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1)
움찔, 그 소식에 몸이 저절로 덜컹였다.
“뭐??”
“최강혁?? 다정한이랑 싸운다고 하지 않았어?”
“뭐야?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생각도 못 한 정보는 반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반 아이들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남학생은 흥분한 어조로 설명을 계속했다.
“어제 길거리에서 고찬영이랑 최강혁이 먼저 만났대! 그리고 고찬영 별명 잊었어? 싸움광이잖아. 분명 먼저 시비 털었겠지.”
“헐.”
“최강혁도 성격 만만치 않지? 그럼 둘이 당연히 붙었겠네.”
“와, 그럼 사대천왕 바뀌는 거야? 고등학교 입학 하루 만에?”
“미쳤다. 최강혁.”
사대천왕의 자리가 바뀌었다. 이것 하나만으로 온 학급에 주는 파급력은 남달랐다. …그건 그렇고, 원래는 다정한이랑 싸우기로 했던 거구나. 어제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는 전혀 듣질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고찬영이랑 최강혁이 싸웠다는 것만 알았지,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정말 없었다. 새삼 자신의 정보력에 통탄했으나, 곧 그 감정을 싹 지웠다. 왜냐하면, 내겐 알찬 정보통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난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며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안경희에게 슬쩍 물었다.
“경희야, 넌 알고 있었어?”
“으, 어…?!”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 올 줄은 몰랐던지 안경희가 파드득, 하며 몸을 튀었다. 그러다가 곧 새빨개진 얼굴로 안경을 추스르며 헛기침을 하곤 다시 내게 되물었다.
“크, 크흐흠. 뭐, 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난 주위의 눈치를 살짝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다정한이랑 고찬영이 싸운다는 거나, 그…, 사, 사대, 크흠! 그, 사, 대천왕…!이 바뀐 거 말이야.”
내 입으로 이 단어를 직접 말할 날이 오다니! 수치스러워서 두 번 다신 못 할 짓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건 안 봐도 뻔했지만 모른 척 넘어갔다. 안경희도 그런 내 모습을 제대로 살피질 못하고 있는 분위기라 참 다행이었다.
“아, 그, 그거. 어…, 응.”
역시 믿음직한 정보통이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이 왜 이렇게 듬직한지 모르겠다.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것 같았지만,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던지라 꾹 참으며 조심스레 그녀에게 정보를 물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왜 다정한이랑 싸우게 된 거고, 어쩌다가 최강혁이랑 붙은 건데? 다정한이 고찬영한테 지기라도 한 거야?”
“아, 응…. 그, 그게, 으음.”
속사포로 내던진 내 질문에 안경희가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곤 공책과 펜을 꺼내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어, 어제 어떤 애가 이윤한테 고찬영하고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는데, 이윤이 다정한이랑 고찬영이 방과 후에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거든. 그리고 이 사실을 다정한도 부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모두 둘이 서열 싸움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어. 나도 그렇고.”
“…근데 왜 난 이 소식을 이제 알았을까.”
공책에 적힌 이윤, 다정한, 고찬영이라는 이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정도 이야기면 내 귀에 들어와도 이상하질 않았을 텐데, 정말 왜 나는 이제야 이 소식을 들었지?
“그, 그야 어제 바빴으니까….”
“아.”
그랬지, 참. 나 어제 누구누구 때문에 정말 바빴지. 다시 상기된 한도훈의 만행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역시 다음에 만날 땐 한 대 때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내용을 부탁했다.
“그럼 어쩌다가 다정한이 아니라 최강혁이랑 싸우게 된 거야? 아니, 다정한이랑 먼저 싸우고 고찬영한테 깨진 건가?”
“아, 그건 아니고….”
안경희가 슬쩍 주위의 눈치를 한번 보며 우리에겐 아무도 관심이 없단 걸 확인하더니, 내 쪽으로 더 접근해 작게 속삭였다.
“길에서 고찬영이랑 최강혁 둘이 먼저 우연히 마주친 거 같아.”
“아, 그래?”
그럼 고찬영이 먼저 시비를 턴 게 맞을지도. 어제 등교할 때 마주친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아, 응. 그, 근데….”
“응?”
궁금했던 게 전부 해소되자 1교시 수업 준비를 하려 몸을 물리는데, 어쩐지 안경희의 기색이 이상했다. 무언가 우물쭈물하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왜 그래?”
“상황이 좀 이상하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 미안. 좀 더 확실해지면 알려 줄게.”
안경희가 말을 흐리며 내 눈을 피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없게 고개를 푹 숙이는 게 꽤나 위축되어 보였다.
‘…상황이 이상하다고?’
어쩐지 석연찮은 말이었다. 더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기색에 그저 기다려 보기로 결심했다.
“알았어. 알려 주고 싶을 때 알려 줘.”
“…응!”
내 말에 풀이 죽어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며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애라서 그런지 나는 결국 웃음을 가볍게 흘리고 말았다.
“뭘 그리 내 눈치를 봐. 누가 봐도 내가 너한테 빌붙는 건데. 그냥 편하게 있어도 된다니까.”
“그, 하, 하지만….”
“친구잖아.”
나는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익살맞게 웃어 보였다.
“난 네 상사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어깨에 힘 좀 빼.”
“…….”
안경희의 눈이 커졌다. 곧 그녀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며 눈이 잠깐 동안 방황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곤 소심하게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만족스레 웃으며 교과서를 펼쳤다. 오늘 하루는 대체 어떻게 흘러갈까 생각해 보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뭐든 어제보단 낫겠지.’
살면서 그렇게 험난했던 하루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나름 아침부터 학생들이 몰려올 거라고 각오도 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조용했다. 아무래도 어제 화를 좀 낸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그냥 편하게 마음을 먹으며 수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때의 난 몰랐다. 지금 이 순간이 내게 가장 한가했던 시간이었음을.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 전혀 준비를 안 했던 자신의 안일함을 저주하는 일이 찾아올 것임을. 지금은 모르고 있었다.
***
“그어어….”
그리고 난 현재,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며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어어…. 나는 책상에 엎어진 채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바로 도서관이다. 왜 여기 있느냐,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도망쳤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이곳으로 도피하는 데 성공한 난 퀭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설마 방심했던 걸 비웃는 것처럼 다음 쉬는 시간에 사람이 그렇게 몰릴 줄 몰랐지. 게다가 이번엔 이윤이나 한도훈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반휘혈이 문제였다. 소문으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접했던 그 실물을 직접 본 여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고 내게 정보를 묻기 위해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도방중에서 유명했던 애들이 전부 이 학교로 입학해 오니 그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캐물었다.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나마 접근하기 쉬운 내게로 찾아오는 터라 덕분에 내 책상엔 억지로 쥐어진 뇌물도 산더미였다.
“쓰으벌…. 내가 만만하다 이거지이이….”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이 만만해 보이는 인상에 대해 깊이 통탄했다.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그런지 아주 내가 쉬운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안 그럼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만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냥 묻는 거면 몰라. 그 안에 은연중에 사람 깔보는 듯 대하는 놈들도 있어서 더 짜증이 치밀었다. 별별 사람 다 있다지만 이건 나이를 떠나서 정말 화가 났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물론 남자한테 인기 있다곤 말 못 하지만 그래도 내가 어때서! 날 좋아한다고 하는 애 한 명 없지만 그래도 내가 어때서어어…!’
생각할수록 비참해지는 기분도 들었지만 열이 받아 어쩔 수 없었다. 장소가 도서관이라 마음껏 책상을 내리치며 분풀이를 할 수 없었던 난 두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어 댔다.
…두고 봐. 내가 진짜 대학만 가면 보란 듯이 잘난 놈 골라서 사귄다.
정말 가능성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생각을 안 하면 못 버틸 것 같았다. …정 안 되면 애들한테 남자나 소개해 달라고 해야지. 저렇게 인물들이 잘났는데 설마 내게 소개시켜 줄 남자 하나 없겠는가. 나름 대로의 희망을 안기 시작하자, 한결 기분이 풀렸다. 나는 대충 팔을 앞으로 뻗으며 눈을 감은 채 차가운 책상 위에서 한숨 돌렸다. 그러던 중,
똑똑, 하고 책상을 가벼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자리, 비었을까요?”
그리고 동시에 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졸린 듯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헉. 나 잠깐 졸았나?!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아, 예, 비었…, 응?”
그러다 보이는 인물에 눈을 크게 뜨며 깜빡였다.
“재현이?”
내 눈앞에 있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재현이었다. 이재현은 싱긋 웃으며 작게 인사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도서관이다 보니 목소리가 작아 이재현인 줄도 몰랐다.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의자를 잡아 빼 그곳으로 손짓했다. 이재현은 작게 고개를 꾸벅이며 살며시 의자에 앉고, 들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렸다.
“공부하러 왔어?”
“네. 설마 누나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그거 욕이야?”
“설마요.”
욕인 것 같은데…. 입가엔 장난기를 가득 담으며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 이재현은 숨죽이며 웃었다. 그러곤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제가 설마 누나를 욕할 리가요.”
“흐음~.”
나는 잠시 그의 말에 뜸을 들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턱을 괴곤 픽, 하며 웃음을 흘렸다.
“좋아. 믿어 보겠어.”
어차피 그의 말대로 그가 내게 욕할 리 없단 걸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녀석이 그런 내 속을 알고 있을 거라 믿고 있기도 했고, 장난으로 넘기는 것 같아 더 짓궂게 굴었던 것도 맞았다. 이재현도 이미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을 즐기며 웃어 보였다. 나는 그걸 귀엽게 바라보다가 그가 내려놓은 문제집에 눈길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