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단순하다. (4)
이거 진짜 이래도 괜찮나, 수십 번 의문이 내달렸지만 이미 행동은 끝났다. 선물을 주는 것과 동시에 반 내부에 애매한 정적이 내달렸다. 그와 함께 내 등 뒤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뭐야?”
“쟤가 왜….”
“찬영이한테 관심 있었나?”
숙덕숙덕. 그 거북한 침묵을 깬 건 고찬영을 둘러싼 여자애들이었다. 그런데, 상태가 더 안 좋았다. 왠지 분위기가 내가 눈치 없게 끼어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럴 줄 알았어….’
날카로운 시선들이 내 몸 곳곳에 꽂혔다. 공공의 적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이 난처한 상황을 어쩌나 고민하는데, 고찬영이 불쑥 내 선물을 가져갔다.
“오, 내가 달라고 떼를 쓰긴 했지만, 정말 챙겨 줄 줄은 몰랐는걸. 친구님은 참 친절하구나? 잘 먹을게~.”
그러곤 이런 불편한 공기 따윈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여자아이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찬영이 네가 달라고 한 거야?”
왜? 라는 의문이 꼬리가 달린 것 같은 질문이었다. 듣기만 해도 거북해지는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며 고찬영을 힐끔 보자, 그는 여전히 눈치 없는 것처럼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에 친구들끼리 사탕이나 과자 돌릴 텐데 나만 덩그러니 못 받고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그렇잖아? 그래서 우리 친구님한테 따로 부탁했지.”
‘짜잔~! 겸사겸사 나도 준비하고! 근데 얘 것만 준비해서 너희들 건 따로 준비 못 했어. 미안, 미안~.’ 하며 고찬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 받아.”
“어, 응. 고맙다.”
얼떨떨하게 그가 주는 쿠키 꾸러미를 받아 들자, 여학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나와 고찬영을 번갈아 보며 슬쩍 말했다.
“…너희 둘이 그렇게 친한 줄은 몰랐어.”
“맞아. 원래 알고 지내던 거야? 전학 첫날부터 좀 친해 보인다 생각하긴 했는데….”
“둘이 좀 너무 의외지 않아? 성격도 그렇고, 또….”
흘끔,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로써 저 여자아이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나는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도방중 애들과 친하다든가, 한도훈과 이윤이 나를 두고 싸웠다는 얘기가 떠돌 때도 흔히 있었던 일이었다.
하나 이렇게 면전에서 외모가 까이는 걸 용납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대번에 낯을 굳히고 그들을 향해 말조심하라고 경고하려고 했다.
“우리가 친해진 게 그렇게 신기한가?”
그런데,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고찬영이 더 빨랐다. 그의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차갑다 여겨질 정도로 차분한 시선이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오히려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는 그 모습이 더 정적으로 보여 기온을 더 낮추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선을 긋는 그 태도에 한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설마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나도 놀라 녀석을 보고 있는데, 불현듯 고찬영이 활짝 웃어 보였다.
“뭐, 그만큼 잘 맞았다는 거지! 친구님이 성격이 좀 좋아서 나도 편하더라고. 덕분에 학교생활 적응하기도 좋았고 말이야.”
하하, 웃으며 단번에 분위기를 풀어 주는 듯한 너털웃음을 흘려 주자, 여자애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그를 따라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기 시작했다.
“…그, 그렇구나~. 찬영아, 다음엔 그런 걱정 하지 마. 우리가 다 챙겨 줄게! 뭐 필요한 거 있어?”
“아! 기념일도 걱정 마! 우리가 빼먹지 않고 다 챙겨 줄게!”
“맞아, 맞아.”
“어, 나 너희들 모두한테 보답 못 할 텐데. 안 그래도 돼.”
“에이, 안 챙겨 줘도 돼! 우린 네가 기쁘면 그만이거든!”
“정말?”
“그럼 정말이고말고!”
여자애들이 단합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찬영이 고맙다며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해 주자 여자애들이 더 꺄꺄거리며 웅성였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고찬영, 저 녀석 고단수네.’
이제 보니 그 말 같지도 않은 플러팅은 자기 얼굴이 잘나서 먹힌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노린 것 같은 팬 서비스이기도 했다. 살벌했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자기 페이스로 돌리는 것도 그렇고, 답례용 선물 따윈 준비하지 않겠다는 걸 아주 자연스럽게 꺼내는 것도 그랬다. 지금도 하하 호호, 웃고 떠들며 말하는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혹시, 계산한 건가?’
여자애들 반응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건가? 그런데도 나한테 이런 계획을 제안했고? 이 상황을 잘 모면할 자신이 그만큼 있었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지잉-. 고찬영이 힐끗, 울리는 핸드폰에 그 내용을 확인하고 싱긋 웃었다. 저건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허.”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왠지 고찬영의 손바닥 위에 놀아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가 계획을 짰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았다.
[기분 나빴어?]
그때, 타이밍 좋게 내 감정을 파악한 것 같은 문자가 도착했다. 나는 그 내용을 잠시 노려보고 고찬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어느새 여자애들을 물렸는지 그 주위가 한적해져 있었다. 고찬영은 미간을 살풋 모으며 미안한 듯 미소 지으며 내게 문자를 다시 보냈다.
[미안. 설마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나올 줄은 나도 몰랐어.]
[설마 친구님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을 줄이야.......]
[어쨌든 화 풀어라~ 응? 응? ( ´•̥̥̥ω•̥̥̥` )]
게다가 눈치도 빠르군. 인기가 많은 걸 잘 이용하는 고찬영의 모습에 나는 녀석에 대한 평가를 달리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녀석이 나랑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진짜 넌센스네.’
난 그냥 평범한 학생일 뿐…, 아니, 물론 싸움을 좀 잘하긴 하지만! 성격을 보면 그렇게 유별나진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소시민에 적합했다. 혹시 이런 평범함에 끌렸나, 생각해 봤지만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아, 몰라. 그냥 얘가 별종이라 그런 거라 생각하자.’
이런 일에 일일이 전부 신경 썼다가는 내 정신 줄이 버티질 못한다. 나는 대충 머리를 긁적이며 고찬영의 메시지에 대답했다.
[그건 상관없고. 애들 진짜 오는 거야? 진짜?]
기분 나쁜 눈초리까지 받았는데 안 오면 정말 성질이 날 것 같았다. 고찬영은 내 질문에 슬쩍 한쪽 손으로 책상에 턱을 괴어 얼굴을 나만 볼 수 있게끔 가리며 짓궂게 웃었다.
[당연하지.]
그 당당한 태도가 참으로 미심쩍었다. 얘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확신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그렇게 단언하는 거야?]
그래서 물어보았다. 이전에도 질문한 적이 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다. 남자가 단순해서, 라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 이해 범위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반휘혈이나 한도훈이 그리 단순한 애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컸다.
[그야, 그게 당연할 것 같아서.]
그런 내 의구심을 파악했던 것일까, 고찬영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키패드를 누르며 내게 답을 보내 왔다. 나는 받은 문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찬영을 보았다.
“왜?”
이번엔 문자가 아닌 직접 질문을 던졌다. 고찬영은 내 물음에 잠시 크게 눈을 뜨다가 곧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럴 것 같으니까.”
“…네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쾅-!!
하고 반의 문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그쪽을 보자, 나는 다른 의미로 또 경악하고 말았다.
“오, 생각보다 빠른데?”
고찬영이 휘익, 하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정체는….
“…….”
“…휘혈이?”
반휘혈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네가 왜 여깄어? 그런데 나는 그것을 묻기도 전에 반휘혈과 눈을 마주치곤 저절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눈빛이 굉장히 살벌한 게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 와중에 눈치 없이, 아니, 굳이 살필 생각을 안 하는 고찬영이 즐거운 듯 미소 지으며 내게 윙크했다.
“거봐, 내 말 맞지?”
싱긋, 웃으며 말하는 그 꼴이 참으로 재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넌 지금 웃음이 나와?!
“야, 저렇게 화났을 거라는 얘긴 없었잖아…!”
난 평범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원했지, 저렇게 화가 난 반휘혈을 상대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근데 진짜 쟤는 왜 저렇게 빡쳐 있어?!
“난 대화 자리 마련해 준다고만 얘기했는데?”
“야!!”
쾅! 내가 고찬영의 멱살을 당장이라도 붙잡아 항의하고 싶어질 때, 어느샌가 이쪽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반휘혈이 고찬영의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덕분에 탑처럼 쌓여 있던 선물들이 요란하리만치 우수수 무너져 버렸다.
“어…, 휘, 휘혈아? 아, 안녕? 우리 우선 진정 좀 해 볼까…?”
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침착해져 보지 않을래?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굳은 입매를 간신히 올리곤 반휘혈에게 손을 올려 진정하란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반휘혈은 나를 살벌하게 쏘아보며 이를 까득 갈며 억누르듯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해?”
아니, 나 너한테 장난친 적 없는데…? 왠지 억울해져 항변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혈아, 우선 진정하고 자리 좀….”
“말해 봐.”
“그래, 말할 테니까 자리를….”
“이 새끼는 되고, 나는 안 돼?”
“아니, 그게 또 무슨 개소리야….”
울고 싶다. 진짜 울고 싶다. 그간의 경험으로 느끼건대, 현재의 반휘혈은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반휘혈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라도 끌고 가자 싶어 붙잡아 보기도 했지만,
탁, 하고 반휘혈이 매정하게 내 손을 쳐 내 버려 실패로 끝나 버렸다. 물론, 그 냉랭한 손길에 마음의 상처를 살포시 얻은 건 덤이었다.
“하다못해 이재현이나 김시원이었으면 이렇게 빡치지도 않았어. 근데, 웬 처음 보는 새끼랑 놀아?”
…그래, 이런, 이런 부분! 나는 바로 아파 오는 골치에 미간을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내가 이 녀석이랑 학교에서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 했던 가장 큰 이유. 바로 이 오해를 조장하는 엄청난 발언들 때문이었음을, 나는 이 순간 가장 깨닫고 싶지 않을 때 새삼스레 알아차리고 말아 버렸다.
“…휘혈아, 우리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은 제발 그만하자.”
왠지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은 이미 우리를 놓고 수군덕거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눈앞에 있는 고찬영마저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진 예상 못 했는지 잠시 벙쪄 있었다.
그래, 너도 당황스럽지. 나도 그래.
왠지 엉뚱하게 일에 휩쓸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한 감정도 올라왔다. 난처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중, 고찬영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는 내 눈과 마주치곤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곤 나와 반휘혈을 번갈아 보더니, 곧 눈빛을 반짝이며 손에 들고 있던 어떤 선물 상자 하나를 풀기 시작했다.
‘…잠깐, 저거 내 거 아냐?’
선물의 탑이 무너질 때 대체 언제 빼돌렸는지 내가 준 선물은 상처 하나 없이 멀끔했다. 고찬영은 흥미로운 기색을 전혀 감출 생각 안 하고 오히려 내가 준 머랭 쿠키를 야금야금 주워 먹으며 우리를 본격적으로 구경하는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