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89화 (89/306)

89.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4)

***

“으~! 잘 잤다!”

주말 토요일 정오,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밀린 피로가 심하긴 했는지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걸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오히려 푹 잤단 느낌에 홀가분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나는 잠시간 침대에서 뒹굴다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변기에 앉아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다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 휘혈이 한국 돌아온 기념으로 파티할 건데 오든가 말든가요( ー̀εー́ )]

이런 이모티콘은 대체 어디서…, 아니, 이게 아니라 얜 목요일부터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엄청난 텐션으로 메시지를 우다다 보내면서 무조건 오라고 할 텐데 어젠 한 번도 연락을 안 한 것도 모자라 오늘은 이 메시지 하나뿐이었다.

“이윤한테 번호 준 게 그렇게 싫었냐….”

나는 어이없는 마음으로 한숨을 살짝 내쉰 후, 변기에서 일어나 씻고 한도훈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키패드를 쳤다.

너 언제까지 삐져 있…, 까지 치던 난 곧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용을 전부 지운 후 새로 적은 내용으로 송신 버튼을 눌렀다.

[내 자리 남겨 놔.]

이럴 땐 그냥 얼굴 보고 직접 담판을 짓는 게 나았다. 문자로 얘기했다가 또 무슨 오해를 낳으려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불쑥 무언가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삐진 건 얘뿐만은 아니지….”

안타깝게도 기분이 뚱한 아이는 한 명 더 있었다. 그 정체는 바로 반휘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 내가 같이 하교 안 해 줬다고 그런 거다. 본 수업이 끝난 후, 보충이 시작되기 전, 불현듯 작년에 야자를 기다렸던 일이 생각이 나 혹시나 싶어 기다릴 거냐고 물어봤던 게 아니나 다를까 긍정으로 돌아온 탓이었다. 정말 그 순간 얼마나 아찔하던지. 또 새로운 소문을 갱신할 뻔했다. 그래서 어제 그거 거절한답시고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 하여간 이놈들은 왜 이렇게 날 귀찮게 하나 모르겠다.

“이걸 또… 어느 세월에 푸나….”

허파 빠진 웃음만 공허하게 새어 나왔다. 급 귀찮음이 몰려와 그냥 가지 말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미 간다고 해서 물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준비한 후 설렁설렁 집을 나왔다.

‘어차피 체육관에 모여 있겠지.’

아니면 따로 연락을 줬을 테니 그 녀석들이 있을 곳은 뻔했다. 언제부터 우리 체육관이 아지트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존재만으로 고객을 쓸어 모으다 보니 별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대강 추측하면 체육관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다들 이곳에 모여 있었다.

“어, 누나. 웬일로 늦었네?”

“어어.”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서이수였다. 그래서 대충 대꾸해 주자,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이재현과 김시원과 눈이 마주쳤다.

“누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가이 맞이해 주는 그 모습에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었다. 음. 김시원은 주말에 보니 좀 신선하네. 평일에만 주로 봤다 보니 주말엔 아주 가끔만 봐서 이 광경이 왠지 새롭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가 그들의 근처에 서 있던 한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한도훈은 흥, 하며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향했다.

“도훈아, 왜 그래?”

“넌 갑자기 왜 그래?”

이재현과 서이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나만 보면 신나서 인사했던 애가 새침하게 구니 이상할 만도 했다. 어우, 저 아가를 어쩜 좋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도훈에게 다가갔다.

“도훈이 너 언제까지 그럴 거야….”

“제가요? 뭐가요? 전 보통인데요.”

정말 아무도 안 믿어 줄 말이었다. 실제로 모두의 눈엔 불신이 가득 깔려 있었다.

“이윤한테 번호 준 게 그렇게 싫었냐고…. 내 번호가 그렇게 귀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건데.”

그러자 한도훈이 울컥했는지 눈을 확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아, 그런 거 때문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그런 게 아니면 뭐 때문인데?”

“그건…!”

한도훈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체육관이 웅성였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에 놀라 주위를 살피니 다들 문 쪽으로 시선이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설마…?’

나는 파박, 하고 떠오른 사실 하나에 눈을 크게 떴다. 황급히 몸을 돌리자, 들어온 인물에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바, 반휘혈….”

“진짜 반휘혈?”

“미쳤다. 나 실물 처음 봐.”

“나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리고 동시에 체육관 내 여성 고객들의 반응이 조용하고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기들 딴에는 속삭인다고 생각했겠지만 정말 부질없게도 다 들렸다. 하지만, 화제의 중심인 반휘혈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건지, 그냥 관심이 없는 건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왔니…?”

정말 어딜 가도 주목의 대상이었다. 얘도 참 피곤하겠단 생각을 하며 인사를 건네자 반휘혈은 내 인사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환장하겠군.’

누가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왜 이런 부분에서 비슷하고 난리일까. 하필 삐져 있는 타이밍이 겹칠 게 뭐람. 왠지 겨우 풀린 피로가 다시 몰려오는 기분에 찌푸려지는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 걸 눈치챘는지 서이수가 내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 질문에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몰라….”

난 쟤네들 너무 어려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정말이지, 나한테 화가 나 있는데도 축하 자리에 초대해 준 한도훈이란 놈은 뭐고, 내가 참석할 걸 버젓이 알 텐데 당당하게 체육관에 찾아온 반휘혈이란 놈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하. 그래도 작년처럼 토라지면 어딘가로 사라져서 잠수 타려고 하질 않는 게 다행인 건가….

“…너도 참… 피곤했겠다. 서열 1, 2위가 저런데 어떻게 버텼냐…?”

새삼스럽지만 저 밑에서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아 결국 그 친구 자리를 따낸 서이수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진짜 저런 놈들을 대체 3년 동안 어떻게 봐 온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신기한 눈으로 동생 놈을 바라보자, 서이수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 소리야? 이짱 자리 바뀐 거 몰랐어?”

음?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내 말에 동조하며 같이 한탄해 줄 거라 여겼던 서이수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내가 의아함에 녀석을 보자, 서이수가 김시원을 척 하고 가리키며 말했다.

“시원이가 이짱 됐잖아. 몰랐어?”

“…엥?”

저절로 멍청하게 입이 벌려졌다. 놀란 마음에 김시원을 보니, 김시원이 맞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겼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깨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당당하게 펴진 것 같았다. 김시원도 표정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는데 그런 그의 얼굴에서 뿌듯함까지 보이는 게 그 사실이 굉장히 만족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김시원 너어…?”

나는 홀린 듯 김시원에게 다가가 그의 한쪽 어깨를 붙잡았다.

“너, 이 짜식…! 내가 너 해낼 줄 알았다!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더니, 결국 해냈구나!”

그러곤 팡팡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칭찬했다. 작년, 다리 밑 싸움 이후, 많지는 않았지만 남들의 눈을 피해 체육관에서 만나 눈 딱 감고 스파링을 해 준 보람이 느껴졌다. 물론 이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는지 알고 있어서 결국 받아들인 거긴 하지만…! 역시 이런 일을 듣게 되면 대견한 마음이 컸다.

삼짱으로 남기엔 아깝다 여기긴 했는데 설마 나 모르는 사이에 이짱 자리를 빼앗다니! 이 멋진 놈을 다 봤나! 나는 흐뭇한 마음을 막지 않고 함께 좋아해 주고 있자, 어쩐지 싸늘한 시선이 뒤통수를 자극했다.

그 찌르는 듯한 감각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자, 반휘혈이 무감각하지만 냉랭한 눈으로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한도훈은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며 자기 기분 상했다는 걸 가감 없이 표출한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짜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팩,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을, 말을 해! 이것들아!”

결국 참다못해 소리치자 한도훈이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할 말 없는데요? 어차피 전 관심도 없으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모로 기울인 채, 눈을 사선으로 뜨며 말하는 꼴이 아주 얄미웠다. 내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말하려던 찰나, 한도훈의 폰이 가볍게 울렸다.

“아, 도착했네요. 가죠.”

그리고 한도훈은 제 말만 내뱉고 휙, 가 버렸다. 반휘혈도 마찬가지로 말없이 나가는 걸 본 난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그런 내 곁으로 아이들이 조용히 다가왔다.

“누나, 진짜 뭔 짓을 저지른 거야.”

“와, 쟤네들이 저러는 거 처음 봤어요.”

심각하게 내게 질문을 던지는 서이수와 이 상황이 놀랍고도 신기한 듯한 이재현의 말에 나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너희들도 내가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해? 이윤한테 번호 주고, 야자 기다리지 말라고 한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이쯤 되면 진짜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않은가. 억울함에 울상을 지으며 그들을 돌아보자, 녀석들의 표정이 묘하게 썩어 들어갔다.

“쟤네 진짜 뭔데….”

“누나 잘못은…, 아니죠….”

서이수는 할 말을 잃은 건지 황당해했다. 이재현은 날 동정 어린 눈으로 위로해 주다가 곧 눈을 흐리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김시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귀찮게 되셨네요.”

그러게. 진짜 귀찮아졌어. 나는 잠깐 사이에 젖은 피로를 쓸어 내기 위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한숨을 다시 푹 내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어쨌든 빨리 내려가자. 더 늦으면 더 귀찮아질 거 같아.”

평소엔 그렇게 쿨하던 놈들이 이러니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아무튼 정말이지, 새삼스럽지만 그들의 나이가 이제 겨우 열일곱 살임이 다시 떠올려지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