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이런 인기는 필요 없어! (12)
어라,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낯설지가 않다. 왠지 데자뷔란 걸 체감한 느낌이었다. 대체 언제인가 떠올려 보니, 과거 한도훈이 저런 식으로 다가왔던 게 떠올랐다.
“어휴.”
그러고 보니, 결국 이번 한 주간 한도훈과 반휘혈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해 보질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야자하는 학생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겠는가. 교내에서 대화를 한다? 끔찍한 소리다. 안 그래도 그들과 친하다는 이유로 주목받고 있는데 생각 이상으로 친한 모습을 보인다? 아주 길길이 날뛰면 지금 이상으로 내게 달려들 게 뻔했다.
‘그렇다고 계속 대화를 안 할 수도 없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점점 사이가 멀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이 세계의 운명 어쩌고에 덜 엮이고 싶다 해도 그 두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걸 원하진 않았다. 한도훈이야 오늘 체육관에 오면 만날 수 있다고 쳐도, 반휘혈은? 역시 직접 불러내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며 줄넘기를 넘었다.
‘봐서 뭐라고 말하지?’
내가 먼저 사과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진짜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그냥 이윤과 번호를 주고받고, 하교 같이 안 해 줬다고 이렇게 삐질 일인가? 누가 보면 진짜 내가 몹쓸 짓을 저지른 줄 알겠다. 만약,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나 않지. 나는 팔 굽혀 펴기를 하며 억울함에 이를 아득, 깨물었다.
‘내가 다 봐줘야 하는 일인가? 이게 정말 맞는 거야?’
그래도 계속 방치할 순 없단 생각에 마음을 좀 더 넓게 가져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오냐오냐해 줬다간 훗날에 애들 버릇 더 나빠질까 염려스러웠다.
‘그럼 어떻게 해야…,’
“에잇.”
팔 굽혀 펴기를 마치고 몸을 일으켜 다음 운동을 하려던 중, 불쑥, 내 미간을 건드리는 손이 하나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 손길을 재빠르게 피하자 그 손의 주인이 오오,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한데? 나름 회심의 기습이었는데.”
“…뭐, 뭐야?”
그 손의 주인공은 고찬영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상황 분간을 못 하다가 곧 그가 이 체육관에 와 있었고, 내 운동을 지켜보겠다는 선전 포고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무리 깊게 생각해도 그렇지, 얘가 온 걸 잊고 있었다니. 스스로의 안일함에 속으로 혀를 차며 뒷목을 주무르며 물었다.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뭔데?”
“뭐긴 뭐야. 네 미간 이~렇게 살벌해서 펴 주려 했지.”
고찬영은 방금의 내 모습을 재현하려는 것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리다가 이내 파앗, 하고 웃어 보였다.
‘…내가 저랬다고?’
그러나 그 잠깐의 시간으로 내가 얼떨떨해지기엔 충분했다. 고찬영이 지은 표정대로라면, 난 굉장히 화난 얼굴을 지은 게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깊어지면서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된 모양이었다. 주변을 힐긋 보니, 체육관 문을 열고 어느새 도착한 회원 몇몇이 이쪽을 슬쩍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곤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피해 버렸다.
진짜구나. 나는 그들의 반응에 고찬영이 내 표정을 최대한 재현해 줬음을 깨달았다. 아니, 아마 미화된 거겠지, 저건. 얼굴이 잘나서 그런지 순간이긴 했어도 위압감만 줄 뿐, 그리 못나 보이진 않았다. 예전에 대체 내가 화나면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몰라 서이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녀석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빠가 화낼 때랑 똑같던데.’
아니, 그 정도라고? 하며 반박하려 했지만, 곁에 있던 엄마도 같이 수긍해 줘서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자각했었다. 아무튼 내 표정이 살벌하게 구겨졌음을 깨달은 난 얼굴을 문지르며 굳은 인상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러자 그런 날 빤히 보던 고찬영이 호기심이 어린 눈길로 내게 얼굴을 살짝 드밀었다. 나는 그 가까워진 잘난 얼굴이 조금 부담스러워 몸을 살짝 물리며 대답했다.
“알아서 뭐 하게.”
“뭐긴.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려고. 일종의 은혜 갚기?”
그러나 고찬영은 내가 멀어진 만큼 훌쩍 다가오더니, 말릴 새도 없이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어쩐지 사무실 쪽 문에 서 있던 출근한 아빠와 서이수의 눈길이 홱, 하고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의 눈이 살벌하게 고찬영을 노려봤으나 고찬영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건지, 그냥 무시를 하는 건지 모르게 싱글벙글 웃은 채였다.
…근데, 아빠는 그렇다 쳐도 서이수 쟤는 진짜 왜 저래? 답지 않은 동생의 모습에 의아함이 들었지만, 곧 신경을 끄며 고찬영의 팔을 가볍게 치웠다.
“너랑은 관계없는 일이야.”
“하하. 관계없는 내게 오지랖을 부린 누구 씨가 할 말은 아니네.”
씁. 이 자식, 할 말 없게 만드네…?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녀석을 조용히 째려봤다. 하지만, 고찬영은 일절 타격받은 기색 없이 싱긋 웃으며 다시 내게 팔을 기대며 속삭였다.
“혹시 모르잖아. 내가 네게 원하는 답을 해 줄지?”
매력적인 중저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 나긋한 목소리가 왠지 목덜미를 소름 돋게 만들어 팔을 북북 쓸며 거리를 벌렸다. 고찬영은 이번엔 그런 날 잡지 않고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마치 내가 답을 들려줄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왠지 그 모습이 굉장히 재수가 없어서 난 불쑥 중얼거렸다.
“일진들은 다 이렇게 재수가 없나?”
나도 모르게 말해 놓고 당연한 소릴 내뱉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지척에 있던 고찬영도 틀림없이 들었다. 분명 또 사람 속을 긁어 놓는 소리로 반박할 거라 예상하며 긴장했다.
“하하. 그런 소리 자주 듣긴 해. 물론 대부분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의외로 고찬영은 내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긍하며 넘어가는 기색에 벙찐 건 나였다. 뭐지? 기분 안 나쁜가? 보통 이런 소릴 들으면 기분이 상해 뭐라 하는 게 태반이었다. 그런데 고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하기만 했다. 왠지 그 모습이 석연찮게 다가왔지만, 정확히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 결국 입을 다물며 그 의문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래?”
고찬영은 여전히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굽힐 의지가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런 경우는 차라리 그 또래 남자애한테 상담하는 게 더 낫긴 하지.
서이수나 이재현, 김시원에게도 상담해 보았지만 그들에게선 적당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오히려 나와 같이 곤혹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차라리 이렇게 완전 제3자인 이에게 조언을 구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실은 말이지….”
그래서 난 그를 구석으로 이끈 후, 조심스레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간단히 꺼내기 시작했다.
***
“호오. 그러니깐 그 반휘혈이랑 그 재수 없는 놈이 그랬다고?”
재수 없는 놈…? 아니, 한도훈 이미지가 왜 그래?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관계가 형성된 것 같은 단어 선정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그 이미지도 한도훈에게 적합하단 생각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걔네 둘 풀어 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왠지 입 밖으로 말하니깐 기분이 팍 상했다. 그 녀석들은 알까? 내가 그들과의 관계를 이렇게나 소중히 여김을. 혹시 이 관계를 지키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 거 아냐? 생각을 거듭할수록 저조해진 기분에 입을 꾹 다물며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렸다. 고찬영은 그런 날 말없이 곰곰이 쳐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 진짜 호구구나?”
뭐, 인마?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욕에 고개를 대번에 치켜들었다. 고찬영은 그런 날 한심하단 듯 바라보며 혀를 차기 시작했다.
“뭘 그런 걸로 고민해? 누가 봐도 네 잘못이 아닌데. 잘못한 놈이 고개 숙이고 들어와야지, 네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잖아.”
사람이 너무 좋네, 좋아. 하며 고찬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댔다. 나는 그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부루퉁하게 입을 삐죽였다.
“내가 사람이 너무 좋은 게 아니라, 보통 사이 틀어지면 이런 고민은 하거든?”
“아, 그래? 그런 쓰잘데기없는 고민을 왜 하는지 모르겠네, 정말.”
고찬영은 그런 생각을 하는 보통 사람에겐 일절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 왠지 그게 고까워서 노려보고 있자, 고찬영은 가볍게 콧바람을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화 만들 거리면 되는 거야?”
“어?”
“결국 걔네들이랑 대화하고 싶단 거잖아.”
“뭐어…. 그렇지.”
고찬영이 내린 결론에 나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수긍했다. 왠지 기분이 내키지 않아 보이던 그는 잠시 턱을 쓸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돌연 씩 웃었다.
“그럼 내 말대로 할 거야?”
“뭔데?”
“내 말대로 할 거냐고. 대답해 주기 전까지 말 안 할 거야.”
“…….”
뭐지, 이 불길함은. 왠지 이걸 허락하면 굉장히 귀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울렸다. 나는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내 의심을 눈치챈 고찬영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뭐, 적당히 좋은 생각 있으면 말고~.”
어차피 자신은 도와주면 그만이고, 아니면 그만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그의 모습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젠장, 왜 듣고 싶지?! 악마의 속삭임이란 걸 알면서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겐 이 녀석의 생각을 듣는 것을 제외하고 좋은 방향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현실이었다. 정말이지, 이윤에 이어 골치 아픈 인간관계가 새로이 형성됐음을 다시 새기는 순간이었다.
‘왜 나는 이런 유형만 꼬이는데! 이런 인기 필요 없어…!’
빙의자 혹은 차원이동자임에도 특혜 받지 못한 것 같단 감각이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크윽. 아, 알겠어! 알겠다고!”
끝내 난 항복했다. 고찬영은 내 대답과 동시에 환하게 웃었다. 승리를 알리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