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여주와 남주. (1)
***
“……아니, 그러니까 너희들 싸울 뻔했다는 거 아냐, 지금.”
고찬영의 설명은 대충 이러했다.
내가 사라지고 한도훈이 찾아왔다. 그리고 재수 없게 시비를 걸길래 몇 마디 대꾸해 줬다, 정도에 끝났지만… 옆에 있던 안경희의 표정으로 보아 그 정도가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대체 얼마나 생략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까까지 고찬영을 바라보던 반 친구들의 시선이 달라진 점이나 안경희의 태도만 봐도 충분히 파악됐다.
“음? 뭐~, 한 대 치고 싶긴 했지.”
게다가 가볍게 말하는 내용에 비해 눈빛이 한없이 진지한 고찬영을 보아선 진짜 싸움판 벌어지기 1초 전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하마터면 반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교실에서 깽판을 부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뻔했다. 그 아찔한 광경을 목도했다면, 이번만큼은 정말 스트레스로 인해 퓨즈가 나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안에서 소란 일으키지 말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정말이지,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네.
“친구님이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그래야죠.”
고찬영은 내 뒤집힌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긋, 웃으며 턱을 괴었다. 나는 그런 그를 가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마를 가볍게 찰싹 때려 버렸다.
“악.”
“웃지 마, 이 자식아. 나 진지하게 충고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설마 자신이 맞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얼떨떨해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곤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하핫, 하며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님은 매번 날 놀라게 하네.”
“뭔 개소리야….”
얘도 말 한번 참 이상하게 한다. 역시 인소 세계 일진들, 특히 이름 날릴 수준의 랭커들은 저런 헛소리를 잘하나 보다. 나는 대충 뒷목을 주무르며 더 이상 볼일이 사라져 몸을 돌렸다. 그러자 타이밍 맞춰서 1교시 담당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흠. 도훈이는 다음 쉬는 시간에 찾아가 봐야겠네.’
또 우리 반으로 오리란 보장도 없는 데다가, 설령 오더라도 고찬영과 다시 시비가 붙으면 정말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한도훈이 있을 반으로 향했다.
“보자-. 도훈이 반이, 지난번에 걔가 4반에서 나왔던 거 같은데.”
기억을 곰곰이 뒤져보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자니, 불현듯 어떤 인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주로 보이는 걔는 어떻게 지내려나.’
문득, 그 반 앞에서 여주 같은 애와 반휘혈이 부딪혔던 게 생각났다. 나름 주연들의 등장에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는 요즘이었다. 오히려 내 쪽에서 난리라면 난리일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열애설이 불거질 때마다 금세 잠재워진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걔네들이랑 내가 사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이 내가 아니라고 할 때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그때마다 묘하게 기분 나빴던 걸 떠올리자 나는 부루퉁하니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대놓고 무시하는 것도, 은근슬쩍 사람 깔보는 것도 다 짜증 났다. 자기들은 정작 그들과의 친분이라곤 전혀 없으면서! 아무리 어리다고…, 아니, 이건 어린 걸 떠나서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착 가라앉는 기분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하여튼, 어딜 가나 꼭 사람 긁는 놈들은 있….”
짝-!!
멈칫. 나는 난데없이 들려오는 마찰음에 반사적으로 발을 세웠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멍청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빼서 계단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금발…, 응? 그, 금발?!
이 학교에 저렇게 눈에 띄는 금발이라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사과해.”
예상치 못한 인물과의 마주침에 기겁해하던 중, 또렷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뒤늦게 최강혁 앞에 또 다른 인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인물을 파악하려 몸을 살짝 빼서 살펴보자, 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정체는 방금까지 떠올리고 있던 여자 주인공으로 추정되고 있던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잔뜩 눈을 부라리며 자신보다 훨씬 큰 장신의 금발 남성, 즉 최강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아니, 너희들이 거기서 왜 나와? 나는 경악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최강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이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난데없는 현장에 내 눈동자가 저절로 떨려 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이 상황을 기겁하며 방관하는 구경꾼들만 있었…, 어? 잠깐. 순간 눈에 무언가가 걸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몸을 좀 더 빼서 확인하는데,
“그, 그러지 마. 나, 괘, 괜찮아…!”
최강혁과 여자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가려져 있던 여자아이가 여자 주인공을 달래기 시작했다. …뭐지? 혹시 벌써 삼각관계?
‘…라고 보기엔 조금 상황이 애매한데.’
무엇보다 여자애가 너무 평범했다. 아니, 귀엽게 생긴 편이긴 하지만, 저 정도면 그냥 엑스트라나, 여자 주인공의 친구 역에 어울리는 편이었다.
“흐음.”
나는 턱을 손으로 쓸며 부족한 정보량에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네가 괜찮아도 난 안 괜찮아. 어떻게…, 어떻게 주는 사람 성의가 있지, 그렇게 함부로 굴 수가 있어? 네가 그렇게 잘났어?”
그때, 여주로 보이는 인물이 씩씩거리며 자신의 친구를 뒤로 물리곤 최강혁의 앞에 더 다가섰다. 그러나 최강혁은 그때까지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피다가 문득, 최강혁 발치에 나동그라져 있는 물체 하나를 포착했다.
‘저건….’
포장지로 감싸인 사각 박스였다. 그것도 처참히 짓뭉개져 있는 상태로.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깐… 친구가 최강혁에게 화이트 데이랍시고 선물을 줬는데, 최강혁이 매몰차게 거절했고-. 여주가 화나서 뺨을 때린 건가.’
직접 보진 않았지만, 방금 들은 소리는 살과 살이 강하게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그리고 방금 최강혁을 발견했을 때, 그의 얼굴이 살짝 돌아가 있기도 했고 말이다. 상황을 적당히 짐작한 난 다시 저들이 날 발견하지 않을 정도까지 살짝 몸을 물리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와, 진짜 여주 맞나 봐. 화끈한데?’
보통이라면 뺨 때릴 생각까진 안 할 텐데. 역시 인소 세계 아니랄까 봐… 친구가 모욕을 받았다고 바로 유명한 일진, 그것도 현 사대천왕이 된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라. 보통의 담력으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쟤는 최강혁이 누군진 알까?’
저번에 그녀가 반휘혈과 부딪혔을 때, 그를 몰랐던 걸 보면 최강혁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농후했다.
그건 그렇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아무 일도 안 터진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렇게 일이 터져 주다니. 이걸 좋아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야.”
어이없는 실소를 흘려 내고 있을 때였다. 최강혁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죽고 싶어?”
그냥 듣기에도 살기등등했다. 그 목소리에 여주와 친구가 몸을 흠칫거리며 낯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여, 연희야. 사, 사과하자, 응? 제발.”
친구가 바들바들 떨며 여주의 팔에 매달렸다. 하지만, 여주도 고집이 있는 편인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입술만 꾹 깨물며 움직이질 않았다. 오히려 눈을 치켜뜨며 그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오.”
상황에 맞지 않다는 걸 알지만 여주의 강단에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저런 패기,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하는 쪽이었다. 아무래도 운이 좋게도 이 소설, 아니, 이 세계의 운명에 엮인 여자 주인공은 소심한 성격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저번에도 가방을 던져 나를 도운 거겠지. 난 이 흥미로운 광경에 히죽, 웃으며 상황을 관전했다. 물론, 여차하면 튀어 나갈 준비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이가 없네. 야.”
그때, 최강혁이 여주에게 몸을 숙였다. 위협하듯 내려다보는 것 같은 모양새에 내 눈이 저절로 가늘어졌지만, 여주는 몸을 떨면서도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고 꿋꿋이 그를 노려보았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와, 나왔다. 유명하면서도 오만한 남주들이 한다는 그 전매특허의 대사가. 설마 저 말을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난 자연스레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모, 모르는데…?”
그런데 이번엔 여주도 도저히 그 위압을 버틸 수 없었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꽤나 위축되어 있었다. …아니, 근데 진짜 몰랐다고?
‘확실하다. 쟨 여주야.’
이로써 더 분명해졌다. 이 상황에서까지, 그것도 입학한 지 거의 2주가 다 되어 가는데도 저 유명한 놈을 모르는 여주의 정보력에! 이쯤 되면 저 애가 여주가 아니란 게 더 납득이 안 갈 정도였다.
“최강혁, 최강혁이야…! 너 최강혁도 몰라…?!”
“…꼭 알아야 돼?”
여주의 말에 진심으로 당황한 친구가 보다 못해 눈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려 줬다. 하지만, 여주는 인소의 여주답게 그게 꼭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단 것처럼 일관하고 있었다.
“아, 혹시 연예인…?”
게다가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답변까지. 정말 완벽한 인소 속 여자 주인공이었다.
“…잠깐. 연예인이면 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팬이 주는 선물을 그렇게, 막 짓밟으면 안 되잖아!”
“허.”
와우. 이번 말은 나도 최강혁처럼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저 기가 막힌 둔감함을 보아라. 내가 최강혁이었다면 눈앞에 있는 여자애를 별종으로 여기다 못해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설마 쟤도 이 학교에서 자기 정체조차 모르는 애를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
“오늘 기분이 좋아서 사과하면 좋게 넘어가 주려 했더니….”
최강혁이 허리를 펴며 목이 뻣뻣한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러곤 한순간에 여자애의 멱살을 잡아챘다.
“윽…!”
“상황 분간도 못 하는 멍청이는 딱 질색이거든.”
그가 그 상태로 여주를 내동댕이치기 위해 팔을 휘두르려던 순간,
“…….”
던지려던 행동을 멈췄다. 최강혁은 자신의 팔 쪽을 힐끗 보곤 눈동자만 움직여 옆을 보았다.
“이건 또 뭐야.”
그의 차가운 눈동자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거기까지 하는 게 어때?”
다름이 아니라,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게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