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91화 (91/306)

91.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6)

***

“왔어?”

띠리릭, 하고 단조로운 신호음이 들리자 낮은 미성이 방문객을 반겼다.

“…….”

하지만 방문객, 반휘혈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냥 지나쳤다. 그제야 거실에 앉아서 노트북을 보고 있던 남성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안 좋은 일 있었어?”

“…딱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표정이 없는 반휘혈이었지만,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올려 두며 일어섰다.

“그 누나랑 싸우기라도 했나 봐.”

남자는 부엌으로 향해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병을 반휘혈에게 들어 올리며 마실 거냐는 뉘앙스를 풍기자 반휘혈은 고개를 돌리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거 아냐.”

아니긴. 남자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러곤 새 물병을 도로 냉장고에 돌려놓으며 문을 닫았다.

“난 오늘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남자가 피식, 웃으며 냉장고에 몸을 살짝 기댔다. 반휘혈은 그런 그를 향해 작게 혀를 차며 살짝 노려봤다.

“…시끄러. 형이야말로 오늘 안 온다며.”

그의 형, 반휘석은 반휘혈의 말에 웃으며 단조로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반휘석은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소파에 다시 앉으며 그에게 여상히 말했다.

“누가 잘못했든 빨리 화해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누나잖아.”

“…누가 보고 싶대?”

반휘혈이 짜증스레 대답하며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러곤 평소보다 거친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쾅, 하고 조금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울렸으나, 반휘석은 별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손에 턱을 괸 채 닫힌 문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솔직하지 못하긴.”

하기야, 제 감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애한테 뭘 바라겠냐마는. 반휘석은 짧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갈 길이 멀었네. 내 동생은.”

반휘석은 그의 동생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덤덤히 중얼거렸다. 그는 책상 위에 두었던 안경을 쓰며 하고 있던 일을 재개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후드와 캡 모자,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묵직한 음료수 상자를 들고 어느 한 커다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

결국, 와 버렸다. 나는 밀려오는 골치에 쓰고 있던 모자를 잠깐 들어 올려 머리를 거칠게 흩트렸다. 그러곤 입을 모로 삐죽이며 대문짝만하게 적힌 간판을 바라보았다.

도방 종합 병원.

…내가 진짜 여길 왜 왔나 모르겠, 아니, 알고 있지만 그래도 꼭 와야 했을까? 지금이라도 집에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극심한 갈등에 저절로 미간이 못나도록 찌푸려졌다.

왜 아침부터 병원 앞에서 이러고 있는가. 이유는 어젯밤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어제 고찬영의 무리 중 한 명이자 날 인질로 삼으려 했던 아이 한 명을 우연히 마주쳤다. 그리고 왜 자꾸 쟤네들은 무리에서 떨어져서 저렇게 당하고 있었나, 라는 의문이 불쑥 솟기 시작했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느낌이 굉장히 석연찮았던 난 결국 견디지 못하고 어떤 이에게 연락을 했다.

‘…여, 여, 여, 여보세요옷…?!’

내가 연락한 사람은 안경희였다. 갑자기 내가 통화를 걸자 꽤나 당황했던지 그녀의 음색이 심하게 떨리고 갈라지는 게 들려와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 밤늦게 통화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 고찬영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사정을 들은 안경희는 당황한 듯싶었지만 곧 그에 대한 답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실…, 어제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아, 아니, 잊었겠지. 방금 한 말은 잊어 줘…. 아무튼, 내가 그 일을 대강 파악하다가 이상한 부분을 찾았거든.’

이상한 부분? 나는 그녀의 말에 핸드폰을 다시 바로 잡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게, 아무래도 고찬영이…,’

안경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침묵을 일관했다. 그러자 곧 그녀에게서 대답이 이어졌다.

‘배신을, 당한 거 같아.’

“하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지. 역시 괜히 들었나 봐. 호기심이 사람 죽인다고 하던데 지금 내 꼴이 그 모양이 아닐까? 나는 찌푸려진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누르다 다시 슬쩍 병원 문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고찬영이 입원해 있다. 안경희의 정보로 입실되어 있는 호수까지 편하게 알아냈다. …정말 이런 정보는 대체 어떻게 구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깊이 파헤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외면했다.

“이렇게까지 알았는데, 모른 척 넘어가는 것도… 좀 그렇지.”

의도치 않았지만, 어찌 됐든 그가 다칠 때 현장에 같이 있기도 했고, 어젠 그의 친구도 도와줬다. 게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정보까지 파헤쳤으니,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고 있기도 그랬다.

‘…무엇보다, 그 녀석은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을 것 같고.’

왠지 느낌이 그랬다. 어제 만난 그 친구도 혼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걸 보면, 예상치 못한 급습이었을 확률이 컸다. 게다가 나를 잠깐 붙잡던 그 친구는 내게 감사 인사가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하는 기분도 컸다. 정황상 내 추측일 뿐이지만…,

‘도움을, 바랐던 것 같단 말이지.’

낯선 타지에서 이유도 모르게 당했으니 도움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학생이란 놈들이 개학 첫날부터 싸움을 걸러 타지에 오긴 했어도, 그 안에 배신을 상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리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보였던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오, 몰라. 그냥 부딪치자. 죽이 되든 말든, 그냥 내 할 말만 전하고 오는 거야.”

이놈의 오지랖은 이미 글러 먹었다. 반휘혈의 가정사에 개입할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아무래도 이 세계의 서이나는 굉장히 간섭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세계의 나라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윽.”

젠장. 이렇게 다른 세계와 이 세계의 성격 차이를 생각하자 또 속에서 울렁증이 도졌다. 나는 그 증상에 바로 고개를 휘휘 저으며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어차피 둘 다 나니깐 받아들여야 돼.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그 사실을 머릿속으로 자꾸 되뇌었다. 그러자 울렁이는 속이 차츰 나아졌다. 그 사실에 나는 안도하며 천천히 병원 입구로 향했다.

***

506호. 고찬영.

나는 그가 입원한 병실 앞에서 그의 이름표가 넣어진 팻말을 빤히 보았다. …들어가도, 되나? 혹시 몰라 병문안용으로 음료수를 사 오긴 했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보니 상당히 눈치가 보였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급격히 소심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문 앞을 서성였다. 누가 봐도 수상한 꼴로 찾아왔는데 과연 고찬영이 날 받아 줄까? 물론 얼굴을 보인다고 해서 환영해 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지금 내 꼴은 굉장히 의심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 근거로 복도 쪽에 있는 간호사분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기에 울상이 저절로 지어졌다.

‘…역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래. 이건 좀 많이 오지랖인 것 같아. 이런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어 봤자 고찬영의 기분만 더 더러워질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엔 비밀은 없으니, 그도 언젠가 배신당한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사대천왕이라고 불릴 정도인데, 그만한 정보가 그의 귀에 안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생각을 마치고 나자, 역시 자신이 할 일은 쓸데없는 일로 여겨졌다. 찝찝하긴 해도 홀가분해진 느낌에 나는 발걸음을 도로 돌려 그 층을 서둘러 빠져나가려는데,

드륵-.

“…….”

“…….”

병실의 문이 열렸다. 나는 떼던 발 그대로 몸이 경직됐다. 옆으로 돌려져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내 옆면이 굉장히 따갑게 느껴졌다. 내 동공이 지진이 인 듯 세차게 떨려 왔다.

“…누가 문 앞에서 자꾸 얼쩡거리나 싶더니.”

한숨 쉬듯 낮은 미성이 중얼거렸다. 이 잘생긴 음성으로 보건대, 문을 연 이가 고찬영 본인이란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스럽다. 설마 당사자랑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보니 내 심장이 긴장으로 쿵쿵 뛰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멍청하게 계속 서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아무 말이라도 꺼내 보잔 심정으로 굳은 입을 열었다.

“그, 저기…!”

“들어와.”

“……응?”

잠깐, 내가 자, 잘못 들었나…?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슬쩍 고찬영을 보았다. 고찬영은 이미 몸을 돌려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재촉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나 보러 온 거 아냐?”

“어, 어어. 마, 맞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그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입원한 병실은 2인실이었다. 게다가 그 옆자리는 공석인지 시트가 씌워져 있지 않고 깨끗했다. 나는 대충 주변을 훑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고찬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렇게 정식으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주시고 말이야.”

냉랭하기 짝이 없는 건조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 말에 품고 있는 내용도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내용이 어쩐지 날 아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모자랑 마스크까지 준비했는데 날 알아본 거야?’

하긴, 어제도 고찬영 친구에게 바로 들킨 걸 보면 내 외형의 특징을 알 사람들은 아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도 내가 저번에 운동장에서 마주친 여학생이란 건 아마 모르겠지…? 그래서 난 그에 반박하지 않고, 모자의 챙 너머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고찬영을 바라보았다.

‘역시 반겨 주진 않겠지.’

그를 이렇게 병원 신세로 만든 건 최강혁이었다. 그리고 최강혁은 도방고등학교 학생이다. 비록 나와 최강혁이 면식이라곤 거의 없다지만, 고찬영의 입장에선 나를 적으로 여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렇게 선을 긋고 있는 게 당연했다. 다만, 그 분위기가 처음 봤던 그와는 전혀 상반된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차올랐다. 학교 운동장에서 보았던 고찬영은 꽤나 유들거리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선지 몸은 저절로 뻣뻣해져 어떤 말을 먼저 해야 될지 몰라 말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의 말이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그 유명한 조커께서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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