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단순하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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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휘혈과 헤어지고 나서 반으로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요즘 들어 참 주목받을 일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에 피곤했지만 나는 대충 무시하며 자리를 찾아갔다.
“오, 친구님. 드디어 오셨네.”
“와, 왔어?”
내 자리에 도착하자 고찬영과 안경희가 나를 반겨 줬다. 그런데 방긋방긋 웃고 있는 고찬영과 달리 안경희는 그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강했다. 원래부터 낯을 많이 가렸다 보니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그게 더 강해 보였다.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내게 시선을 보내오고 있던 아이들이 흠칫거리며 슬쩍 눈을 피했다.
‘뭐지?’
평소라면 눈이 마주치면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내게 질문을 던지든가 했을 텐데? 나는 이 위화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어, 어…?!”
그러자 안경희가 새된 소리를 내며 반응을 보였다. 수상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대체 뭔데 그래?”
“딱히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어.”
내 질문에 대답한 건 안경희가 아닌 고찬영이었다. 그는 별일 아니란 것처럼 평이하게 말했다. 그러자 안경희의 얼굴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낯으로 고찬영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고찬영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했구나. 나는 대충 상황을 짐작하며 자리에 앉아 몸을 돌려 고찬영을 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묻자, 고찬영은 잠시 날 빤히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친구님, 오늘 내가 한 약속 기억나?”
“약속? 아, 그거. 그게 왜?”
오늘 이 녀석이랑 한 약속이 뭐겠나. 화이트 데이 작전 어쩌고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찬영은 내게 약속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면 반휘혈과 한도훈과의 대화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비록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과 성사되는 과정까지 여러모로 복장이 뒤집히긴 했어도 반휘혈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기회를 얻었다. 게다가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한도훈뿐이었다.
‘아, 휘혈이 만난 김에 도훈이는 대체 왜 저러는 것 같냐고 한번 물어보기라도 할걸.’
뒤늦게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뭐, 어차피 시간이야 있으니 지금 당장은 못하더라도 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물론, 이걸 물어본다고 반휘혈이 제대로 알고 있을 확률이 굉장히 낮기야 했지만, 뭐든 해 볼 수 있는 건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방금 한도훈도 다녀갔거든.”
“아, 그래…. 잠깐, 뭐, 뭐라고?!”
사색에 잠겨 대충 대꾸하던 중, 들려온 내용에 기겁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찬영을 바라보다 확인차 안경희를 보았다. 안경희는 내 눈을 피하며 난처한 웃음을 그리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그 대답에 경악한 심정으로 고찬영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니, 어, 아니, 이거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되는 거야…?”
예상치 못한 정보에 순간 머리가 꼬였다. 두 사람 다 날 만나기 위해 조례 시간인 것도 잊고 날 만나러 온 걸 놀라워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두 사람이 단순하단 결론을 내려야 되는 건지…, 아니,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진짜 통해? 통한다고…?!
결론을 말하자면, 이거였다. 신빙성이라곤 전혀 안 보였던 그 말 같지도 않은 작전이 제대로 통했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반의 공기가 이상했음을 떠올렸다.
“야, 근데 도훈이랑 뭔 일이 있었길래 반 공기가 이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묻자 고찬영이 별거 아닌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진짜 별일 아냐. 그냥 좀… 말다툼한 정도?”
“…좀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여상히 말하는 고찬영과 달리 안경희의 표정은 떨떠름하게 굳어 있었다. 더불어 그녀가 중얼거린 말을 포착한 난 고찬영을 의심스럽게 노려보며 추궁했다.
“솔직하게 불어라.”
“진짜 별일 아닌데…. 흠, 알았어, 알겠으니까 표정 풀어.”
내 눈빛이 점점 강해지자 고찬영이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시큰둥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
서이나가 반휘혈에게 끌려간 후, 반에 있던 모두가 이게 무슨 상황인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중,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자취를 힐긋 보던 고찬영은 앞에 앉아 있던 안경희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놀라운데.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친했다니. 너는 알고 있었어?”
“어? 조, 조금…?? 그, 근데 나도 두 사람이 저, 저렇게까지 가까운지 모, 몰랐…어.”
특히, 반휘혈이랑은……. 뒤로 갈수록 안경희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기어들어 갔다. 설마 고찬영이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상상도 못 했었기에 그녀가 느낀 당황스러움은 꽤나 큰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찬영은 안경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흐음. 설마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보다 저건….’
고찬영의 시선이 서서히 좁혀졌다. 그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이 사라진 문을 힐끗 보다 이내 어깨를 가벼이 으쓱였다.
“뭐,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
“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고찬영의 혼잣말에 안경희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고찬영은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너 친구님이랑 같이 다니던데, 둘이 친…,”
“헉.”
그런데 안경희의 모습이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등 뒤에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란 모양새였다. 그녀가 숨을 들이켜며 낯을 굳히는 모습에 고찬영은 말을 하다 말고 의아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마주한 인물에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호오?”
“이 자리 주인 어디 갔어.”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한도훈이었다. 그는 기분이 굉장히 언짢은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까딱이며 고찬영 바로 앞자리 주인의 소재지를 물어 왔다.
“내가 그걸 왜 알려 줘야지?”
“난 그따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파지직, 한순간에 두 사람 사이에서 살벌한 스파크가 튀었다. 어정쩡하게 끼어 있던 안경희는 식은땀을 줄줄 흘려 대며 생각했다.
‘엄마아…. 나 왜 여기 있지. 살려 줘….’
몇 마디 주고받았다고 반의 공기가 영하까지 뚫고 내려갈 기세였다. 이미 주위는 안경희 자신을 빼곤 이 두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교내의 유명인인 두 사람이었기에 귀만은 쫑긋 세워 모든 관심이 향해 있기도 했다. 안경희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자리 배치를 처음으로 한탄했다.
“하하, 넌 여전히 싸가지가 없구나?”
“난 싸가지 부릴 사람한테만 부려서.”
“또 재수 없기까지.”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그래서, 누나 어디 갔냐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는 고압적이며 시건방진 태도에 고찬영의 어려 있던 남은 웃음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그는 차갑게 눈을 가라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무릎 꿇고 알려 달라고 부탁해 봐. 그럼 생각해 볼게.”
픽, 하고 싸늘한 웃음이 그의 낯에 걸렸다. 한도훈은 그런 그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다 같이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런데 한도훈은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서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찬영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얘기해 보란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한도훈도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차가운 비소를 지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누나랑 네가 썸을 탔네, 뭐네, 사귀네, 어쩌네, 하는 개소리가 떠돌더라고?”
“호오?”
역시 그렇게 퍼졌나.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고찬영은 이 일을 계획한 주범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담긴 소문의 파급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이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와 엮이게 되면 언제든 이런 소문이 퍼지기 나름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위치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 모든 사태는 서이나도 대강 짐작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테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 거겠지.
‘그런데도 한 거 보면, 그만큼 소중한 관계란 건데….’
고찬영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졌다. 반휘혈은 잘 모른다 쳐도, 이놈은 대체 왜?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누가 봐도 성격이 글러 먹은 놈이란 게 보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근데 널 보니깐 알겠어. 그게, 확실한, 개소리란 거.”
그리고 그런 감상을 가지고 있던 건 고찬영뿐만이 아니었다. 한도훈도 마찬가지로 고찬영이 왜 서이나가 이따위 놈이랑 엮인 건지 도통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짜증 나는 새끼.’
두 사람은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동시에 생각했다. 파지직, 거리는 스파크가 또 요란히 튀며 고요한 신경전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그 사이에 공기처럼 껴 있던 안경희는 간절하게 생각했다.
‘빨리, 빨리 돌아와…! 이나야!!’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떠오르는 짝꿍의 존재를 떠올리며 그녀는 조용히 파들파들 떨어 댔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주먹이 오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로 두 사람의 인내심은 붙잡을 새 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댕대래 댕댕 댕댕~.
그런 두 사람의 고요한 냉전을 깨부순 건 생각도 못 한 종소리였다. 한도훈은 시선을 돌려 힐끔 시계를 보았다. 수업 시작 시간 10분 전. 이 시간에 서이나를 만난다고 해도 그녀의 고지식한 성격상 대화를 얼마 나누지도 못하고 끝날 게 뻔했다. 사실 그는 이미 서이나가 반휘혈에게 끌려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반에 방문한 건 그저 이왕 온 김에 대충 분위기라도 살피고자 온 것이었다. 그는 원래 이 반에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다. 생각을 마친 한도훈은 숨을 깊게 내쉰 후 곧장 말없이 몸을 돌렸다.
“뭐야, 도망가게?”
“너 같을 걸 상대하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이거 참, 잠깐이라도 상대해 준 걸 영광스러워해야 하나.”
“마음껏 영광으로 삼도록 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는 고찬영의 말을 대충 대꾸하며 한도훈은 사라졌다. 고찬영도 그런 그를 붙잡지 않았다.
한도훈이 반을 나가자, 안경희는 책상에 엎어져 신음을 작게 흘렸다.
‘무서웠어어….’
다시 한번 자신의 소중한 짝꿍이 그리워진 안경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