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92화 (92/306)

92.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7)

싸늘한 시선이 내게 내려앉았다. 어딘가 숨이 막히는 시선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떡하냐, 이거. 나 완전 경계당하고 있는 거, 맞지…? 난처함에 식은땀마저 주룩주룩 흐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큽.”

그런데, 갑자기 바람 빠진 소리가 그에게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지금, 이건 무슨 상황?

“크흡, 으하학! 윽…!”

누가 봐도 웃음을 참고 있는 모양새에 내가 멍청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결국 참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방금까지 차갑기 그지없던 얼굴은 어디 가고 혼자서 깔깔거리며 웃더니, 이번엔 옆구리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최강혁에게 다친 곳인 모양이었던 것 같지만, 그보단 그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얼떨떨해진 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아, 아파라~. 하하, 진짜 못 해 먹겠다. 천하의 조커께서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니깐 진지한 척도 힘들잖아.”

진지한 척…? 그가 낯에 장난기를 가득 달며 말하는 내용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고찬영은 그런 날 재밌다는 것처럼 바라보면서 천천히 침대 위에 몸을 걸터앉았다.

“그러고 있지 말고 너도 앉아.”

“어, 어….”

얼결에 그의 손짓에 따라 침대 앞에 마련해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고찬영은 그런 날 향해 눈을 휘며 말했다.

“그 유명한 조커 나리께서 이렇게 얌전할 줄이야. 체구도 생각보다 더 작네?”

그가 내 키를 재 보는 것처럼 손을 대충 내 머리 근방에서 휘휘 저어 보였다. 나는 그 행동을 뚱한 눈으로 노려보며 몸을 조금 물렸다.

“작아서 미안하네요.”

안 그래도 키 작아서 서러운데, 꼭 저렇게 콕 집어서 말할 일인가.

“아, 기분 나빴어? 미안, 미안. 딱히 그럴 의돈 없었어.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

고찬영은 내가 기분이 저조해지자, 바로 사과했다. 난 그런 그의 사과에 기분 나빴던 것도 잊고 고찬영보다 더 신기한 기분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렇게 정체 모를 인간이 찾아오면 경계를 하지 않나? 특히, 같은 학교로 추정되는 최강혁에게 깨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면 더더욱 말이다.

“…내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경계를 풀어?”

혹시 천성이 경계가 심하지 않은 타입인가 싶어, 걱정된 마음에 주의를 주자, 고찬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내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 음료수 상자 들고 찾아와?”

딱 들고 있던 상자를 눈으로 지목해 보이는 모습에 바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네. 보통 시비 걸러 오는 사람이 음료수 들고 문병 오진 않지. 나는 변명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다 민망스러워져 입을 삐죽였다.

“그, 그렇지. 근데 보통은 그래도 경계하잖아. 너랑은 처음 보는 사이고, 또….”

최강혁이랑 같은 학교기도 하고. 나는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하지만, 고찬영은 삼켜진 말을 알아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곧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건 맞아.”

그래도 말이지. 고찬영은 내게 눈을 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어제 현호를 도와줬다며?”

“현호? 아, 어제 그 친구 이름이 현호야?”

응? 왠지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지? …기억 안 나는 걸 보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거다. 나는 스스로의 기억력에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걔가 현호야. 어쨌든 고마워. 이상한 놈들에게 걸려서 꽤 골치 아팠다고 하던데. 걔가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던 눈치던걸?”

“어…, 그래? 흠흠.”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감사를 전해 주자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좋게 반겨 줄지는 정말 생각도 못 했기에 더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그리고.”

“응?”

“너 방금 했던 말 중에 하나 틀린 거 있지 않아?”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뭔가 싶어 곰곰이 기억을 뒤지고 있는데,

툭, 하고 모자의 챙이 가벼운 충격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우리 처음 만난 사이는,”

그리고 내가 반응할 새도 없이 고찬영의 얼굴이 훅 다가왔다.

“아니잖아. 서이수 누나 씨.”

고찬영이 내 지척에 다가와 제대로 드러난 내 눈과 마주하며 깊게 미소 지었다. 나는 가까이 있는 그 얼굴에 소리 없이 경악하며 굳어 버렸다. 설마 이리 허무하게 들키다니. 내 주위의 경계가 흩트러진 틈을 타 설마 이 녀석이 이렇게 다가올 줄을 상상도 못 했다.

‘…방심한 내가 바보지.’

감이 좋은 녀석이었다. 그런 이 앞에서 잠시라도 긴장을 놓고 있던 내 실책이 컸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용케 눈치챘네.”

“당연한 소릴. 그때 워낙 인상 깊었어야지.”

고찬영이 뒤로 몸을 물리며 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천진한 웃음이 왠지 배알을 뒤틀리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저 입을 뚱하니 삐죽였다.

“눈썰미 너무 좋은 거 아냐? 이렇게 꽁꽁 싸맸는데.”

“으음~.”

그런데 고찬영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사선으로 치켜뜨더니, 곧 팟, 하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얼굴은 완전 까먹고 있었어.”

“……뭐?”

순간 삐끗했다. 너무 황당해서 입을 벌리며 바라보고 있자, 고찬영이 하하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한번 떠본 건데 바로 넘어오다니. 너도 꽤 순진하구나?”

저 새끼, 한 대 때릴까? 나는 진지하게 부들부들 떨려 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고찬영은 그런 날 눈치챈 건지, 아닌지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뭐, 그것도 있지만, 역시 분위기가 비슷하단 말이지~.”

“분위기?”

“어어. 정태우랑 너 비슷하거든.”

“……정태우?”

설마, 그 정태우가 내가 아는 그 정태우를 말하는 건가? 나는 고찬영의 난데없는 말에 눈이 다 떨려 왔다.

“아니, 대체 어, 어디가…?”

정태우란 녀석은 분명 사대천왕 중 가장 강하기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과 내가 닮았다고? 진짜로?

“음~. 딱 잘라 어디라고 말하긴 힘든데…. 그냥 감이야, 감.”

고찬영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충 말을 흐렸다. 아니, 이게 나 가지고 장난치나? 나는 짜증이 치밀어 이를 꽉 깨물며 녀석을 노려보자, 고찬영과 딱 눈이 마주쳤다.

“오, 이거야, 이거! 이 살벌한 느낌도 닮았어!”

그는 반가운 듯 중지와 엄지를 경쾌하게 부딪치더니, 내 어깨를 팡팡 쳐 댔다.

“얼굴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참 신기하네~. 왜 이렇게 닮았지? 하하.”

“…내가 아냐.”

나는 떨떠름해하며 녀석의 손을 쳐 냈다. 고찬영은 군소리 없이 손을 떼어 내며 하하, 웃다가 곧 차분한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이야? 네가 병문안을 다 오고. 나나 현호가 다친 게 걱정돼서는 아닐 거 아냐?”

“…….”

막상 멍석을 깔아 주니 뭐부터 말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다짜고짜 너 배신당했다고 얘기하면, 퍽이나 믿겠다. 눈을 데록 굴리며 고민하고 있으니, 고찬영이 짓궂은 미소를 씩 그렸다.

“혹시 나한테 첫눈에 반했나? 하긴, 이 얼굴에 반하지 않곤 못 배기…,”

“아니니깐 조용히 해라.”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툭, 하고 고찬영의 얼굴을 가볍게 때렸다. 하지만, 고찬영은 그 가벼운 타박에도 빙글거리며 내 대답을 재촉했다.

“그럼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을까~?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밀했던가~?”

응? 응? 하며 물음표 살인마가 된 것처럼 독촉하는 모습에 나는 인상을 살풋 찌푸렸다. 이 녀석, 진짜 피곤하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 말해 줄 테니깐 그만 물어.”

“오.”

고찬영이 짓궂게 씨익 웃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되나….’

나는 곰곰이 말을 정리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

내 말이 이어질수록 고찬영의 얼굴에 그려졌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종내는 그의 얼굴에 평상시 어려 있던 미소가 모두 증발하고 차가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내가 안경희에게 전해 들은 사실은 이것이었다.

고찬영과 함께 왔던 대다수, 정확히는 이현호를 제외한 인원들이 작정하고 그를 배신한 것. 자세한 내용은 파악이 되질 않았지만 CCTV로 찍힌 내역이나 그들이 했던 말들을 들어 보건대, 그들이 최강혁과 만나기 전 고찬영에게 어떤 음료수를 제공했다. 그리고 고찬영은 그것을 의심 없이 마셨다. 그 후, 어쩌다가 최강혁과 마주친 그들은 그에게 시비를 걸었고, 자연스럽게 고찬영이 싸우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고찬영이 참패를 맛보았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 넌 어떻게 생각,”

“그거.”

아무런 말도 않고 조용히 듣고 있던 고찬영의 표정에선 어떤 의중도 읽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레 그의 마음을 떠보려 입을 여는데, 고찬영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얼마나 믿을 수 있어.”

차분하게 깔린 미성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유쾌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보니, 그 모습에서 큰 괴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패딩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자.”

그리고 갤러리를 뒤져 그에게 어떤 영상을 하나 건네줬다.

“…….”

그 영상은 고찬영의 일행 중 하나가 편의점에서 오렌지주스 하나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그는 새 음료수를 따서 마신 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음료수병에 무언가를 붓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 하, 하하, 하하하하!”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고찬영에게 드디어 반응이 터졌다. 그는 얼굴을 짚으며 헛웃음을 흘리더니, 점점 폭소로 이어졌다.

“하하하….”

그러다 점점 웃음을 사그라트린 그가 까득, 하고 이를 갈았다. 그는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눈동자를 불태우며 그 영상을 노려보며 살벌히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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