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06화 (106/306)

106. 여주와 남주. (2)

“화난 건 알겠지만, 조금 진정하자.”

나는 최강혁의 팔을 꽉 붙들며 제안했다. 서둘러 내려와선지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지만, 정돈할 시간은 없었다. 붙잡은 팔 너머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팔뚝에 내 눈이 자연스레 가늘어졌다.

‘역시 남자 주인공이네.’

이 정도면 아마추어, 아니, 프로 선수에 견줘도 될 정도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꼬이긴 했다곤 해도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사대천왕의 반열에 오를 만한 수준이었다. 비록 만나 본 사대천왕이 고찬영 한 명뿐이라지만, 고찬영이 강할 거란 건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싸우게 되면 곤란한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해 바로 뛰어내려 오긴 했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쉬는 시간인 것도 모자라 1학년 교실이 빽빽이 늘어선 복도다 보니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주위를 메우고 있었다.

…여차하면 정체를 들킬 각오를 해야 될지도.

그, 조…커, 라는 수치스러운 네임을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눈앞에서 싸움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여주가 당하는 걸 목격하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또 내가 당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었고. 도와주러 왔답시고 맞고 있는 꼴이라니, 내게도, 옆에 있는 여주에게도 그다지 유익한 경험은 아니게 될 터였다.

“당신은….”

그때, 여주가 나를 멍하니 불렀다. 기억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닌 모양인지 내가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인상 깊은 만남을 두 번이나 했는데 기억을 못 하면 그것도 이상하긴 하겠다. 나는 납득하며 최강혁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끼어들 상황이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사람을 던지려 드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좋게 말로 하는 게 어떨까?”

물론 뺨을 때린 여주도 잘못하긴 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걸 거론할 상황이 못 되었다.

“……하.”

최강혁이 한 박자 늦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그는 큭큭, 하며 낮게 웃더니 돌연 눈빛을 싸하게 빛내며 잡고 있던 여주의 멱살을 더 강하게 쥐었다.

“으윽…!!”

“싫다면?”

그가 모로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향해 조소했다. 나는 그 태도에 시리도록 눈을 가라앉히며 쥐고 있던 그의 팔을 꽉 붙잡았지만, 이내 숨을 크게 내쉬며 그 팔을 놓았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그러니까 얘를 놔 주면 안 될까?”

괜히 자극해서 여주를 다치게 만들면 안 된다. 나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그와 싸울 의지가 없음을 어필했다. 그러자 최강혁은 걸려 있던 미소를 싹 지우며 재미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의 무감한 시선이 내 눈과 똑바로 맞부딪쳤다.

“잠깐, 너-.”

그런데 몇 초쯤 지났을까,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러곤 잡고 있던 여주를 휙, 하고 가벼이 던지듯 놓아 버렸다.

“으악!!”

제 딴에는 나름대로 가볍게 놓아 준 것이겠지만, 여주의 입장은 달랐나 보다. 던지는 힘에 못 이겨 몸을 휘청이더니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괜찮아?”

그래서 서둘러 여주의 상태를 확인하러 다가가자, 여주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잡혀 있던 충격은 채 가시질 않았던지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를 강하게 지지해 주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줬다.

“…허. 하하, 하하하!”

그런데 최강혁이 이상했다. 그의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놀라 그를 보자, 최강혁은 이마를 붙잡으며 어이없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아-. 어이가 없네. 왜 이걸 지금 눈치챘지?”

최강혁은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는지 자꾸만 픽, 픽 웃음을 흘리더니, 곧 눈을 번뜩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

그러곤 이번엔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나는 그 손을 바로 풀기 위해 팔목을 반사적으로 붙잡았지만, 최강혁이 이어서 내뱉는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우리, 만난 적 있지.”

“!”

…세상에. 맞다, 그랬었지, 참…! 나 얘랑 저번에 마주친 적 있었지…? 나는 뒤늦게 떠오른 기억과 함께 몰려드는 낭패감에 얼굴을 굳혔다. 요즘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그와 마주쳤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녀석도 왜 이렇게 거슬리나 싶었거든? 그냥 앞에서 알짱거려서 그런가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네? 하, 하하.”

최강혁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는 그의 눈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광기라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최강혁이 나와 여주랑 마주쳤던 일을 전부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어쩐지 이렇게 성질 더러운데 아까 가만히 서 있더라니. 아무래도 여주를 보면서 어떤 기시감만 느꼈을 뿐이지, 누군지 못 알아차리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내가 나서서 여주를 도와주니 최강혁이 기억을 제대로 떠올린 것이고.

‘망했군.’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난 금방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 아냐.’

그렇다고 해도 역시 약자가 당하고 있는 걸 버젓이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등과 어깨를 당당히 편 채 최강혁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의 팔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게 지금 내 멱살을 잡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이것 좀 놓는 게 어때.”

나는 차분히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타개할 방법을 떠올렸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최강혁이 내 말을 순순히 들어주는 거였지만, 그럴 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호오? 재주껏 빠져나가 보는 게 어때?”

아니나 다를까, 최강혁은 히죽대며 비아냥거릴 뿐, 전혀 놓아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붙잡은 팔을 힐끔 보았다.

‘역시 억지로 풀어내는 수밖에 없나?’

평범한 여자애가 사대천왕의 멱살을 재주껏 뿌리친다, 라. 그렇게 되면 다들 이상하게 여기겠지. 그러면 자연스레 조커가 나란 걸 눈치채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은 모두 그냥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아무리 숨겨도 내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 건 확실했다. 아마 지금 이 주위에도 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나는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무시하며 호흡을 다잡았다.

‘…멍청히 당하고 있는 건 역시 직성에 안 풀리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정체가 드러나면 어떤 파급이 날아올지 예상이 안 갔다. 그나마 예상이 가는 건 주위에서 내게 시비를 걸어 올 거라는 것? 학교 안으로 국한된 게 아니라 타 학교도 포함이겠지. 아무튼 지금보다 귀찮아질 일이 많아질 거란 것은 거의 확신이었다. 그래서 정체를 감추는 걸 선호했기도 했고.

…무엇보다, 한때 프로 선수로서의 프라이드가 있는 만큼 길거리 싸움에 연루된 게 소문나는 것이 더 싫었다.

‘지금 이 순간이, …정체를 드러낼 가치가 있나?’

그런 생각이 줄줄이 떠오르자, 최강혁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차라리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으응? …혁아! 지금 너 뭐 하는 거야?!”

상황에 맞지 않는 명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와 최강혁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향하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오고 있던 이윤이 기겁하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너, 너 왜 우리 누나한테 그래?! 당장 놔! 언능 놓으란 말이야!!”

이윤은 사람들 틈을 다 빠져나오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최강혁의 내 멱살을 붙잡고 있던 최강혁의 손을 풀기 위해 그의 팔을 퍽퍽 치고 있었다.

“아, 알았어. 아프니까 그만해.”

“으이씨! 누나, 괜찮아요? 쟤가 누나 때렸어요? 네??”

최강혁이 귀찮다는 듯 손을 팍 놓자, 이윤은 최강혁을 한 번 노려보더니, 내게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왠지 그 얼굴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져 살짝 뒤로 물리며 괜찮다고 말해 주자 이윤은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최강혁을 휙, 하고 돌아봤다.

“야, 너는 왜 아침부터 성질은 성질이야!”

“고막 울려. 시끄러.”

이윤이 달려들 듯 그 앞으로 전진하자 최강혁이 이윤의 얼굴을 한 손으로 막아 세우곤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너 진짜-!”

“자, 자. 윤아. 진정해.”

그러자 이윤은 더 성질이 났는지 발끈하며 뭐라 한마디 하려 하자, 부드러운 말씨를 가진 이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혁이, 너도 웬일로 1교시부터 제대로 등교했다 싶더니, 이렇게 사고를 치고 있으면 어떡해?”

그 정체는 다정한이었다. 그는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근처에 있는 반을 힐끗 보며 주위에 포진된 학생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만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4반 앞에서. 4반 다음 시간이 음악 시간이라서 반에 아무도 없으니 망정이지. 일 더 커지게 만들지 마.”

다정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눈빛으론 최강혁을 힐난했다. 하지만, 최강혁은 그런 그의 말이 썩 와닿지 않은 모양인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차피 반휘혈, 그 새끼는 어차피 이런 데 관심 없어.”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말하는 그 이름은 최강혁이 그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이라고 생각되게끔 만들었다.

“너한텐 관심 없어도 이 누난 아니란 말이야!”

그때, 볼을 잔뜩 부풀리며 화가 잔뜩 나 있는 이윤이 최강혁에 버럭 대꾸했다. 최강혁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윤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지.”

그러나 대답은 이윤이 아닌 다정한이 했다. 그는 여상히 대답하더니, 내 쪽으로 슥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선배. 많이 놀라셨죠?”

“어…. 음. 괜찮아.”

“다행이네요.”

그는 내게 사과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러곤 내 대답을 듣더니,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편히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긴장이 서려 있는 내 어깨의 근육이 점점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얼추 상황이 종결될 것 같다는 느낌에 안심하던 중, 돌연 최강혁이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혁아?”

그러자 옆에 있던 다정한의 눈빛이 이 자식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이러나, 라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또 그의 눈빛과 내 눈빛은 별반 다를 바 없을 거고 말이다.

“흐음.”

그런데 최강혁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중히 날 살피는 게 왠지 관찰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뭐, 뭐야?”

그런 그의 시선에 당황한 내가 몸을 슬쩍 물리며 피하려 들자, 최강혁의 손이 내 턱을 붙잡았다. 생각도 못 한 접촉에 놀라 눈을 끔뻑이는데, 최강혁이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못생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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