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03화 (103/306)

103.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단순하다. (6)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반휘혈을 보았다. 처참하게 가라앉은 그의 기분이 내게도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하다못해 이재현이나 김시원이었으면 이렇게 빡치지도 않았어. 근데, 웬 처음 보는 새끼랑 놀아?’

그답지 않게 거칠었던 언사와 넘실거리는 감정의 노출.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자신이 놓치고 있던 실책을 깨달았다.

‘내가 잘못한 거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내 잘못이었다. 반년, 그래, 반년 만이었다. 반휘혈과 이렇게 마주하고 대화하는 건 그토록 긴 시간을 지나고 이뤄진 일이었다. 나는 그와 재회했던 날을 떠올렸다.

뺨이 베일 것처럼 추웠던 날씨 속, 눈을 맞으며 나를 기다렸던 반휘혈. 그는 나를 마주하면서 단 한 번도 추위를 티 내지 않았다. 그저 반가운 듯 미소 지으며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누나, 보고 싶었어.’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이다.

가슴 언저리가 돌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짓눌렸다. 나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내가 나빴어.”

내가 쓰레기였다. 이 아이의 마음을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내 생각만 했다. 여유가 없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지만, 눈앞에 들이밀어진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아끼는 동생의 설움이면 더더욱.

“네가 보기 싫은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냥, 그냥 이건 내가 관심받는 게 싫어서…, 그래서….”

자꾸만 말이 막혀 왔다. 대체 무슨 말을 건네줘야 될지 모르겠다. 말을 이을수록 변명만 잔뜩 늘어놓는 기분이었다. 나는 결국 스스로의 답답함을 못 이겨 머리를 두 손으로 헝클이며 신음을 뱉어 냈다.

“으윽…! 그냥, 그냥 미안해!”

여기서 무슨 변명이 더 필요하겠나. 그냥 어른이면 어른답게 깔끔하게 인정하자.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진지하게 제안했다.

“네 기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

아프긴 하겠지만, 이 녀석이 받은 상처보단 덜 아프겠지. 나는 숨을 깊게 내쉬어 몸 상태를 고른 후, 가드를 올려 자세를 잡았다.

“…….”

“자, 난 준비 됐어.”

어서 들어와도 된다며 고개까지 끄덕이며 준비를 알려 줬으나, 어째선지 반휘혈의 표정이 멍해 보였다. 무언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래, 다짜고짜 때리라고 하니 이상해 보이는 건 안다. 하지만, 기분 풀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난 눈빛으로 재촉했다. 어서 안 때리고 뭐 해? 그러자 반휘혈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바보.”

“엉?”

방금 내가 들은 게 뭔가 싶어 반사적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반휘혈이 눈에 힘을 주며 미간을 모으더니, 척, 하고 한 발자국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바보.”

“엥?”

“멍청이.”

“어엇.”

그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올수록 내 몸도 자연스레 뒤로 이동했다. 반휘혈은 그런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해결이라곤 주먹밖에 모르는 폭력배!”

“야, 익, 그, 그건 마, 맞지만…!”

연이어지는 욕들에 벙찌다가 폭력배라는 말에 순간 발끈했다. 주먹부터 앞서는 건 틀리지 않았지만, 폭력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과격하진 않다고! 나는 억울함에 항변하려던 찰나 툭, 하고 내 팔에 무언가가 닿아 왔다.

“…….”

톡, 하고 부딪힌 건 반휘혈의 주먹이었다. 간지럽지도 않은 접촉에 순간 이게 뭔가 싶어 멍해졌다가 곧 반휘혈이 내가 때리라고 했던 말을 이행했음을 깨달았다. 그걸 알아차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반휘혈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숙인 고개를 더 깊이 내리며 속삭이듯 읊조렸다.

“……진짜 싫어.”

그의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 나는 멀거니 그 손을 좇다가 느릿하게 들어 올렸던 가드를 내렸다. 눈앞엔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한 아이가 있었다.

“…….”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고 반휘혈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움찔 떨려 오는 감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왠지 그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초조함이 들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보다 결국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

풀이 죽어 있는 아이를 끌어안자, 흠칫하고 몸이 떨려 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를 꽉 안아 주며 차분히 속삭였다.

“상처 줘서 미안해, 휘혈아.”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내 딴에는 열심히 살아가는 거지만, 결국 이렇게 가까운 사람을 상처 입히게 된다. 이런 걸 마주할 때마다 서글픈 기분이면서도, 그래도 더 늦지 않게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마워.”

그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고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모르겠다. 속으로 쌓아 버리는 아이인 만큼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마음고생을 많이 했겠지. 나는 미안함에 그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런 점이,”

그때, 반휘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내 어깨에 파묻듯 숙이더니,

“진짜 싫어.”

내 등을 나와 같이 마주 끌어안아 왔다. 모진 말과는 달리 조심스러운 몸짓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래. 맘껏 미워해.”

그래 봤자, 난 너 미워할 일 없을 테니까. 차분히 그에게 말을 흘려주자 반휘혈의 굳은 몸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내 말이 안심이 됐던 걸까? 작년에 비해 몸이 커지고 선이 굵어졌어도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나는 그 사실이 어쩐지 마음에 놓였다. 어쩌면 보지 못했던 그 기간 동안 불안했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가 날 변함없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다.

‘이러면 정말 거리 두는 것도 의미가 없네.’

이젠 이 녀석뿐만이 아니라 나도 그럴 의욕이 사라졌다. 주목을 받는 게 귀찮다든가, 운명의 흐름에 관여해서 일이 꼬인다든가, 이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부질없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이미 난 주목을 받을 대로 받았다. 운명은 이 녀석을 만나고 동생으로 삼아 준 그 순간부터 이미 잔뜩 꼬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무엇보다 시프, 그 양반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럴 목적으로 이 세계에 왔노라고. 그렇다면, 이미 얽혀 버린 관계를 굳이 풀어낼 필요도 없었다. 그게 내 마음도 편했고 말이다.

‘연애 스캔들은, 뭐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아니라고 부정하지, 뭐.’

그 작업이 굉장히 귀찮긴 했지만, 어차피 늦었다. 이럴 바엔 그냥 한시라도 빨리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나는 반휘혈을 한 번 더 꽉 끌어안은 후 몸에서 떼어 내며 그에게 말했다.

“뭐, 그래도 너무 싫어하진 말아 줘? 자주 볼 사이인데 그럼 내가 너무 슬플 거 같거든.”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말하자 나를 보고 있던 반휘혈의 눈이 크게 떠지는가 싶더니, 곧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부드럽게 눈매가 휘었다.

“생각해 보고.”

“너무 냉정한데?”

“누가 할 소릴.”

반휘혈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나는 그에 뚱하니 입을 쭉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무정하고 까칠한 녀석 같으니라고.”

“뭐?”

“아무것도 아냐.”

볼에서 강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니, 여긴 인소 세계면서 왜 이렇게 귀들이 다 밝은지 모르겠다. 대놓고 말해도 못 듣는 게 인소의 미학 같은 거 아니었냐고. 나는 야박한 현실에 툴툴거리며 째려보는 시선을 모른 척 무시했다.

“아, 근데 지금 시간이 몇 시…, 헉.”

8시 48분. 1교시 수업은 9시 정각이었다. 아니, 대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나는 기겁하며 입을 떡 벌렸다. 그러곤 곧장 반휘혈의 등을 밀어 대기 시작했다.

“야, 빨리 들어가야겠다. 이따가 더 얘기하든 하자. 아, 혹시 우리 반에 오게 되면 그 전에 연락 좀 해줘. 나 마음의 준비 좀 하게.”

“…그렇게까지?”

어. 그렇게까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받아들인다곤 했지만 바로 적응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한 거 노력하는 내 성의를 봐서라도 꼭 문자를 주고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

“…알았어.”

“좋아, 좋아. 그럼 얼른 가자!”

나는 반휘혈의 대답까지 전부 듣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있어도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나는 서둘러 그의 등을 꾹꾹 눌러 밀면서 발을 재촉했다.

그렇게 우리는 교사 뒤편에서 서둘러 떠나갔다.

***

두 사람이 사라지자 그들이 있던 곳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고요해졌다. 그런 적막함 속에서 바스락, 하고 자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흠.”

그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방금까지 두 사람이 있던 곳과는 다른 벽, 즉 두 사람에게서 보이지 않던 건물의 한쪽 벽면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물며 질겅이고 있던 이는 방금까지 소란스러웠던 곳을 향해 눈길을 주며 중얼거렸다.

“반휘혈이 여자한테 쩔쩔맨다라….”

훗. 그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찰칵, 하는 소리와 동시에 라이터의 불이 켜졌다. 불은 담배의 끄트머리에 닿았고, 불이 붙은 담배는 남자가 숨을 빨아들이는 것과 함께 타들어 갔다.

후-.

그의 입에서 나른한 연기가 퍼져 나왔다. 연기는 공중에 수놓은 지 얼마 안 돼 그 자취를 감췄다. 남자는 그것을 감흥 없이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와 함께 금을 짜 놓은 것처럼 찬란한 그의 머리칼이 짧게 흔들렸다.

“드디어 일이,”

그의 손에 들려졌던 담배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 그, 최강혁은 여전히 타들어 가는 담배를 발로 짓이겨 끄며 머리를 가벼이 쓸어 올렸다.

“재밌어지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