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00화 (100/306)

100.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단순하다. (3)

“그거 알려 주려고 온 거야? 아니, 잠깐만. 그럼 전학 결정을 체육관에 온 날에 정한 거란 소리…?”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보다, 전학 수속이 그렇게 빨리 되는 거였어?

“어. 그날 정한 건데?”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래. 이 세계관에 뭘 바라겠어. 게다가 돈도 많다잖아. 나는 재빨리 수긍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한테 알려 준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나도 너한테 보고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그리고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고찬영이 얼굴을 환히 밝히며 웃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의리가? 보통 일진 쪽으로 탑 먹은 애들은 의리 따위 개나 준 경우만 많이 봐서 이런 유형은 지나치게 참신했다. 나는 녀석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나 때문에 이 학교 왔다잖아. 게다가 제대로 친구 사귀는 것도 처음이라잖아. 들뜰 만도 하지.’

대충 넘어가기로 결정한 난 고찬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내용물이 뭐였는데?”

출처가 불분명한 텀블러에 담겨져 있어서 어떤 걸 탔을지 전혀 감이 안 왔다.

“보드카.”

“…보드카?”

“그래. 그것도 도수 엄청 높은 거.”

나는 충격에 휩싸여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지독한 처사였다. 그런 날 향해 고찬영은 무덤덤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뚜껑을 막 딴 것처럼 위장한 보드카를 탄 음료수를 고찬영은 의심 없이 들이켰다. 내가 술에 대해 잘 몰라도 보드카가 칵테일 제조에 자주 사용하는 술이란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보드카는 무색, 무미, 무취의 증류주다. 즉, 음료수랑 섞으면 전혀 그 맛을 못 느꼈을 수도 있다. 괜히 사람들이 칵테일 잘못 시켜서 한 방에 뻗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주량이 세도 그런 건 못 버티지~.”

게다가 고찬영은 술에 강한 편이라 한…, 아니, 이 자식? 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이상한 점을 못 느끼고 지나칠 뻔했다. 나는 그래서 자랑이다, 하면서 녀석의 종아리 걷어차 버렸다. 고찬영은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는 시선에 나는 질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성년자면 미성년자답게 음료수나 마셔. 이 자식아.”

“허얼. 재미없어.”

옆에서 고찬영이 투덜거리는 게 들렸지만 모두 무시했다. 아무튼 요지가 무엇이냐면, 독한 술을 한 번에 들이켜면 아무리 주량이 강해도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고찬영은 처음엔 괜찮았지만 점점 시야가 흔들거리는 걸 느껴졌다고 한다. 왜 이러나 의문이 들 즈음, 사건은 일어났다.

일행 중 다수가 길을 가던 최강혁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고찬영은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운신하기 버거워진 그는 안간힘으로 버티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 상태로 최강혁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일은 커져만 갔고, 자신은 말릴 수도 없이 싸움은 벌어졌다. 나름대로 응수는 했지만, 어지러운 시야론 최강혁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고찬영은 처참히 패배했다.

“어떻게 최강혁이 그렇게 타이밍 좋게 지나간 거지….”

“우연 아닐까? 나 물 먹이려는데 자기들이 자신 없으니깐 옳다구나 한 거겠지. 사실 최강혁만 아니었으면 남은 애들은 그 상태로도 이기거든.”

그런가…? 왠지 인소 세계관의 비현실적인 얘기를 또 들은 기분이었지만, 그 부분보다 다른 쪽에서 바로 수긍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세계가 그런 우연을 만들까, 정말?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답은 바로 나오질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을 털어 냈다.

“그럼 최강혁한테 리벤지 할 생각은?”

나는 당연히 그가 YES. 라고 답할 거라 예상했다. 그렇게 어이없게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으음~. 안 해.”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고찬영은 심플하게 자신의 답을 NO. 라고 내놓았다. 나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붙잡아 세웠다.

“왜?!”

“왜긴. 그냥 굳이 할 필요 없잖아?”

아니, 그 말도 맞긴 한데…! 엄청 상식적인 발언을 하는 고찬영의 태도에 어이가 가출했다.

“개학 첫날부터 싸움 걸러 온 놈이 할 소린 아니지 않아…?”

“아, 맞아. 그랬지, 참.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고찬영은 어쩐지 개운한 태도였다. 나는 그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아 못마땅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멀어지는 그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리벤지를 안 하는 거야?”

나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분이 풀리질 않아서 이를 갈며 재신청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억울하게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친구님이 나한테 관심을 가져 주니 기분 좋네~. 근데, 우리 더 알아가는 건 훗날을 기약해야겠는데?”

고찬영이 내 뒤쪽을 보며 웃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복도에 서 있는 우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역사쌤이 서 있었다.

“헉.”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여기서 얼쩡거려? 종소리 안 들렸어? 어서 들어가!”

“죄, 죄송합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리고 고찬영을 잠시 흘겨보곤 서둘러 반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열자, 반의 모든 시선이 우리들에게로 꽂혔다. 단상을 보니, 선생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나와 고찬영이 같이 들어오는 걸 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입을 달싹였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하며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귀찮아지겠는데.’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고찬영은 앞으로 내 장단에 맞춰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간 보았던 그의 행동력으로 보자면, 그 말은 사실이겠지.

‘이렇게 보니깐 애들이 정말 착해 보이는걸…?’

특히, 반휘혈. 비록 삐져 버린 상황이 일어나긴 했어도 그 녀석이 내 말을 무시한 적은 거의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비교하니깐 반휘혈이 선녀 같아 보여….

‘잘해 줘야겠네.’

나는 결심했다. 고찬영이 약속한 날은 바로 수요일. 만약, 그의 말대로 대화 자리가 성립이 된다면, 학교에서 알은척 정도는 괜찮다고 해 줄 생각이었다. 같은 반이라는 메리트가 있긴 해도 알게 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고찬영도 친한 척을 굴 텐데 정말 친한 애들에게 야박하게 구는 건 너무 어불성설인 것 같았다.

‘근데 진짜 괜찮을까, 그 계획…?’

고찬영은 확신을 담아 얘기했지만, 여전히 찝찝했다. 그런 허술한 작전에 넘어온다고? 정말? 의심이 갔지만, 어차피 별수가 없던 난 다시 힘없이 어깨를 떨어트렸다.

***

그리고 수요일이 되었다.

‘젠장, 기어코 이날이 오다니!’

나는 파들파들 떨려 오는 눈동자를 굴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당시엔 아이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밖엔 안 떠올라서 잊고 있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음? 나 주는 거야?”

뒤에서 앙큼하게 시치미 뚝 뗀 고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 응! 혹시 쿠키 싫어해?”

“아니면 단 거 싫어해? 다른 걸로 바꿔 올까?”

뒤이어, 설렘이 가득 담긴 귀여운 여자애들 목소리도 함께. 그런 여학생에게 고찬영은 가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좋아해. 특히, 너희같이 귀여운 애들이 주니깐 더 맛있을 것 같은데?”

꺄아아!!! 고찬영의 대답과 동시에 뒤에선 아주 난리가 났다, 난리가 났어. 저 망할 플러팅은 첫날부터 유구한데 왜 인기는 떨어질 생각은 안 하고 더 오르는 것 같을까? …왜긴 왜야. 다 얼굴 때문이지. 자문자답을 하며 나는 흐린 눈을 하며 책상 안을 뒤졌다.

‘이걸, …이걸, 줘야 한다고.’

나는 들고 있는 걸 당장이라고 쓰레기통에 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누가 봐도 선물용이란 걸 알 수 있는 예쁜 포장지로 감싸인 상자. 내가 왜 이런 아기자기한 걸 들고 학교에 찾아왔는가,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런데, 어떡하지? 화이트 데이는 보통 남자가 주는 거 아냐?”

웃기고 있네. 천연덕스럽게 선물을 받는 게 의외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고찬영 저 자식 이미 사물함이나 책상 주변으로 선물이 가득했다. 사실 등교할 때부터 두 손 가득했다. 듣자니, 타 학교 여자애들에게도 받았다나, 뭐라나….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네가 기쁘다면 그걸로 좋아!!!!”

“와, 감동인걸~. 고마워,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먹을게.”

자, 이 타이밍에 싱긋, 하고 웃겠군. 하는 예상과 동시에 반과 복도에 몰려 있던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안 봐도 뻔했지만, 역시 그 특유의 잘난 미소를 흘린 게 틀림없었다. 이야, 인소다, 인소. 누가 봐도 인소 세계네, 여기. 미남 한 명 전학 왔다고 온 학교가 아주 뒤집어져 버렸네요.

“크윽…!”

“얼굴이면 다냐…!”

그리고 그런 비현실적인 환경 속에서 반에서 모든 여학생들에게 외면받고 있던 남학생들이 비통의 신음을 내뱉었다. 선망과 질투가 요동치는 남학생들의 눈길이 고찬영에게 향했지만, 고찬영은 관심도 없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 녀석이 막 전학 왔을 땐 얘가 우리 학교에 잘 적응할까 싶었다. 들어보니, 전에 다니던 곳은 인문계가 아닌 공고였다. 공부는 당연히 안 하고 싸움만 하러 다닌 녀석이 학교에서 책상에만 앉아 있는 생활을 적응할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고찬영은 그 생활에 녹아 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보충 시간이나 야자는 다 빼먹긴 했지만, 본 수업 시간에 다 참석하는 게 어딘가. 게다가 반 아이들에게도 자기 나름대로 살갑게 대하려는 게 보였다.

그러한 고찬영의 노력 덕에, 최강혁에게 진 전 사대천왕이란 타이틀로 반의 공기가 냉랭하기 짝이 없던 것도 찰나였다. 고찬영은 그 좋은 넉살로 아이들의 마음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남자애들도 그렇긴 했지만, 특히, 여자애들을 말이다.

‘지금은 남자애들한텐 예외인 것 같지만.’

인기 많을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늘을 찌를 줄은 몰랐다. 고찬영이 이 정도면 1학년의 그 아이들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아마 얘처럼 복도에 줄지어 서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지독한 현실에 내 부담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지잉-.

그때, 내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러나 바로 보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핸드폰만 쥐고 망설이고 있는데,

툭, 툭.

누군가 내 의자 다리를 건드렸다. 정체는 금방 알아챘다. 내 뒤에 있는 놈이 한 놈 빼고 더 있겠는가. 나는 그 은근한 압박에도 잠시 뜸을 들였지만, 연이어 부딪치는 느낌이 닿아 오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을 열어 확인했다.

[고찬영(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고찬영에게서 온 문자였다. 나는 양쪽 입꼬리를 아래를 삐죽내리며 느릿한 손길로 그 내용을 확인했다.

[지금]

…지금? 아니, 진짜 지금? 나 아직 마음의 준비 하나도 안 했는데? 눈동자가 팝핀을 추는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심란함으로 요동치고 있는데 고찬영의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지금 안 주면]

[내가 나선다?]

아, 이런, 젠장…! 나는 내용까진 확인하곤 휙, 하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쌓여 있는 선물 더미 중 아무 곳에 상자를 거칠게 두며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야, 이것도 먹어!”

그렇다. 이게 바로 고찬영의 계획, 일명 <화이트데이 선물 작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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