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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소에 갇혀버렸다 !-87화 (87/306)

87.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2)

음. 나도 문제집 하나 챙겨 올 걸 그랬다. 뒤늦은 생각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그렇고, 개학한 지 겨우 이틀인데, 벌써부터 성실하네.”

“그럼요. 올해부턴 경쟁자도 엄청난걸요. 미리 준비해야죠.”

이재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 말에 자연스레 아는 인물들이 떠오르면서 안쓰럽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품 안을 뒤적여 그의 앞에 초콜릿 몇 알을 내주었다.

“이거 먹고 힘내.”

내 비상식량이었지만 나보단 이 아이에게 더 쓸모가 있어 보였다. 마침 가지고 있던 게 그가 즐겨 먹는 브랜드의 초콜릿이기도 했다. 이재현은 그것을 받고 바로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런데 누나는 왜 여기에 있으셨어요?”

“으음…. 도피 중.”

나는 그의 물음에 힘없이 답하며 다시 책상 위로 엎어졌다. 이재현은 내 대답에 아, 하고 탄식했다. 아무래도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나 보다.

“도훈이랑 이윤한테 고백받았다는 그거요?”

“으웩.”

이재현의 말에 자동 반사로 신물이 올라왔다. 도대체 그 질문만 몇 번째인지. 더는 귀에 딱지가 앉을 것만 같았고, 진절머리가 나 더는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도훈이가 답지 않게 한 건 했네요.”

“내 말이…! 합.”

흠, 흠. 순간 너무 공감이 돼 나도 모르게 소리가 크게 튀어나왔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슬쩍 보며 차가운 책상에 볼을 누르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일은 걔가 저질렀는데 왜 내가 이렇게 힘든 거지? 내가 몇 번을 말해야 겨우 듣는 시늉이라도 해 준다니까? 아니, 그냥 개무시당하는 기분이야. 안 그래도 겨울 방학 내내 눈만 퍼 나르고 와선 어젠 어제대로 피곤해서 뻗었는데도 피로가 풀리질 않아. 이게 인생인가? 그래. 인생이지. 근데 나 좀 쉬고 싶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말하다 보니 아주 아무 말 대잔치가 되었다. 이재현은 그런 내 말을 조용히 듣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 이수한테 들었어요. 어제도 저녁 안 먹고 바로 잤다면서요.”

“어…. 먹기엔 너무 피곤했다.”

“그래도 잘 챙겨 먹고 다니세요. 요즘 이수가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누가, 서이수, 걔가? 왠지 괴상한 소릴 들은 것 같았다. 나는 팍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내가 들은 게 맞나 확인차 이재현을 보았다. 하지만, 이재현은 무슨 이상한 말을 했냐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물론 저도 걱정하고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됐다.”

대답해 주려다가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졌다. 그래서 난 다시 책상 위로 푹 엎드렸다.

“…누나, 괜찮아요?”

“안 괜찮아. 그러니 나는 내버려 두고 넌 공부를 하면 된단다….”

“누나 진짜 힘들었나 보네요….”

지쳐 있는 내 상태를 보는 이재현의 목소리에서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 소리에 왠지 기분이 울컥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입장이 생겨서일까, 나는 입꼬리를 쭉 내리며 울먹이는 눈동자로 휙, 하고 이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아,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생겼니?”

“네?”

“왜 다들 날 가만두질 않을까? 자꾸 날 이용해 먹으려고만 해! 그 시간에 당사자에게 직접 갈 것이지! 나는 뭐 휘혈이랑 쉽게 친해진 줄 아나…! 이게 다 내가 마음고생, 몸 고생 해 가면서 겨우 얻은 신뢰인데 다들 날로 먹으려고 해…!”

“…그, 그러게요. 다 너무하네요.”

억울함에 저절로 우는소리가 나왔다. 이재현은 당황하는 것 같다가 곧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조해 줬다. 그래서일까, 탄력이 받은 나는 주절주절 내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진짜 너무하지? 어? 어떻게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자기들만 생각해? 내가 반에서 도망친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도 내 시간에 권리가 있는 몸인데 왜 내 시간을 맘대로 사용도 못 해? 나 진짜 조용히 살고 싶은데 날 내버려 두질…,”

자세까지 바로잡고 우다다 하소연을 시작했다. 물론 도서관임을 의식해서 소리는 굉장히 작았다. 하지만, 내 입은 막을 새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이재현이 차고 있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눈에 들어왔다.

12시 11분.

“헉.”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나는 바로 미안함에 울상을 팍 지었다.

“미, 미안하다. 재현아. 내가 공부 시간 다 빼앗고…, 너 밥도 안 먹었을 텐데….”

벌써부터 공부하러 온 기특한 애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 버렸다. 나는 초조함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괜찮아요. 누나. 공부는 나중에 해도 괜찮은걸요. 그리고 1학년은 이제 슬슬 먹을 시간이라 늦지도 않았어요.”

“아, 진짜 미안해. 내, 내가 매점에서 뭐라도 사 줄게.”

“정말 괜찮아요.”

이재현은 자신의 말대로 괜찮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인지 맑게 웃어 보였다. 그 티끌 없는 미소에 난 저절로 감동에 젖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깐 얘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어!

어쩜 부모가 누구신지 애를 참 예쁘게 낳으셨다. 볼수록 진국인 우리 이재현은 말도 마음씨도 참 예쁘기 그지없었다.

“크윽. 진짜 내가 매점에서 뭐라도 사 줄게. 아, 우선 나가야지. 배고프겠다.”

“아, 그럼 누나도 저희랑 같이 드실래요? 아, 이건 좀 그러려나…?”

이재현은 내게 제안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이맛살을 살풋 찌푸리며 웃는 모습이 그의 아쉬움이 엿보였다. 크윽. 그 모습에 내 마음이 저절로 아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식당에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지 않았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조용히 살고 싶은 욕망이 더 커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다음에 따로 밖에서 같이 먹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은 이것뿐이라니. 이렇게 슬픈 현실이…! 이재현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내 마음은 쉽사리 편해지질 않았다. 그래서 연신 미안해하는 내게 이재현은 불현듯, 어떤 것을 생각했는지 어떤 제안을 말했다.

“아, 그럼 저 거짓말 친 거 용서해 주는 건 어때요?”

“응?”

거짓말? 얘가 나한테 그런 걸 했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도서관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퍼뜩 떠올렸다.

“아……!!! 맞아, 너…!”

“헤헤.”

이재현이 볼을 긁적이며 익살맞게 웃었다. 너, 너 이 자식…! 그, 그렇게 귀엽게 웃으면 내 기분이 풀릴 줄…!

“엄청 놀라셨죠. 제 딴엔 누나랑 친하다고 생각해서 그만…. 너무 장난이 과했을까요…?”

푸, 풀릴 줄…!!

“죄송해요. 누나…. 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이재현이 들고 있던 문제집으로 제 입가를 가리며 사과를 전했다. 그리고 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크윽…!”

땡, 땡, 땡!! 서이나 K.O.…!!

나는 그 눈빛에 장렬히 패배했다. 아니, 저 눈을 어떻게 이겨! 이제 보니 소악마 스타일은 한도훈이 아니라 이재현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주, 어? 아주 사람 마음을 확확 풀어 버리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다음부턴 그런 장난치지 마.”

“넵.”

결국 항복을 선언해 주자 이재현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미모가 물이 오르니 웃는 것도 엄청 예뻤다. 그 얼굴에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지며 쓴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지났다. 그러다 이야기가 길어져 어느 순간 다시 반으로 가는 걸 놓치고 2층에서 1층으로 가는 중간 계단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재현과 헤어지기 위해 서둘러 인사를 하려는데,

“아무튼 밥 잘 먹…, 헉.”

1층에서 눈에 걸리는 인물을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벽에 붙어 섰다.

“…누나?”

이재현은 내 반응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나와 함께 덩달아 숨은 것 같긴 했지만 의아함을 감출 순 없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보다가 슬쩍 계단 아래를 살폈다.

“억.”

그리고 그도 내가 했던 것처럼 바로 몸을 뺐다. 이재현도 방금 본 무언가와 엮이면 굉장히 귀찮아진 걸 직감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

“…….”

최강혁과 반휘혈이 복도에서 조용히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게 무슨 미친 상황이야?!’

당황스럽다. 아니, 그보단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라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뛸 정도였다. 이재현도 조용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눈을 부릅뜨고 나와 함께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야, 너도?’

‘네. 저도.’

그래. 우리 저기엔 절대 엮이지 말자. 나와 이재현은 서로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우리는 암묵의 시그널을 마친 후 조용히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전개가 빠르다고?’

쿵쾅쿵쾅. 그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기분이었다. 둘 다 차가운 분위기가 강하다 보니 살얼음이 팍팍 낀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추운데 저 주위는 더 추울 것 같았다.

‘내가 관계자만 아니었어도 팝콘 들고 즐기는 건데…!’

완전 엑스트라 입장에선 아주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연예인 뺨은 수십 번 쳐 버릴 법한 미남들이 서로를 말없이 지켜보다니! 그것도 냉랭하기 짝이 없게! 그동안 소설이나 만화에서 수백 번은 더 봤을 라이벌 간의 대치였다.

하지만, 입장이 입장인지라 마음 놓고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최대한 그들이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쭈그려 앉은 채 그들을 구경했다. 물론, 이재현도 내 옆에 슬쩍 앉아 합세했다. 그러더니 그가 내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갑자기 뭔가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재현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누나, 구경할 때 몸을 앞으로 빼는 습관 있어요.”

“……응?”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왜, 전에 저희 서열 싸움에서 숨어 있는데 자꾸 타 학교 애들한테 들켰잖아요. 그거 누나가 구경하다가 몸을 앞으로 빼면서 들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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