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85화 (85/306)

85. 생각지도 못한 만남. (5)

“너는 진짜….”

그래, 너 반휘혈 맞구나. 하여간 얘는 사람 심장 떨리게 하는데 뭐 있다. 순간 그의 미소에 넋을 놓을 뻔했다. 가까스로 그것은 막았지만 왠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뭐라 한 마디라도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건만 순진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결국 어떤 말도 내뱉질 못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에휴, 됐다. …그보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글쎄.”

그는 감흥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느낌이 싸했다.

“너 혹시, 나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던 거야…?”

정말로 설마 싶었다. 에이, 이렇게 추운데? 게다가 눈도 내리는데? 하하. 하고 외면해 보았지만 내린 양이 적긴 했어도 그의 주위로 눈이 안 쌓였다는 것과 키가 높아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에 눈이 달라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모습을 통해 난 이 녀석이 여기에 적어도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내가 집 들어가는 거 봤을 텐데 왜 그때 안 불렀어!”

괜히 이 추운 날 더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해졌다. 내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봤으면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마터면 그냥 보낼 뻔했다. 아마 내가 도착한 걸 보고 타이밍 맞춰 메시지를 보낸 게 틀림없었다.

“그냥.”

하지만 반휘혈은 별로 신경 쓰질 않는 듯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답답해져 미간을 살풋 찌푸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러고 있지 말고 집에 들어가자. 따뜻한 거라도 내 줄게.”

“아니. 됐어.”

그런데 사양 않고 당연히 들어올 줄 알았던 그가 거절을 내뱉었다. 뜻밖의 말에 의아해져 녀석을 보니 반휘혈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슬슬 가 봐야 돼. 형이 저녁 먹자고 했어.”

“아. 형이랑 같이 왔어?”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며 되물으니, 반휘혈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야지. 어서 가.”

너무 빨리 헤어져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내가 웃으며 배웅해 주려 하니, 어쩐지 반휘혈의 얼굴이 뚱해졌다.

“…그거뿐?”

“뭐가?”

“…….”

반휘혈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가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한 눈치였지만 그게 뭔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길 한참, 그가 돌연 두 팔을 살짝 벌렸다.

“…뭐 하는 거야?”

근데 그 제스처가…, 왠지 익숙한 자세였다. 저건 보통 친한 사람이나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한다는 그 모습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반휘혈이 내게 그런 행동을 할 일은 없기에 난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냐는 시선을 가득 담아 바라봐도 반휘혈은 손을 거둘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손짓을 가볍게 하며 무언의 행위로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방금 했던 추측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얘가 답지 않게 왜 이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다 곧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 헛웃음을 지으며 반휘혈을 바라보았다.

“너 설마, 예전에 내가 외로우면 안아 준다고 했던 거 기억하고 이러는 거야?”

정말 믿기지 않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는 만큼 당장 떠오르는 건 이거뿐이었다. 그리고 반휘혈은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허. 허허.”

그의 대답에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입을 벌리며 잠시 웃고 있자니, 반휘혈은 여전히 무언으로 나를 재촉했다. 결국 난 어쩔 수 없이 그 품을 가볍게 안고 그에게 말했다.

“어서 와.”

“응.”

반휘혈은 내 어깨까지 고개를 살짝 내리며 내 환영에 화답해 주었다.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한 난 웃음을 작게 터트리며 그의 머리를 짧게 헝클이며 품에서 떨어졌다.

“미국에서 잠깐 살았다고 이렇게 달라져도 돼?”

이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것도 이 녀석이 형과 지내면서 좋은 영향을 받아서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선지 빈정거리는 말과는 달리 내 입가엔 기쁜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누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그런데 이어진 그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너는, 진짜 이런 부분은 하나도 안 바뀌었구나.”

매번 이렇게 오해할 만한 발언하는 건 전혀 변하질 않았다. 누가 들으면 정말 나 좋아하는 줄 알겠네. 아, 물론 좋아하는 건 맞지. 다만, 이성이 아니라 진짜 ‘누나’로서 말이다.

“뭐 어때. 이제 진짜 들어가 봐. 정문까지 바래다줄게.”

“됐어.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아니, 이 녀석이? 나는 반휘혈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너, 반휘혈 아니지.”

반휘혈이 맞다면 이렇게 매너가 장착되어 있을 리 없다. 미심쩍게 그를 보고 있자니, 그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불만이야?”

대번에 까칠해진 말투였다. 그제야 난 그가 반휘혈임을 인정했다. 그래. 넌 다정한 모습은 너무 안 어울리긴 했어. 물론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어색해서 남처럼 느껴지긴 했다. 그래도 흔치 않은 그의 배려기도 해 난 그에 어울려 주기로 결심했다.

“알았다, 알았어. 나 먼저 들어갈게. 조심히 가고… 아, 너 혹시 우리 학교 다녀?”

문득 그 사실을 여태 파악하질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확인차 물어보자 반휘혈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새삼스럽지만 정말 다사다난할 것 같은 학교생활이 예상되었다. 오늘 만나 본 최강혁은 굉장히 한 성격 하는 걸로 보였다. 정말 인소 남주에 걸맞은 성질 머리임이 분명했다. 그런 녀석이랑 얘랑 만나면 대체 어떻게 될까…. 왠지 끼어들고 싶지 않은 신경전이 펼쳐질 건 자명한 일이었다.

“우선,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 나 진짜 들어갈게. 감기 걸리지 말고. 집에 들어가면 꼭 따뜻하게 몸 데워.”

내 인사에 반휘혈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난 그런 그를 향해 한 번 더 손을 흔들어 준 후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휘혈은 몸을 돌려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얼굴 보니 좋네.’

반갑기도 했고, 그가 미국에서 잘 지내다 온 것 같아 마음이 확 놓였다. 그러다 문득 아침에 만났던 그 신비하고도 이상한 존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이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진 모르겠다. 하지만, 원래 인생이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아니겠는가. 난 머리를 세차게 헝클이곤 볼을 가볍게 두 손으로 내려쳤다.

“…힘내자!”

고된 일정으로 인해 꺾여져 갔던 마음이 다시 부활한 순간이었다. 나는 새롭게 기합을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렇게 밝아진 아이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 순 없었다. 그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어른으로서 정신을 다잡아야만 했다. 물론, 반휘혈은 날 어른이라고 여기진 않겠지만 그런 건 어차피 작은 문제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난 집에 들어갔다.

***

기나긴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밝았다.

“미쳤나 봐, 미쳤나 봐!”

“진짜 반휘혈이었어! 어떡해, 어떡해!!”

“그냥 조각이 걸어 다니더라. 나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봤어!”

“사진보다 실물이 진짜 미쳤어…! 아니, 저건 사진에 담길 그릇이 아냐!”

그리고 현재 우리 반은 난리였다. 그도 그럴 게 어제 등교하지 않았던 반휘혈이 정식적으로 나타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연찮게 등교 중에 그를 본 학생들은 눈을 떼지 못했고, 그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다거나, 환각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학생까지 출현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어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자 버리긴 했지만 정신적인 피로 누적이다 보니 쉬이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난 한시라도 빨리 내일을 바랐다. 다름 아닌 내일은 그토록 기다리던 주말이었으니까…!

이 하루만 버티면 주말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다. 3월 모의고사가 정말 걱정되긴 했지만, 그보단 내 컨디션이 더 문제였다. 여기서 더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겨우 남은 의지를 불태웠다.

‘오늘은 어떻게든 조용히 있는다…!’

운명 어쩌고저쩌고는 다음 주부터 생각하자! 그렇게 지독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데,

“그런데 최강혁은 등교 안 하나?”

“우리 학교 맞지?”

“맞을걸? 1학년 1반 학생 명단에 있다고 들었어.”

…아니, 그거까지 알아? 반 아이들의 빠른 정보에 난 기함하며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빨리 보고 싶다!”

“나도, 나도! 걔도 진짜 실물이 미쳤다고 하던데!”

“될 수 있다면 반휘혈이랑 나란히 있는 거 보고 싶어. 그럼 완전 눈 호강일 거 아냐!”

꺄아, 꺄아. 여자애들이 난리가 났다. 나는 그 말을 조용히 듣다가 눈썹을 살풋 모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잘생겼던가?’

어제 본 바로 잘생기긴 했다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울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반휘혈이 더 잘생겼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어차피 나랑 관계없지만.

최강혁 걔가 잘생겨 봤자 멀리서 눈 호강을 하는 게 다일 거 아닌가. 나는 가까이서 반휘혈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시큰둥하게 여기며 넘어갔다.

그런 도중인데,

“야, 야!! 빅뉴스!! 빅뉴스!!!”

“뭐야? 왜 이리 호들갑이야?”

“뭔데?”

갑자기 어떤 남학생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그러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잠시 몰리자, 남학생은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기색으로 외쳤다.

“최강혁이 고찬영 쓰러트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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