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94화 (94/306)

94.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9)

하지만 이 모든 걸 구구절절하게 말하기엔 장소도 적당하지 않거니와, 되도록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학교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한도훈 그 녀석이 또 얼마나 삐질지…. 한숨이 저절로 푹 나왔다. 피로한 눈으로 이윤을 보다가 대충 손을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렸다.

“아무튼 나 바빠. 그럼 안녕.”

“앗!”

뒤에서 이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보고 있는 반 아이들의 시선만은 똑똑히 보였다. 시기와 질투, 신기함 등등 여러 복잡한 시선들이 날 향하고 있었다.

‘이걸 졸업할 때까지 겪어야 한단 말이지….’

새삼 모든 여주인공들의 담력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어떻게 이런 압박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냥 평범하게 친분이 있는 정도인 나도 벌써부터 지치는데. 이성적으로 남주와 그 관계자들까지도 얽혀 있는 여주는 어떤 심정으로 이 모든 걸 감내했었던 걸까. 역시 전부 여주인공이라 가능했던 건가?

‘어쨌든 나는 아니야.’

개학한 지 겨우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지치는 기분이었다. 학교라는 공간이 원래부터 이렇게 부담스러웠던 공간이었나 싶을 정도다. 이전엔 가벼운 관심이었다면, 요 근래엔 그 무게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럼 그 애는 괜찮으려나?’

책상에 앉자, 문득 지난주 목요일에 봤던 여자애가 떠올랐다. 얼굴은 확실히 예뻤지만, 분위기가 평범했던 그 아이. 정황상 내 느낌이 말하건대 그 아이가 여주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최강혁과 여자애. 그리고 반휘혈.

아직 반휘혈과는 어떻게 연결될지 감이 안 왔다. 누가 봐도 -_-^를 연상케 하는 최강혁의 이미지 덕에 반휘혈이 서브남주일 가능성만 더 높아졌다. 어쩐지 한도훈이나 이재현, 김시원 모두 알면 알수록 인소의 주역들치곤 2퍼센트 부족한 감이 있더라니.

처음엔 셋 다 잘생기긴 했지만, 반휘혈만큼 눈에 확 띄는 인물들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과 오래 교류할수록 점점 인소 속 사대천왕의 이미지에 대한 거리가 멀어져만 갔다.

우선 한도훈. 이 녀석은 귀여운 매력이 있긴 하지만, >-< 라고 하기엔 속이 너무 음흉했다. >-<는 자고로, 백치와도 같은 귀여움이 매력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윤처럼 말이다.

그다음은 이재현. 이재현은 친절하고 다정한 아이다. 하지만, ^-^라고 하기엔 싸움을 꽤 피하는 구석이 있었다. 오히려 싸움판은 어쩔 수 없이 끼어든 느낌이 강했다. 내가 아는 ^-^는 싸움을 그리 즐기진 않아도 걸어 오는 싸움은 피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즉, 싸움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그 중간에 위치한 존재였다. 얘기를 들어 보면, 원래 고찬영과 싸우기로 예정된 건 다정한이었다고 했다. 딱히 나서려고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는 고찬영 패거리를 학교에서 빨리 해산시키기 위해 스스로 나섰다고 하니 이런 면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시원. 그 녀석은 참 과묵한 아이였다. 그나마 -_-란 성격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난 서강이란 녀석을 보자마자 내 생각을 바로 수정해야만 했다. 잠깐 마주친 것뿐이지만, 복도에서 마주친 내내 공기처럼 가만히 벽에 기대어 잠만 자다니! 정말 -_-의 성격을 갖다 붙인 것 같은 서강이의 자태에 김시원도 2퍼센트 부족한 놈이었단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종 결론은, 반휘혈이 서브남주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단 사실이었다.

‘으. 솔직히 남주길 바랐는데. 아니면, 완전 외부인이나.’

그렇지만, 외부인인 경우는 이미 시프를 만날 때부터 저 멀리 치워지긴 했었다. 그래서 이왕 제대로 엮인 거 여자 주인공이랑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싶어 남자 주인공이길 바랐다. 그런데 웬걸. 앞으로 굴러도, 뒤로 굴러도 빤히 보이는 인소 속 주인공들이 버젓이 있네…?

‘차이면…, 위로나 해 줘야지.’

벌써부터 부정적인 결론이 내려졌다. 미안하다, 휘혈아.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각박한 걸 어쩌겠니. 그런 생각을 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책상 위에 올려 둔 문제집을 바라봤다. 아직 이뤄지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사실이 다가올 걸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착잡해져 글씨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할 수도 없었다. 날려 버린 약 한 달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글자들을 머릿속으로 쑤셔 넣어야만 했다. 그렇게 난 자습 시간 내내 들어오지도 않는 내용들과 눈싸움을 했다.

***

“으읏-차.”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나는 굳은 몸을 풀기 위해 가볍게 기지개를 쭉 켰다. 오늘은 지난주보단 조용한 하루였다. 혹시 강경하게 모든 질문을 거절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비록 피곤했던 주간이었지만, 열심히 대처했던 결과가 꽤나 흡족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관심이 사그라든 건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이 줄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지난주에 비해선 확실히 넉넉하게 느껴졌다. 누구 하나 스트레스받을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가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식사 순번이 되길 기다렸다가 친구들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늘 점심 뭐지?”

“참치 비빔밥이랑 닭강정! 그리고 후식으론 젤리!”

“대박.”

나는 출출한 배를 부여잡다가 이름만 들어도 맛있는 급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혜인과 안경희도 꽤나 눈이 반짝거리는 게 굉장히 들떠 보였다. 나는 그 마음에 동조하며 새삼스레 중얼거렸다.

“역시 돈이 최고긴 하구나….”

사실 개학 당일부터 우리 학교에 커다란 변화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급식의 대대적인 개편이었다. 재벌 집 아들들이 여럿 입학해서 그런지 급식의 질이 수직 상승을 해 버렸다. 덕분에 앞으로 닥칠 갑갑한 미래에 골머리를 썩다가도 급식 얘기만 나오면 저절로 마음이 풀어지는 기현상이 일어났지만, 원래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겠는가. 배부터 채워야 뭘 하든 말든 하는 법이었다.

“빨리 와~!”

“알았어!”

맛있는 밥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그래서 신나게 친구들과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니깐 어떤 여자애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피하며 걷다가 나도 모르게 복도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너머를 슬쩍 보았다.

“응?”

의식도 못 한 사이 내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다. 그도 그럴 게, 친구를 기다리게 만든 여자애는 다름 아닌 여주로 추정하고 있던 그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이 놀라운 우연에 잠시 당황해 눈을 크게 뜬 순간, 그녀가 지나가던 1학년 4반의 뒷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으앗!”

“…….”

그리고 동시에 퍽, 하고 여자애가 어떤 남자애와 강하게 부딪혔다. 나는 그 절묘한 타이밍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문득 그 뒷모습이 꽤나 익숙하단 걸 깨닫곤 더 기겁했다.

‘…휘혈이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저 커다란 장신과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미남임을 외치는 등짝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를 알아보곤 입을 떡 벌렸다.

“왜 가다가 멈춰?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잖아.”

내 정신을 일깨운 건 뒤이어 나오는 한도훈 때문이었다. 그의 못마땅한 툴툴거림이 귀에 박히자 나는 퍼뜩 정신을 수습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벽에 붙어 서서 모습을 감췄다.

“이나야, 왜….”

“쉿…!”

나는 의아한 듯 바라보는 이혜인을 잡아서 나처럼 벽에 숨기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혜인과 안경희는 내 말에 따라 주긴 했지만, 호기심을 참을 순 없었는지 조심스레 벽 너머를 확인했다.

“어?”

“헉. 쟤, 쟤 반휘혈 아냐…?”

안경희와 이혜인은 그 정체에 놀란 듯했다. 하지만, 안경희는 곧 놀란 것과 달리 금방 침착해졌고, 오히려 이혜인이 안달복달한 것처럼 발을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어떡해, 진짜 뒤태 비율 쩔었다! 와, 나 진짜는 처음 봐! 하며 속닥속닥 말하지만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두 사람의 그 상반된 반응이 의외라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안경희에 대한 인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그녀가 일진에 대해 관심이 많은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럼 그 방대한 정보는 대체…? 나는 잠시 의아해졌지만, 그보단 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중요했기에 잠시 관심을 끄며 난 온 신경을 저편에 집중시켰다.

“미, 미안해. 내가 앞을 제대로 못 봤어.”

“…….”

“어, 어…. 호, 혹시 다친 거야?”

여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는 반휘혈의 태도에 불안했나 보다. 점점 여자애의 안색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하긴, 휘혈이 쟤가 말없이 내려다보면 또래 애들은 금방 기죽긴 하겠다.

지난날, 날 향해 침묵하며 바라보던 반휘혈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안쓰러워지려던 중, 한도훈이 가만히 서 있는 반휘혈이 이상한지 고개를 불쑥 내밀며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뭐야, 왜 안 가고 있어? 얜 뭐야, 아는 사이야?”

그런데 한도훈의 말투에서 꺼림칙한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나는 그런 한도훈의 반응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쟤가 원래 남한테 저렇게 까칠했나?’

요즘 삐져 있어서 그렇지, 첫 만남부터 내겐 굉장히 살갑게 굴어 왔던 한도훈이었다. 그래서 그 시큰둥하면서도 불쾌함이 남아 있는 태도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아니.”

한도훈을 새삼스레 다시 보던 중, 드디어 반휘혈이 입을 열었다. 그러곤 그는 관심이 없단 것처럼 방향을 꺾어 내가 있는 방향과 정반대 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한도훈도 원래부터 흥미를 별로 가지질 않았는지 바로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와, 와, 대, 대박, 대박! 미쳤다, 미쳤어! 너 완전 계 탔다! 로또 사야 되는 거 아냐?! 진짜 부러워, 어떡해, 어떡해!!!”

그들이 사라지자 여자애의 친구로 보이는 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여자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여자애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방금 걔네들 유명한 애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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