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02화 (102/306)

102.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단순하다. (5)

그 얄미운 모습에 방금까지 미안했던 감정이 한순간에 싹 씻겨 내려갔다. 오히려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생각이 실행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고찬영을 노려보고 있는 사이, 바로 옆에 있던 반휘혈이 내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건 나야…! 한눈팔지 마!”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네! 너 제발 말 좀, 말 조오옴…! 잠깐 시선 좀 돌렸다고 이러기냐아악!! 나는 바짓단이라도 붙잡아 제발 그 이상한 말버릇 좀 고쳐 달라고 사정하고 싶어졌다. 대체 고찬영과 시선이 마주친 이유만으로 왜 이렇게 더 뿔이 났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나는 이 순간 내 이미지가 완전히 건너선 안 될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제엔장. 이럴 줄 알았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고찬영 말 무시하고 직설적인 대화 자리 마련하는 게 훨씬 나을 뻔했다. 차라리 주먹질 오가며 싸우는 게 낫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내 이미지 말살당하고 싶진 않았어, 않았다고…!

“…그래. 내 눈앞에 있는 건 너지. 그래,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휘혈아…!”

나는 책상에 머리 박고 기절하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다시 한번 반휘혈을 설득했다. 누가 보면 네가 날 정말 좋아하는데, 내가 쓰레기같이 바람피운 줄 알겠다! 그것도 화제의 전 사대천왕인 전학생이랑 붙어먹어서 희대의 바람둥이로 소문나겠어, 정말!

‘아, 내 이미지! 아악, 내 학교생활…!’

소리가 들려온다. 내 평판이 말아먹다 못해 처참히 갈리는 소리가. 나는 서글픈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걸 콧등을 꽉 붙잡고 천장을 보며 겨우 참아 냈다.

“…….”

그렇게 감정을 삭이고 있는데, 어째선지 반휘혈이 조용하다. 이번에도 엄청난 발언으로 내 속을 제대로 뒤집어 줄 줄 알았건만 갑작스레 반휘혈이 침묵하니 뭔가 이상했다. 의아함에 그를 보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달싹이는 반휘혈이 있었다.

“…휘혈아?”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이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리벙벙하니 그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반휘혈이 몸을 흠칫, 하고 떨더니 휙, 하며 내 눈길을 피해 버렸다.

“……쯧.”

거기에 더해 반휘혈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헝클였다. 게다가 미간마저 와락 찌푸려진 게 평소의 그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들뿐이었다.

…얘가 남들 앞에서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 낯선 행동을 얼떨떨하게 보고 있자, 반휘혈이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내 팔을 붙잡았다.

“엥?”

뭐, 뭐야? 나는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척척 반휘혈에게 끌려갔다. 아주 꽉 잡힌 것이 절대 뿌리치지 못하게 할 작정인가 보다. 여실히 느껴지는 억센 손아귀가 그 증거였다. 이 난데없는 행동에 너무 당황한 나는 그나마 지금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고찬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고찬영은 방긋 미소 지으며,

‘힘내.’

하고 입을 뻐끔거리더니 손을 흔들며 응원까지 보내오는 게 아닌가.

‘저 새끼가?!’

이 일의 가장 큰 주범이 이리도 방치하는 상황에 울화통이 터진 나는 고찬영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욕을 갈겼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럴수록 고찬영의 미소만 더 짙어져만 갔다. 난 그 면전에 더 욕을 싸지르고 싶은 충동이 더 커져만 갔다. 곧장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전에 교실을 빠져나오게 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보다도 당장의 문제는 고찬영이 아니었다. 정작 큰 문제는 바로 교실을 빠져나온 지금 이 순간부터였다.

“뭐야…?”

“반휘혈?”

“반휘혈이랑 같이 가는 여자애 누구야?”

뭐야, 뭐야? 누구야? 하며 복도에 서 있던 모든 학생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확 몰린 게 따가울 만치 느껴졌다. 나는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죽고 싶다.’

진짜 너무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내 얼굴은 안 봐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벌게져 있을 게 뻔했다.

“휘혈아, 나 어디 안 도망가는데 팔 좀 놔 주면 안 될까아….”

다른 거 다 몰라도 팔만이라도 안 잡혀 있으면 이 정도로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애원하듯 말이 나왔지만 그만큼 나는 절박했다.

솔직히 말해, 내 힘으로 이 팔을 못 빼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녀석이 방심한 틈을 타 단번에 빼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실행하지 않은 건 겨우 얻은 이 녀석과의 대화 자리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억지로 팔을 빼낸다? 대화는 할 수 있더라도 반휘혈의 감정이 너무 상해 있어서 또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았다.

반휘혈이 타인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고, 냉랭하단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라 칠 수 있는 게 나였다. 자랑같이 느껴지지만 진짜로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유독 나한테 감정적으로 굴고 애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드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수치를 참아 가며 반휘혈을 달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거였다.

그렇지만 역시 부끄럽다. 다른 건 몰라도 제발 이 팔이라도 놓아 주면 좀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주위의 눈길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화끈거리는 얼굴을 팔로 가려 버렸다.

“…….”

“휘혈아?”

그런데 앞서가던 반휘혈이 우뚝, 멈춰 섰다. 아무래도 내 말을 듣긴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반휘혈에게선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고장이라도 난 것 같은 모양새에 붙잡힌 팔을 흔들며 녀석을 불러 보았지만, 반휘혈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가서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려 들자, 반휘혈의 뚱한 얼굴이 보였다.

“…….”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입꼬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마냥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서도 복잡해 보였다. 내가 또 무슨 말실수를 한 건가? 저절로 드는 난처함에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반휘혈이 그런 눈동자만 돌려 시선을 한번 주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내 팔을 붙잡지 않은 손으로 제 미간을 문질렀다.

“싫어.”

“…응?”

그리고 하는 말이 싫어, 였다. 순간적으로 뭐가 싫다는 건지 대입이 되질 않아 멍해졌다.

“억.”

그러다가 갑자기 몸이 앞쪽으로 끌려 나갔다. 방심하다가 끌려가선지 이상한 추임새가 튀어나왔지만, 그보단 팔목에서 느껴지는 힘이 시선을 잡아끌어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아, 이거였구나…!’

아무래도 나는 역시 멍청이인가 보다. 내가 팔 좀 놓아 달라고 물어봐 놓고 순간 그가 말한 싫다는 게 뭔지도 파악 못 했다. …변명을 하자면, 그만큼 반휘혈의 침묵이 길었고 그의 다채로운 얼굴을 구경하다가 내가 한 말도 까먹은 게 컸지만…! 어차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 넘어가자. 그보단 반휘혈이 평소보다 더 아이처럼 구는 게 더 큰일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두 눈을 크게 깜빡이며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반휘혈이 방향을 틀어서 계단을 훌쩍 내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1층에 도달했고, 학교 밖을 향하고 있었다.

“어? 어?”

얼떨떨하게 반휘혈이 끄는 대로 따라오니 도착한 곳은 교사의 한적한 뒤편이었다. 이쪽은 창문도 별로 없는 곳이라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는 완전한 사각지대였다. 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저기, 휘혈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놓는 게 어때?”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붙잡힌 팔을 대충 흔들어 보였다. 대체 왜 내 팔을 안 놓아 주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었나? 놓으면 바로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던 걸까?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그땐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놀랍게도 붙잡힌 팔목이 쉽사리 풀어졌다.

“…….”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내 팔목과 반휘혈의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가 반휘혈을 보니, 그는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휘혈아. 말 좀 해 주면 안 될까….”

내가 무슨 독심술사도 아니고, 이렇게 계속 녀석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지쳐 갔다. 나는 피로해진 기분에 무거운 눈꺼풀을 문질렀다.

“…나랑,”

“응?”

그때, 반휘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 같은 소리에 나는 의아해져 그를 올려다봤다. 나는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랐다.

“나랑 같이 다니는 게, 부끄러워?”

반휘혈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억누르는 그의 얼굴엔 언뜻 비참함이 스쳤다.

“……뭐?”

난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멍해졌다. 부끄럽다고? 누가…?

“뒤에 있는 그놈은 괜찮고, 나랑은 다니기 그렇게… 싫었어?”

반휘혈의 주먹이 뼈가 튀어나올 것처럼 강하게 쥐어졌다. 그의 눈가가 차오르는 감정을 감당 못 하겠던지 조금 붉어졌다. 나는 그것을 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부끄럽다니! 아니야, 절대 아니야!”

설마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교를 같이 하는 걸 거절한 건 그저 조용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싶어서 그랬던 선택이었다. 반휘혈을 부끄럽다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왜 같이 다니면 안 되는 건데.”

“그, 그건….”

반휘혈이 정색하며 내게 되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한순간 말이 막혔다. 너랑 있으면 눈에 띄어서?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으니 너완 같이 못 다녀? 무슨 말을 해도 최악이었다. 답을 찾지 못하고 눈을 방황시키고 있자, 반휘혈이 앞머리를 짜증스레 크게 쓸어 올렸다.

“하아. 누나가 관심받는 거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

“알고 있는데,”

그가 말을 잠시 끊고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 그러곤 그는 어쩐지 힘이 빠진 어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기분 좆같더라.”

“…….”

“누나랑 나, 반년 만이야.”

반년이라고. 그가 이를 까득 갈며 낮게 읊조렸다.

“누나는, 나… 보기 싫었어?”

애처로운 목소리가 교사 뒤편에 작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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