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8)
나는 그 말에 황급히 그가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을 뺏어 들며 진정시켰다.
“진정, 진정하자.”
“그럼, 내가 참고만 있으라고?”
고찬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거든. 그냥 죽지 않을 선에서, 네가 감당할 선에서만 처리하라고.”
솔직히 그 녀석들에게 이대로 당하고만 있는 것도 억울하지 않겠나. 내가 걱정했던 건 복수 자체가 아니라 그 복수의 수위였다. 고찬영 별명 중의 하나가 미친 들개였던가? 혹시나 이 녀석이 이 사실을 알고 고삐라도 풀려서 정말 피바람이 일까 걱정됐다. 실제로 지금 그의 눈이 반쯤 돌아갈 것 같은 게 내 예감이 마냥 틀린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나와 관련도 없는 타인인데 이렇게 신경 써 주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이왕 간섭할 거 좋게 좋게 끝나면 좋지 않겠는가.
“……허.”
고찬영도 이런 내 오지랖이 어이없었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허,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핰!!”
그러다가 그 웃음이 폭소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고찬영은 아픈 옆구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웃음을 좀체 멈추질 못했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겨우 잦아들 때쯤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유쾌히 미소 지었다.
“너 진짜 대박이다. 그 녀석들이 싸고돈 이유를 알 거 같아.”
싸고돌아? 누가? 누구를…? 이상한 말에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리자 고찬영이 히죽 웃어 보였다.
“나라도 그랬겠어, 정말. 하하. 진짜 재밌다, 너.”
그러곤 그는 내게 슬쩍 다가와 눈을 휘며 내 눈과 마주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엇.”
…그러고 보니, 나 제대로 된 통성명도 안 했구나. 마음만 앞섰다 보니 정작 중요한 걸 완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서이나. 나이는 열여덟.”
“오. 나랑 동갑이네.”
그건 안경희에게서 이미 들었던 정보라 알고 있었다. 어차피 연상이든 연하든 서로 존대 따윈 저 멀리 집어던진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한 살 정도의 나이쯤은 별문제도 아니었을지도. 그저 호칭만 바뀌었겠지만…, 만약 이 녀석이 한 살 더 많았어도 그다지 오빠라는 말이 잘 안 나왔을 것 같았다.
“그럼 나랑 친구나 할까?”
“……?”
아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저절로 얼굴이 떫어지는 내용에 슬쩍 몸을 물리며 녀석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찬영은 하하 웃으며 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 마음에 들어. 우리 친구나 하자. 응? 친구님?”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니, 저 자식이? 아주 자기 미모를 십분 발휘하는 자태에 순간 벙쪘지만 바로 정신을 수습한 뒤 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난 그만 간다.”
모자와 마스크를 다시 쓰며 옷매무새를 정돈하자, 고찬영도 같이 일어서며 내 뒤를 따라붙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나랑 친해져서 나쁠 건 없을걸? 응? 응?”
“다른 사람한테나 그런 수작 부리시죠. 고찬영 씨.”
“다른 사람 말고 당신한테 부리는 겁니다. 서이나 씨.”
…아니, 친구 되는 거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나올 일인가. 잠깐, 생각해 보니 진짜 어이없네? 보통은 저 대사 대목에선 여자 친구가 되어 달란 말이 나오잖아. 근데 나는 그냥 친구야…? 새삼 자신의 매력 없음에 몰래 한탄하면서도 저런 망언을 내뱉은 고찬영을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뭐가 문젠지도 모르고 무해한 웃음을 해맑게 지으며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이 세계가 문제인 건지, 내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네.’
이쯤 되면 이곳에 사는 모든 미남들은 이런 무자각 플러팅이 유행인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희생자가 나인 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왠지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진 난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오늘만 볼 사인데, 무슨. 잘 내려가고, 다치지 마라.”
“와, 진짜 이렇게 간다고? 나 진짜 섭섭하다. 우리의 우정이 이 정도야?”
우리가 언제 우정을 논할 사이였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자, 고찬영이 씨익 웃었다.
“친구가 되어 주면 네 정체 입 다물어 줄지도 모르는데~.”
“…….”
아뿔싸. 이 녀석이랑 너무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보니,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맞아. 나, 조커라고 이름 날리고 있었지. 이렇게 중무장하고 온 것도 다 그거 때문이었는데…! 고찬영이 하도 조커에 대해서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뉘앙스라 나도 저 멀리 한편에 던져 버린 탓이 컸다. 뒤늦게 짙은 낭패감이 찾아와 이마를 짚고 있자, 고찬영이 그런 내게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네. 입 막음 비용은 이쪽입니다~.”
그가 내민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친절하게도 다이얼 앱까지 들어가져 있는 게 번호를 찍으라는 압박마저 느껴졌다.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그것을 건네는 고찬영을 보며 생각했다.
‘나, 이번에도 잘못 걸렸나 봐.’
반휘혈과 그 친구들, 그리고 이윤, 게다가 이번엔 전 사대천왕까지 제대로 엮이게 생겼다. 아니, 이미 늦어 버렸을지도….
나는 결국 옆에서 반짝이며 웃는 놈을 흐린 눈으로 외면하며, 어쩐지 초췌해진 기분으로 번호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고찬영에게 휩쓸려 번호를 주고받게 된 주말이 지나고 다시 평일이 찾아왔다. 정말이지, 저번 주는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굉장히 피곤해진 난 체육관에서 제대로 된 운동도 못 하고 집에서만 가볍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 싶다아아….”
나는 교실 책상 위에 엎어져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저, 저기, 이나야.”
“응?”
그런데 옆에서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피로한 눈을 문지르며 엎드린 상태로 올려다보자, 안경희가 어쩐지 불안한 모습으로 문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보….
“너, 보러 온 것 같은데….”
“…….”
그러게. 내 생각도 그런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난 어떤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역시나, 내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내 뜻대로 흘러가질 않았다. 이유는 문가에서 빼꼼거리며 눈을 과도하게 빛내고 있는 솜사탕 머리 때문이었다.
“쟤가 아침부터 왜 저기 있어….”
아침부터 있을 수 없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선지 머리가 쉬이 돌아가질 않았다. 그렇게 굳어 있자, 나와 눈이 마주친 이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손을 흔들어 댔다. 그 모습에 반 아이들 몇몇이 심장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외면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누나!”
“아침 댓바람부터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자 이윤이 기쁜 마음을 감출 생각도 안 하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하지만, 그만큼 인사해 줄 기력이 없던 난 퀭한 눈으로 이윤을 바라보았다.
“저, 누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서요!”
“어, 어…. 뭐, 뭔데.”
얘 입에서 대체 무슨 말이 나올지 벌써부터 걱정이 들었다. 아, 차라리 자리를 옮길걸. 아침이라 머리가 돌아가질 않아 처신이 미흡했다. 나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머리를 감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헤헤. 저기 말이죠~. 이번 주말에 저희랑 놀지 않을래요?”
…거봐. 역시 자리를 옮겼어야 했어!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저희, 저희라니! 이 뜻은 그거 아닌가! 이윤이 같이 노는 무리들이 누군가. 바로 그 최강혁, 다정한, 서강이를 말하는 거잖아…!!
“거절할게.”
상상도 하기 싫은 조합이었다. 정색하며 대답하고 싶은 걸 주변 눈치 때문에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는 친절까지 발휘하며 답해 주었다. 그러나 이윤은 내 대답이 꽤나 실망스러웠는지 바로 울상이 되며 내게 매달렸다.
“왜요? 분명 재밌을 거예요!”
“바빠서 안 돼.”
“뭐 하는데요? 아, 그럼 제가 누나 있는 곳으로…!”
“오지 마.”
네가 오면 무슨 사달이 일어나려고. 내 주말 루틴은 보통 집-체육관-집이었다. 집에 놀러 오는 것도 골치 아픈데, 만약 체육관에 온다면?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삐져 있는 놈한테 기름 부을 일 있나.’
여기서 이 녀석을 허락하면,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그 신비한 존재인 시프라는 양반과의 연이 중요하다지만, 이미 친하게 지내고 있는 녀석들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이전보다 단호하게 거절을 보이자, 이윤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럼 전 누나랑 언제 놀아요?”
크윽, 크헉! 애처롭게 고개를 떨군 이윤의 공격력은 굉장했다. 주변에서 남녀 상관없이 신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으나, 이 사건을 발생시킨 당사자는 신경도 쓰질 않고 있었다. 난 이 기괴한 현상에 먼 산을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 말이야. 내 위치도 조금 신경 써 줘라….”
“누나 위치요?”
이윤이 내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내가 누구랑 친한지 잊어버린 거야?”
“아. 그거요? 그게 왜요?”
이윤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들은 걔들이고, 저는 저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무슨 상관이긴. 아주 질척질척한 상관관계가 있고말고. 인간관계라는 고도의 탐색과 심리전이 오가는 그런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