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생각지도 못한 만남. (4)
***
“와, 진짜 피곤해.”
이대로 침대에 누우면 백 퍼 잠들 게 뻔했다. 그만큼 내 정신적 피로도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무사히 고찬영을 응급실에 데려다 놓고 난 후, 난 터덜터덜한 발걸음으로 드디어 집에 향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한눈 팔지 말고 가야지, 하고 다짐까지 하며 피로한 눈가를 벅벅 두 손으로 쓸어 냈다.
“힘들어, 힘들어어….”
정말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 하루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루 종일 다사다난할 수가 있을까? 이젠 집까지 가는 이 길조차 두렵다. 또 무슨 일이 터지면 어쩌지 싶어 긴장하기 싫어도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젠 진짜 무리야. 너무 쉬고 싶어. 하지만 아직 집까진 거리가 조금 있었다. 가는 길 내내 칼날 같은 바람마저 불어 대니 피로가 더 쌓이는 기분이었다. 아, 춥다. 추워. 춥고 힘들고 잠 와. 그리고 배고프기까지. 아주 상거지 꼴이 따로 없었다.
“하하, 이대로 눈까지 오면 진짜 대박이겠….”
아.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춰 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무언가가 내 볼에 살포시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게도 하늘에선 천천히 하나둘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 지금 놀리고 있는 거야?”
어쩐지 이 세계에 농락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말 끝나기 무섭게 눈이 내리는 건데?!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을 힘겹게 참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꾹꾹 내리눌렀다.
“으으…!!”
지겨운 눈! 지겨운 세상! 제발 나 좀 쉬게 내버려 둬! 강원도에서 뼈 빠지게 눈 치우느라 고생하고 와서 안 그래도 지쳐 있던 몸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내 계속 신경 쓰이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내 머리는 과부하가 찾아왔다. 어쩐지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됐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최근 서이수가 너무 착해져서 잊고 살았다. 나는 원래부터 일진이 굉장히 사나운 편이었다. 특히, 동생 놈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도 있었다. 근데 요 1년간 서이수가 얌전해져서일까, 내 일상이 굉장히 평온해졌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받을 날은 그리 없었기에 그동안 이 감각을 잊고 지냈었다.
“힐링, 힐링하고 싶어.”
힐링하면 한도훈네 스파인데. 아, 저번 여름에 별장에 있던 스파 정말 좋았지. 그거 다시 해 보고 싶다. 마사지사분도 되게 시원하게 잘해 주셨는데. 아, 안마 의자도 좋았어. 이번 여름에도 부탁해 볼까. 허허. 나는 넋을 빼놓고 생각하다가 문득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전에 걔 삐진 거부터 풀어야 될 텐데.”
에휴,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반휘혈이 있었으면 더 쉽게 해결됐을까? 아니, 그보다 걔가 왜 그리 이윤을 싫어하는지 알려나? 잘 모르겠다.
“아, 맞아. 메일도 봐야지.”
그를 생각하니 저절로 잊고 있던 메일도 생각났다. 몸이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잽싸게 보고 자야지. 하고 결심하며 집 안에 들어섰다.
설렁설렁 발로 PC를 켜고 외투를 벗었다. 대충 의자에 걸터앉은 후 난 푹 하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고오…. 삭신아아….”
아침부터 고생이 많았다. 나야. 정말 집까지 오고 나서야 드디어 굳어 있던 몸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찔끔 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켜진 모니터를 확인하곤 마우스를 집었다.
“보자…. 휘혈이, 메일이…, 응?”
빠르게 아이디를 쳐 메일에 들어갔다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어…? 생각보다, 많은데?”
하나, 둘, 셋… 다섯. 평소 메일을 간단하게 보내는 그의 성정을 고려하면 꽤나 많은 숫자였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약 2주 전부터 듬성듬성 보내져 있었다.
“게다가, 오늘도 보냈네?”
전부 다 제목이 적혀 있질 않아 무슨 내용인진 가히 짐작이 가질 않았다. 설마 진짜로 집에 오자마자 연락 안 줬다고 화났나? 왠지 긴장이 돼 쉽사리 메일을 열람할 수가 없었다. 잠시 마우스 커서를 방황시키며 망설이길 수차례, 곧 난 각오를 다지며 가장 오래된 메일을 열람했다.
[곧 한국에 가.]
정말 간단한 내용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휘혈답게 딱 이것뿐이었다. 앞뒤 맥락 다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날짜를 확인해 보니 2월 중순이었다. 아마 졸업식을 위해 온다는 말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가기 전에 내게 미리 연락을 넣어 둔 거겠지.
생각보다 별거 없는 첫 메일에 안도하며 난 자연스럽게 다음 메일을 눌렀다.
[안 가.]
이번엔 아까보다 더 짧았다. 하지만, 이번엔 난 삐질거리는 웃음을 입에 달 수밖에 없었다. 날짜는 졸업식 당일. 반휘혈은 내가 보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당일에 연락을 준 게 분명했다.
“화…났었나?”
왠지 그의 짜증이 함축된 내용처럼 느껴졌다. 나랑 못 만난다는 사실에 실망이라도 했던 걸까?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전화를 걸고 이거 무슨 심정으로 보냈던 거냐고 묻고 싶어졌다. 어느새 내 입가엔 비식비식 이유 모를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얘를 어쩌면 좋냐.”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메일을 눌렀다. 이건 꽤 최근 메일이었다. 바로 어제였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내용을 보냈나 궁금해서 스크롤을 내리는데,
[사진]
그 정체를 보고 순간적으로 손길이 멈췄다.
“…공항?”
그것도 빽빽한 영어 글씨가 많고 주위에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누가 봐도 반휘혈이 있는 곳은 미국에 있는 공항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다 홀린 듯 다음 사진을 눌렀다. 이번엔 오늘 날짜인 메일이었다.
[사진]
이번 메일도 공항 사진이었다. 하지만,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전의 공항과의 배경과 조금 달라지고, 간판엔 한국어와 검은 머리의 사람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메일을 보낸 시각은 13:45. 나는 벌어진 입을 쉽게 못 다물다가 마지막 남은 메일을 눌렀다.
[사진]
“여긴…?”
난 뚫어져라 그 사진 속 풍경을 보았다. 꽃이 피기 위해 풀잎이 막 돋기 시작한 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엔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그곳은 내게 있어서 굉장히 익숙한 곳이었다. 바로 내가 주말마다 체육관에 가기 전에 가볍게 조깅하러 가는 공원이었기 때문이었고, …이 녀석과 대화를 나눴던 그 공원이기도 했다. 나는 그 사진에 잠시 헛웃음을 짓다가 보낸 시각을 확인했다.
16:27. 약 1시간도 안 된 시간이었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그에게 연락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난 전화번호부를 채 뒤지기 전에 덩그러니 떠 있는 메시지 알림을 발견했다.
[반휘혈 (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에 자연스레 메시지 함을 누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내용물은 이전처럼 사진만 덩그러니 있었다. 다만, 그 사진의 정체를 확인하자 이번엔 웃을 수가 없었다.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대충 던져 놨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집 밖을 나서자마자 허둥지둥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 손길은 조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렸다. 곧 엘리베이터는 도착했고, 후다닥 그 안에 타곤 1층을 누른 후,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빨, 빨, 빨, 빨…!”
빨리 내려가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동동거리고 있자니, 오늘따라 괜히 느리게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길 잠시,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촌각을 다투듯이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그 사이를 비집고 재빨리 나가 현관 쪽으로 달렸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리고 곧 보이는 익숙하고도 커다란 장신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휘혈아!”
그가 보낸 사진은 다름 아닌 우리 아파트 현관 사진이었다. 그는 자신이 왔다는 걸 그런 식으로 알린 거였다. 때맞춰 보낸 메시지의 타이밍이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장장 반년 이상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드문드문 안부만 묻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반휘혈은 아파트 옆 정자 아래에서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질 않고 있었지만 저 뒷모습을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
단번에 반휘혈을 알아본 나는 방금까지 느꼈던 피곤함도 잊고 반가운 마음에 후다닥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뒷모습만으로도 화보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눈까지 내려 더 그림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그에게 다가가니, 반휘혈도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체 언제부터….”
반갑게 다가서면서도 이 추운 날씨에 서 있었을 그가 신경이 쓰여 나도 모르게 걱정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다 끝내지도 못해 보고 말이 막히고 말았다.
“…휘혈, 이?”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잠깐 비비기도 해 보았으나, 눈앞에 보이는 건 그대로였다. 그 사실에 난 다시 한번 놀라며 입을 벌렸다. 그도 그럴 게 다름이 아니라,
‘왜 이렇게 잘생겨졌어?!’
안 그래도 미인이었던 애가 아주 훤칠한 미남으로 각성했기 때문이었다. 이 놀라움은 아침에 보았던 도방중 애들보다 더 놀라운 감각이었다. 아니, 그 얼굴이 더 잘생겨질 수 있는 얼굴이었어?! 아니, 이건 잘생겼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잘생겼다. 왠지 심장이 떨리게 잘생겼다는 말을 실시간으로 체감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묵직해진 것이 다가서기 어렵게 만드는 느낌도 들었다.
“누나.”
하지만 그런 내 기분을 단번에 깨부수는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얼떨떨해하던 것도 잊고 홀린 듯 반휘혈과 눈을 맞췄다. 반휘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살짝 접으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