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11)
비명 같은 외침으로 고찬영의 말을 반박하자 고찬영은 맹랑하게 짝이 없는 낯으로 뻔뻔스레 말했다.
“뭐긴, 뭐야. 우리가 지난주부터 끈끈한 사이가…,”
“이수야, 사무실에 아빠 계시냐.”
“아니. 잠깐 나갔어.”
“문 잠가.”
서이수가 내 명령과 동시에 말없이 문을 잠갔다. 고찬영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야, 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질문을 무시하며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야, 적당히 해라.”
마지막 경고였다. 더 나불거리면 바로 저 앞에 있는 링까지 데려가 줄 심산이었다.
“호오…. 적당히 안 한다면?”
그런 내 의중을 파악했는지 고찬영은 나를 내려다보며 호기롭게 웃었다. 눈이 휘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도발.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였다. 나는 그 미소에 피식, 하고 입꼬리를 올려서 돌려줬다.
비록 경고의 의미로 던진 말이었으나 상대방이 이렇게 당당히 받아들였다. 게다가 그는 전 사대천왕. 생각해 보면, 오랜만에 맞붙는 호적수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잠재워진 호승심을 끌어올리려는데,
“…는 농담! 항복할게! 그러니깐 좀 봐주라~.”
그의 해맑은 항복 선언에 순간 삐끗하며 자세가 무너졌다.
“야, 이…!”
“하하. 방금 꽤 살벌하니 오랜만에 저릿저릿했어. 나도 아깝긴 한데 실은 전에 당했던 상처가 덜 나았거든. 그 상태에서 무리를 좀 했더니 몸 상태가 영~ 시원찮아서 말이지! 그러니깐 우리 이 건은 다음 기회로, 다음 기회로~.”
고찬영이 발끈하려던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넉살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는 주먹을 부들거리다 말고 들려온 내용에 황당히 그를 쳐다보았다.
“무리를 했다고?”
“응.”
나는 그게 무슨 뜻인가 물어보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이 퇴원하자마자 무리를 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분명 자신을 배신한 이들에게 복수한 일이 틀림없을 터였다. 그런 걸 눈치 없이 물어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고찬영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뒷목을 성의 없이 주무르곤 자리를 비켰다.
“적당히 몸 사리면서 다녀. 나중에 병난다.”
“걱정해 주는 거야? 이거 좀 감동인데?”
그를 지나쳐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충분히 웃음기가 배어 있어 그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별게 다 감동이다.”
그러곤 잠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향했다.
***
“흐음~.”
고찬영이 콧노래를 짧게 흘렸다. 그의 시선은 닫힌 여자 탈의실의 문. 그곳은 방금 서이수의 누나인 서이나가 향한 방향이었다. 서이수는 그런 그를 보며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이마를 짚었다.
‘홀렸네, 홀렸어.’
누나의 또 다른 희생자가 나타나 버렸다. 이번엔 그 사대천왕, 아니, 이제는 ‘전’이긴 하지만, 아무튼 또 거물을 낚은 서이나의 포용력에 혀가 내둘릴 지경이었다.
“서이수, 맞지?”
그런 생각을 할 때, 고찬영이 서이수를 불렀다. 서이수는 설마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고찬영은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 되게 좋은 누나 뒀더라?”
이거 참, 부럽네, 부러워~, 하며 고찬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서이수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가 곧 날카롭게 대꾸했다.
“무슨 수작질이야?”
“수작질?”
“그래.”
서이수는 누나의 칭찬을 들으니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매가 점점 날카로워지던 중, 고찬영이 풋, 하며 웃음을 가벼이 터트렸다.
“푸흡, 큭, 아하하핰!! 너 진짜 재밌다! 수작이라니!! 으하하하하!!!”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웃고 지랄이야!”
퍽, 하고 가벼운 타격음이 고찬영의 옆구리 쪽에 들렸다. 하지만, 공격한 서이수의 얼굴은 전혀 시원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똥 씹은 얼굴로 고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게다가 고찬영은 전혀 아프지 않은 것처럼 여유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를 진정시켰다.
“워워~. 진정해, 진정. 나 여기 싸우려고 온 거 아니니깐.”
그도 그럴 것이, 고찬영의 옆구리엔 서이수의 주먹을 막고 있는 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뻗었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이수는 자신의 주먹이 막히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는 한편, 역시 ‘전’이라고 할지라도 사대천왕이라고 불릴 만한 실력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이수는 결국 혀를 차며 거리를 벌렸다. 고찬영은 그에게 잘했다는 것처럼 싱긋 웃었다.
“아무튼 그런 거 아냐~, 그런 건~. 물론 사귀고 싶어서 수작 부릴 순 있겠지만, 그래도 쟤는 아니야.”
“…잠깐. 우리 누나가 어디가 어때서?”
이번엔 다른 의미로 기분이 나빠졌다. 서이수는 대번에 얼굴을 확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듯 그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고찬영은 그의 반응에 아차 싶었다. 방금 그건 자신이 생각해도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평소라면 그다지 번복하거나, 딱히 변명 같은 말을 주절거리진 않겠지만 실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 친구의 동생에겐 미운털이 박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난처하게 웃으며 자신의 말을 해명했다.
“그니깐 말이지~. 이나가 매력이 없단 게 아니라~.”
“뭐?”
그럼 매력을 느꼈단 말이잖아! 서이수의 표정을 갈수록 험악해졌다. 고찬영은 그런 그를 보며 굉장히 귀찮아졌지만 꾹 참으며 말을 이어 갔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봐. 그게 아니라, 난 그만큼 쟤랑 오래오래 알고 지내고 싶단 뜻이라고.”
“뭔 소리야, 그게.”
서이수는 수수께끼를 들은 사람처럼 아리송해졌다. 고찬영은 그런 그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난처하게 말을 이었다.
“연애란 게… 그렇잖아? 헤어지면 아무리 좋았어도 연락하고 지내기 좀 그런 거.”
무엇보다 고찬영의 여성 편력은 그리 좋게 좋게 회상할 내용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을 일일이 고할 생각은 없던 그는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튼 그런 거야. 친구, 좋잖아? 하하.”
“…….”
서이수는 어쩐지 납득이 가면서도 납득이 가질 않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을 다 떠나서 결론은 이거였다. 고찬영은 서이나에게 여자로서 매력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다, 란 것이다. 서이수는 고찬영에 대한 소문을 여럿 들은 적이 있다. 특히, 화려한 여성 편력은 고찬영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양다리를 걸쳤다든가, 여자를 가지고 놀았다든가, 하는 그런 저질스러운 내용들이 주력이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서이수의 눈이 다시 첨예하게 세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참 난감하네~.’
고찬영은 그가 자신을 확실하게 의심한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 됐든 간에 현재의 그는 서이나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잘 부탁해. 동생~.”
“…누가 잘 부탁한대?!”
이 녀석이랑은 싫어해도 자주 볼 관계였다. 그러니 고찬영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러자 고양이가 낯선 이에게 발톱을 세우는 것처럼 서이수가 경계를 하며 거리를 확 벌렸다. 고찬영은 그런 서이수의 모습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자신이 오해를 받는 상황은 익숙했으니 말이다.
***
“너 아직도 안 갔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역시나 고찬영은 체육관에 있었다.
“그런 섭섭한 말 하지 마~. 친구끼리 너무 서운하다, 야~.”
“아니, 그니깐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 아니, 아니다, 됐다, 됐어.”
그의 말을 수정해 주기 위해 입을 열려 했으나,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졌다. 게다가 광주에서 여기까지 온 정성으로 보아 저 생각을 수정할 기미도 전혀 보이질 않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포기했다. 뜻하지 않게 친구가 생겼지만, 이걸 좋아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 인생 노선이 더 화려하게 꼬였다는 사실인지라 나는 입 안에서 쓴맛을 감내해야만 했다.
‘게다가 쟨 또 왜 저래….’
게다가 서이수가 하악질 하는 것처럼 경계하는 모습마저 보이니 대체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가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눈짓으로 그런 둘을 보고 있자, 그것을 눈치챈 고찬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흠.”
나는 그 말에 잠시 의심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고찬영의 말대로 그는 정말 어떤 일도 안 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서이수가 제대로 발끈하면 상대가 누군지를 막론하고 부딪히는 몹쓸 버릇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건드렸어도 그냥 넘길 수준의 장난이 다였을 확률이 높았다.
“어? 믿어 주는 거야?”
“안 믿어 줄 게 뭐 있어?”
그런데 내 심드렁한 답을 듣자 오히려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난 그 기묘한 질문에 되레 더 이상하단 듯 바라보고 대꾸해 주며 시큰둥하게 그를 지나쳤다.
“나 운동할 거니깐 방해하지 마.”
“…어, 어. 아! 나 옆에서 구경만 할게, 그럼!”
나는 오지 마, 라고 한 소리 하려 했으나 그의 얼굴을 보곤 말이 막히고 말았다. 어째선지 고찬영이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밝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운동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고 싶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건 알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가 이상해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왠지 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찬물을 끼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왠지 애한테 몹쓸 짓을 하는 어른이 될 것 같았다. 결국 난 하는 수없이 떨떠름하게 승낙했다.
“…나 말 걸어도 안 받아 줘.”
“하하, 걱정 마. 진짜 끝날 때까지 알아서 조용히 구경할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