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88화 (88/306)

88.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3)

“뭣.”

새로 안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동안 그런 비밀이…! 어쩐지 분명 잘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들키나 했다. 설마 내게 그런 몹쓸 습관이 있었을 줄이야! 왠지 뒤통수가 얼얼한 감각에 멍청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갑자기 이재현이 다급한 눈짓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 시선에 번뜩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시선을 내리자, 보이는 광경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어머!’

움직였다, 움직였어! 침묵을 유지하며 서로를 말없이 탐색하던 그들이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서로에게 거리가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그들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보고 있는 내 가슴이 더 흥분으로 뛰었다. 주책맞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재밌다…! 나는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그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켜보는데,

‘엥?’

나타난 결과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놀랍게도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그냥 서로를 지나쳤다. 게다가 지나치면서 그들은 그렇게 노려보고 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무감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서로를 무시하며 지나쳤다.

‘뭐지, 이 허무함은.’

괜스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쭉 내밀고 있다가 문득, 반휘혈이 현관문이 아니라 계단을 향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응? 잠깐. 어, 어??’

왠지 거리감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을 알아챘을 땐 이미 늦었다. 내 눈앞엔 기다란 다리만이 보이고 있었다. 반응할 새 없이 그 긴 다리가 휙휙 걸으니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한 탓이었다. 왠지 모르게 위에서부터 시선의 압박이 느껴졌다.

“하, 하하. 휘혈이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때 나보다 상황을 더 빨리 파악한 이재현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올려 반휘혈에게 인사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난 끼긱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휘혈이, 안녕? 좋은 점심이네? 하하하.”

“…….”

쓰읍. 시선이 무겁다. 직접 마주하니 그 침묵이 더 버겁게 느껴졌다. …제발 뭐라도 말해 주면 안 될까? 더럽게 추운 날씨였지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흠흠! 나, 난 그만 반으로 가 볼게. 얘들아, 밥 맛있게 먹고, 나중에 또 보자!”

에라이, 모르겠다. 결국 난 도망을 선택했다. 그러자 반휘혈이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린 것 같긴 했지만 왠지 내 직감이 외쳤다.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그래서 난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

“…….”

이재현은 현재 숨 막히는 공기에 휩싸였다. 그는 삐질거리는 땀도 못 닦고 슬쩍 눈앞에 있는 반휘혈의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반휘혈은 현재 사라진 서이나의 자취를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데 놓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재현은 그가 밥을 먹으러 가지 않고 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던 이유를 대강 추측하고 있었다.

‘혹시…, 누나랑…,’

“야, 반휘혈! 먼저 가는 게 어딨어!”

그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켜 확인해 보니 한도훈이었다. 한도훈은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더니, 반휘혈이 식당 쪽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올라가면 2학년 교실이 바로 나오는 계단 위에 있는 걸 발견하곤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샐쭉하니 웃었다.

“너…, 누나랑 밥 먹으려고 했구나?”

그 말은 이재현 스스로가 추측했던 내용과 똑같았다. 그리고 반휘혈은 한도훈의 말을 듣더니 홱, 하고 고개를 돌리곤 그를 노려봤다. 그러곤 반휘혈은 입을 꾹 다문 채 척척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맞구나.’

이재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를 가리고 작게 헛기침을 해 댔다. 그런 중, 놀릴 거리를 제대로 포착한 한도훈은 능글맞은 웃음을 그리며 빠르게 멀어져 가는 반휘혈의 옆에 천연덕스럽게 다가가 건들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왜 안 올라가고~? 응?”

“…….”

이재현은 멀어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쟤들은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변하질 않네.’

어쩐지 익숙한 그 풍경에 반가움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이재현은 곧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광경을 목격했다.

“응? 오랜만에 누나랑 밥 먹자 안 해? 응? 으, 악!”

바로 반휘혈이 한도훈을 귀찮다는 것처럼 밀어서 쫓아내는 장면이었다.

“오….”

이재현은 그 모습에 눈을 잠시 크게 떴다. 잠시 말을 못 잇고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야, 이재현. 여기서 뭐 해? 너 기다리다가 배고파서 돌아갈 뻔했잖아.”

고개를 돌리니,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질 않는 서이수가 서 있었다. 이재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다시 반휘혈과 한도훈이 사라진 너머를 저도 모르게 확인했다.

“왜 그래? 저기에 뭐 있어?”

서이수는 이재현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의아해하며 그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식당으로 향하는 학생들 무리뿐이었다. 별달리 특이할 것 없는 풍경에 서이수가 다시 이재현을 보았다. 그러자 이재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내리깔며 손으로 턱을 짚더니, 돌연 그의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수야, 혹시 너 도훈이가 휘혈이한테 치근덕거릴 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나?”

“그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너무 뜬금없는 말에 서이수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다 곧 한숨을 푹 내쉬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에게 대충 말을 던졌다.

“걍 무시하거나, 그 뭐지? 완전 차갑게 내려다봤잖아. 으, 난 걔가 표정 하나 없이 내려다보는 게 가장 살 떨리더라.”

“…그치?”

서이수는 그때를 떠올린 모양인지 짧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재현도 반휘혈의 그 모습을 떠올리면 한기가 도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근데 그게 왜? 그리고 이건 나보단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재현이, 네가 걔네들이랑 더 오래 알고 지냈잖아.”

“그렇지.”

이재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수는 그를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곧 고파 오는 배의 아우성을 못 견디고 이재현을 재촉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빨리 밥이나 먹자. 배고파 뒤질 것 같아.”

“하하, 그래. 그러자. 나도 배고프다.”

서이수의 말에 이재현은 웃음을 가볍게 터트렸다. 그는 먼저 앞서 걸어가는 서이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시선을 위층으로 향했다. 그러다 곧 즐거워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불쑥 서이수에게 말했다.

“진짜 이 학교에 오길 잘한 것 같아.”

“…너 자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그냥.”

앞으로의 학교생활이 재밌을 것 같아서. 이재현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며 기분 좋게 웃음을 지었다. 원래 예정이었던 과학고가 아닌 이 도방고등학교에 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

점심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시 하교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말이 하교 시간이지 뒤로 보충 수업이 남아 있었고, 그 후엔 야자가 있었다.

그리고 난 그 모든 일정을 끝내고 무거운 몸을 이끈 채 집에 돌아왔다.

…오늘도 긴 하루였다.

안 봐도 눈이 퀭해졌을 눈을 문질렀다. 철컥, 하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도어 록이 잠기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어서 와~.”

“…이나, 너 어디 아프냐? 낯빛이 별로 안 좋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들어서자마자 온 가족의 환영을 받았다. 우연찮게 문 쪽과 가까이 있던 아빠가 내 흙빛 같은 안색을 보더니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난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들고 있던 가방을 방 안에 던졌다.

“치킨 시켰는데 누나도 먹을 거지?”

“당연한 소릴 묻지 마라.”

“뭐래. 최근엔 오자마자 뻗었으면서.”

서이수가 내 말에 입을 삐죽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런 서이수를 가는 시선으로 쏘아보며 투덜거렸다.

“내가 뻗고 싶어서 뻗었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피곤해서.”

“아, 예, 예.”

아오, 저 얄미운 자식. 시건방지게 대꾸하는 동생 놈의 모습에 주먹이 부들거렸다. 그러다 곧 힘을 풀며 옷을 갈아입고 나와 서이수에게 틱틱거리며 말했다.

“너는 좋겠다. 야자 안 하고.”

“부러우면 누나도 체육관 운영 돕든가.”

“그냥 야자할게.”

나는 대번에 고개를 돌리며 동생의 말을 외면했다. 서이수가 어이없단 것처럼 헛웃음을 흘리는 게 들렸지만 난 못 들은 척하며 핸드폰을 만졌다. 아무리 야자가 싫어도 역시 그건 아니었다. 되도록 그쪽 방향으론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서이수 훈육 겸 체력 관리용으로 하고 있긴 했지만, 더 이상 복서 생활이랑은 인연을 끊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물론 복서 생활로 얻는 혜택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현재 가장 목표로 잡고 있는 대학 준비도 체육 특기자 전형으로 붙는 게 더욱 쉽다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내 고집이 그걸 허락하질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내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절대 포기 못 할 것 같아.’

제대로 발을 담는 순간 대충은 없다. 목표는 정상. 떼어 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미련이 다시 발을 붙잡아 이번엔 더 미친 듯이 매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주위를 안 살필지도. 이번만큼은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배려하지 않고 내 멋대로 해 방치한 결과를 바라보는 건 한 번뿐이면 족했다.

힐끗, 엄마를 보았다. 그러다가 TV를 보고 있던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말없이 지나가는 광고를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에서 왜 그러냐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어찌 됐든 이런 부분은 아빠를 닮았으니까.’

그 생각이 들자 저절로 입이 뚱하니 내밀어졌다. 그러다 불쑥 입을 열었다.

“왜 난 이런 부분만 아빠를 닮은 걸까.”

“……이나야, 그거 욕이니?”

“아니, 칭찬.”

“욕인 거 같은데…?”

“칭찬이라니까요.”

내가 말해 놓고도 욕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아빠가 상처받은 것처럼 가슴을 쥐며 울상을 지었지만, 왠지 기분이 뚱해져 위로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는 엄마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과 서이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폰을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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