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99화 (99/306)

99.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단순하다. (2)

“진짜, 네가 왜 여기에 전학을…, 아니, 그보다 너 퇴학당할 뻔했다며.”

“응? 그거 어디서 들었어? 아는 사람 엄청 적을 텐데.”

누나가 그런 실수를? 그런 인간이 아닌데? 고찬영은 내 말에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그 반응에 아차, 싶어졌다.

젠장, 말실수했다.

이 녀석이 갑자기 전학을 온 것만으로 당황해선지 필요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변명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몰라도 돼.”

“와, 진짜 수상해.”

“…진짜 수상한 건 너거든?!”

무슨 꿍꿍이로 이 학교에 온 건지 당장 대답하라고 협박하듯 윽박을 질러 주자 고찬영이 바로 손을 앞으로 뻗으며 거리를 벌렸다.

“아, 진정하라니깐. 너 정말 나중에 주름져서 후회한다니까? 뭐, 내 일에 대해 파악한 건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내가 전학 온 건 말이지….”

고찬영은 자못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벌써부터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말이야-.”

두근두근. 긴장으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고찬영은 내 심각한 기색을 한참 뜸 들인다 싶더니,

“당연히 내 절친이랑 재밌게 학교생활 하려고 온 거지! 하하!”

그가 파앗, 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나는 그 대답에 긴장했던 몸이 어이없게 풀리며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냥, 나 때문에…?”

다시 확인차, 되물으니 고찬영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면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그럼 다른 이유가 필요해? 잘 부탁해, 친구님! 아까 교실에서 나 그냥 모른 척해 줬는데 앞으론 그러지 말기. 알았지?”

아니, 그건 좀 아니지! 나는 그 말에 바로 정신을 차리며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잠깐, 왜 멋대로…!”

“그럼 나 무시하게? 정말? 엄청 귀찮아질 텐데? 응?”

발끈하며 외치던 내 말을 고찬영이 싹둑 잘랐다. 나는 그 말에 움찔거렸다. 동시에 치근덕거려 오는 그를 일방적으로 내가 무시했을 때와 장단 맞춰 줄 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크윽.”

곧 판정이 났다. 나는 침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궜다. 슬프지만 내가 무시하는 것보단 이 녀석의 말대로 해 주는 게 더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아, 좋아. 현명한 결단이야. 친구님.”

고찬영은 내가 내린 결정에 뿌듯해 보였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야, 그보다 그 친구님이란 호칭은 뭐야…? 그냥 이름 불러.”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난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저놈의 ‘친구님’이란 게 굉장히 거슬렸다. 누가 봐도 특별해 보이는 단어와 중2병 같은 말에 저걸 매일 듣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알은체하기 취소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아, 그거…?”

그런데 이제껏 뻔뻔스러운 낯짝을 하던 고찬영이 슬쩍 눈을 피하며 볼을 붉혔다. …뭐야, 뭔데? 왜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건데…?

“사실, 창피한 얘기지만…, 나 제대로 된 친구 사귀는 건 네가 처음이야.”

“뭐?”

나는 떡, 하고 입을 벌렸다가 곧 그가 볼을 훔치며 더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야, 자, 잠깐! 그, 걔, 누구냐. 그, 혀, 혀…!”

“현호?”

“그래! 걔! 현호! 걔는 네 친구 아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 서울에서 계속 곁을 지켜 준 그 친구의 입장은 뭐가 되는가! 인소 속 일진들의 속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왠지 지금 이 순간 한도훈이 불쑥 떠오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아, 걘 내 팬.”

“……팬?”

“어. 친구는 친구인데, 좀 애매해. 약간 날 너무 떠받드는 느낌? 그런 게 너무 심하거든. 내가 뭔 말만 하면 다 갖다 바칠 거같이 군다니까. 그래서 내가 뭘 해 주려고 하면 뭐든 다 사양해 버려. 진짜 친구는, 좀, 동등한 그런 거잖아?”

“…….”

…그런 거였어? 그런 관계였어?! 고찬영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미간이 살풋 찌푸려지며 설명했지만, 그에 대해 난 어떤 것도 답할 수가 없었다. 그보단 이 놀라운 사실에 더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설마 그 멀쩡하게 생긴 얼굴로 동갑내기를 우상화했다고? 이 세계는 이런 게 흔한 일인 거야?!’

아무리 좀 잘생기고, 싸움도 잘하고, 카리스마도 있고… 음? 아니, 있을 만한가? 하는 생각이 복잡하게 잇자, 어쩐지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원래 그 나이대 애들은 저런 거에 환장하지 않나? 주인공 같은 비주얼에 싸움을 잘한다. 게다가 카리스마도 넘쳐서 주변을 장악한다. 남자애들이 사족을 못 써도 이상하진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나 때문에 전학 온 거야? 진짜?”

“그렇다니깐. …안 믿는 눈치네. 알았어. 좀 더 설명 좀 붙여 본다면-, 으음-.”

고찬영은 지난날을 회상하듯 눈동자를 하늘로 치켜올렸다.

“지난번에 나 배신한 애들 좀 밟아 줬거든.”

마치 아침밥을 먹었다는 것처럼 태연한 말이었다. 왠지 그 말에 끼어들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다음 내용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학부모 위원회가 소환됐지.”

“…학부모 위원회?”

아니, 그게 이 인소 세계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거였어? 아, 지금은 이야기에 집중해야지. 집중하자, 집중.

“뭐어, 그중에 꽤 돈 많은 녀석이 있었거든. 우리 집도 못 살진 않지만, 영 시끄럽게 될 것 같아서 이 기회에 자퇴나 하려고 했지. 사실 말이 퇴학이지, 그 학굔 어차피 나 퇴학 못 시키거든. 그냥 교내에선 사고 치지 말라는 경고 같은 거라. 근데 누가 또 내 뒤통수 날릴지 어떻게 알아? 어차피 학교엔 애착도 없었고 잘됐다 싶었지.”

오오. 여지없이 소시민인 내겐 거창한 말이 들려왔다. 나는 흐려진 눈을 막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누나가 미쳤냐고 엄청 반대했어. 그러다가 합의를 본 게 전학이었고.”

“아하.”

그제야 난 그가 이 애매한 시기에 전학을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학년 초입이라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해야 되는 청소년기에 환경 변화는 예민한 일 아니겠는가. …물론, 얜 공부할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서 이 학교?”

“그래서 이 학교.”

내가 자신을 콕 짚어서 되묻자, 고찬영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잠시 그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겠네…. 너무 천진난만한 그의 기색이 어쩐지 그의 나이가 재차 상기됐다. 얼굴만 보면 성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성숙함이 배어 있었지만,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자니, 딱 그 나이대에 맞는 아이일 뿐이었다. 이런 애에게 쓴소리를 해서 뭐 하겠나. 게다가 친구 사귀는 거 처음이라잖아. 그냥 받아 줘야지….

“어, 잠깐. 그래서 왜 계속 친구님이라고 부르는 건데?”

하지만, 정작 맨 처음에 질문했던 내용에 대한 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곧장 다시 물어보자, 고찬영이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웃어 댔다.

“그, 그야~ 가,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면 쑥스럽잖아!”

고찬영은 꺄아꺄아, 하며 내 어깨를 거칠게 내려쳤다. 아니, 이 자식이 어울리지도 않는 앙탈을? 그 와중에 얼굴이 잘생겨서 모든 행동이 용서된다는 게 가장 어이없었다. 서이수였다면, 바로 손목을 꺾어 버렸을 텐데…! 정말 내가 생각해도 쉬운 용서 포인트에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 혹시 얼굴에 약한 거 아니야? 문득, 그런 자아 성찰을 하였다.

“아무튼 그런 거니까!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 줘, 친구님.”

“어, 어…. 그래.”

그래. 기다려 달라면 기다려 줘야지. 어쩐지 어깨에 힘이 빠졌다.

댕대래 댕댕 댕댕~.

그때, 타이밍 좋게 수업이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싶어 나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어? 가게?”

“그럼 안 가게?”

그런데 고찬영이 우뚝 멈춰 있는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게다가 하는 말도 이상해 미간이 조금 찌푸려지며 되묻자 그가 불쌍히 미간을 모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 얘기 더 하면 안 돼? 수업은 빼먹어도 되잖아.”

애처롭게 바라보는 게 퍽 귀여웠다. 나는 그런 그에게 상큼하게 웃어 줬다.

“응. 안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나는 너처럼 수업을 땡땡이치는 학생이 아니란다. 나는 단호하게 문을 나섰다. 곧 뒤에서 툴툴거리며 뒤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있다가 불현듯,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야, 근데 그거 진짜 할 거야?”

“응? 그거?”

고찬영은 난데없는 내 말에 잠시 의아해하는가 싶더니, 곧 내 말의 뜻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씩 웃었다.

“그럼. 그것만큼 확실한 건 없다니까?”

“아닐 거 같은데…. 걔네들, 오히려 더 삐져서 나랑 거리 둘 거 같은데.”

“하하, 그럴 리가.”

고찬영의 태도는 꽤나 단호했다. 자신의 계획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에 왠지 반박하고 싶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단정 짓는데?”

“그야~.”

그는 내 앞에 불쑥 나타나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남자는 굉~장히 단순하거든.”

이걸 듣고 절대 질투 안 할 리가 없어.

단호한 뒷말이 들려왔다. 할 말을 다 마친 고찬영은 상상만으로도 신이 났는지 흥겨운 기색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이 자식, 성격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 …찝찝하긴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는 현실이 더 슬펐다. 나는 입을 꾹 다물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 맞아. 친구님. 그거 기억나?”

“그거?”

그런데 이번엔 고찬영이 뭔가 기억을 떠올렸나 보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난 고찬영만큼 눈치가 있는 건 아닌지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굴리며 되물었다.

“그게 뭔데?”

“어떤 새끼가 내 음료수에 뭐 탔었잖아.”

아, 그거. 난 그 말에 바로 그에게 보여 준 영상을 떠올렸다.

“사실 그거 알려 주려고 저번 주말에 놀러 간 거였는데, 전학 가는 걸로 예정을 바꿔서 서두르느라 깜빡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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