇잖아. 그렇다면, 대화를 줄여 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으음…!’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적당한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을 번뜩 떴다.

“그냥 싸움판에 관여를 안 하면 되는 거잖아!”

내 세간의 이미지는 도방중의 히든카드로 굳혀 있었다. 다행히 아직 정체를 들키진 않았으니 앞으로 몸만 잘 사리면 된다. 그 뭐냐, 최강혁인가 하는 애도 조커 때문에 이 학교에 온 것 같았기에 내 정체만 안 들키면 남은 학교생활은 조용히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 잠깐만. 그럼 한도훈이랑 애들이 내가 조커란 걸 알고 있던 거 아냐?”

생각해 보니 소문의 중심인 애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따로 물어봐야 할 항목 중엔 이것도 물어봐야겠다.

“하여간 도훈이 그 녀석은 뭘 그리 감추는지 몰라.”

투덜거리며 길을 가는데, 눈앞에 신호등이 나타났다. 신호는 빨간색이었다. 그래서 초록불이 될 동안 멍하니 기다리고 있던 중, 내 앞으로 트럭이 한 대 지나갔다.

“…….”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눈을 몇 번 껌뻑이니 뒤늦게 몸이 굳어졌음을 눈치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엔 꽉 쥐어진 주먹이 눈에 띄었다.

“하아….”

보이는 내 모습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작년부터는 좀 괜찮다 싶더니, 아침의 그 플래시백으로 인해 좀 나아졌던 상처가 들추어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그런 스스로를 작게 위로했다. 살짝 떨려 오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어느새 신호는 초록불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뇌며 신중하게 주위를 살핀 후 횡단보도를 건넜다. 다행히 건너편으로 이동하기까지 어떤 사고도 일어나질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빨리, 빨리 가야지.

더 이상 밖에 있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오늘은 이 이상 다른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지 내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빨랐고, 어느새 나는 뛰고 있었다.

“…악!”

그런데 평소와 달리 꽤나 조급했기 때문일까, 골목을 돌 때 누군가가 있다는 걸 확인하질 못했다. 그러니 나는 당연히 그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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