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08화 (108/306)

108. 여주와 남주. (4)

우당탕, 하며 두 사람이 화려하게 바닥을 굴렀다. 나는 씩씩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두 사람을 노려봤다. 반휘혈과 최강혁은 난데없는 습격에 놀랐는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여간 일진이란 것들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학교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허….”

최강혁이 헛웃음을 치며 날 바라봤다. 그는 무언가 참듯 강하게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내 앞에 다가와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그것도 좋네. 근데 난 저 자식보단 네가 더 좋을 거 같은데?”

“…하!”

머리의 열이 임계점을 돌파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자꾸 웃음만 나왔다. 그러자 폭발할 것 같던 감정은 오히려 차분해지면서 눈앞에 있는 놈만이 보였다.

“그거 괜…, 으붑!!”

퓨즈가 제대로 나가 버린 내가 승낙하려던 순간, 입이 틀어막혔다. 갑작스러운 방해에 내 눈이 저절로 살벌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짜증스레 막은 손을 강하게 쳐 내 떨어트려 막은 이를 확인했다.

“뭐 하는 짓이야, 서이수!”

“누나야말로 뭐 하는 거야…!”

그런데 서이수가 되레 내게 소리쳤다.

“누나, 바보야? 지금 쟤 페이스에 말리면 어떡해?”

서이수는 내게 한 소리 하면서도 어깨를 잡아 내 몸을 질질 끌어 최강혁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이성이 나갈 대로 나가 버린 내겐 전혀 도움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그럼 지금 내가 화 안 나게 생겼어? 지금 쟤가 아까부터 나한테…!”

“그래도 지금은 참아! 누나가 나한테 자주 하는 말이 그거잖아!”

“…뭐?”

순간, 동생 놈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무언가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할 말을 잃고 서 있자 어느새 다가온 이재현이 내게 속삭였다.

“누나, 진정하세요. 화난 건 이해하는데 지금 누나 정체 다 까발려지기 일보 직전인 거 같아요.”

나는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깜빡이며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

…이재현의 말이 맞았다. 복도에 서 있던 구경꾼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 뻔했는지 깨달았다. 열이 잔뜩 올라 있던 머리가 식는 건 한순간이었다. 겁도 없이 그 최강혁의 싸움 도발에 응수하는 여학생이라. 앞으로 굴러도 뒤로 굴러도 소문의 조커일 게 뻔하지 않겠는가. 하마터면 내 프라이드도 잊고 안 좋은 모습을 널리 퍼트릴 뻔했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굴었던 자신의 모습을 뉘우치며 나는 얼굴을 깊게 쓸어내렸다.

“흠? 뭐야, 설마 도망치게?”

누가 봐도 도발이었다. 나는 으득, 이를 갈며 얼굴을 짓누르던 손 틈 사이로 최강혁을 노려보았다.

“…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유 모를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재밌다는 듯 눈을 휘며 내게 다가오려 했으나,

턱, 하고 커다란 몸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반휘혈.”

“…….”

최강혁이 반휘혈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뒤통수밖에 보이진 않았지만 반휘혈도 지지 않고 노려보는지 고개가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이러다 다시 그 개판이 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한 순간,

“뭐야, 이 개판은?”

황당한 듯한 감상을 내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한도훈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계단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훈아!”

이재현은 한도훈의 등장이 굉장히 반가웠나 보다. 그는 희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밝은 태도로 한도훈을 반기자, 한도훈은 나와 이재현 쪽을 힐끗 보다가 반휘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업 시간 다 되어 가는데 안 와서 와 봤더니….”

한도훈은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가 오기엔 계단 쪽에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느 세월에 저길 내려오나 걱정했으나, 빽빽이 무리 지어 있는 학생들이 한도훈이 지나가기 편하게 길을 터 주었다.

‘와, 이게 바로 인소 일진 클래스….’

잠시나마 쓸데없는 걱정을 한 내가 바보였다. 나도 모르게 떫은 눈으로 한도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려오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어?”

그런데 그와 동시에 휙, 하고 한도훈이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아니, 시선 마주친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급격한 서운함에 입을 삐죽였다.

‘진짜 서운하네! 지난주엔 체육관도 안 왔으면서!’

사실 지난 주말에 한도훈은 우리 체육관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유를 듣자 하니, 집안 행사 때문에 불참했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날 피한 게 아닌가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 조급한 마음에 고찬영의 제안도 받아들인 거였는데! 정말 서운하다, 한도훈!

“거기 바보들. 사람 통행 방해하지 말고 이만 해산하는 게 어때?”

한창 속으로 한도훈을 향해 툴툴거리고 있던 중, 한도훈의 한심하단 듯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입을 열자마자 거는 시비에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

그건 최강혁도 마찬가지였다. 졸지에 바보가 된 그는 얼굴을 황당하게 구기며 부축하려던 다정한과 이윤을 뿌리치곤 스스로 일어서 한도훈에게 다가섰다.

“살다 살다 진짜 별 같잖은 소릴 하루 만에 다 듣네. 야, 또라이.”

“뭐, 개새끼.”

…아니, 두 사람 호칭이? 그런데 서로를 향해 부르는 호칭에 꽤나 익숙해 보였다. 나는 그 사실에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재현아, 쟤네 둘. 아니, 휘혈이랑 도훈이, 저 최강혁이란 애랑 아는 사이야?”

옆에 있던 이재현에게 슬쩍 묻자, 그는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전 쟤네들이랑 엮일 일이 많이 없어서….”

아니, 명색이 라이벌인데 많이 안 엮였다고? 아니, 아니다. 물어볼 번지수를 잘못 고른 거였다. 이재현은 패싸움에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싸움을 즐기지 않는 아이였다. 그러니 그는 잘 모를 수도 있었다.

나는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내 앞에서 아직까지 최강혁을 견제하고 있는 반휘혈을 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서로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는 건 좀 그렇겠지? 나중에 타이밍을 봐서 물어보기로 결심을 하며 나는 냉랭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최강혁과 한도훈을 돌아보았다.

“아, 너도 혹시 그거야? 저 여자한테 관심 있어?”

아니, 쟨 또 무슨 개소리래…. 턱을 까딱이는 방향이 정확히 날 가리켰다. 그러니깐 즉, 관심 있는 여자라는 사람이 나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반휘혈에게 그런 비슷한 개소리를 한 것 같은데. 나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최강혁을 노려보고 있는데,

“관심? 관심이야 아주 많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누난데.”

“…시발.”

엄청나게 당돌한 대답이 한도훈에게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선 슬며시 욕이 나왔고 말이다. 그의 대답으로 인해 주위가 한순간에 술렁이는 게 여실히 다가왔다. 나는 골치가 아파 오는 기분에 이마를 부여잡자 옆에 있던 이재현이 위로의 손길로 내 어깨를 두드려 줬다.

“호오?”

그런 한도훈의 대답은 최강혁의 흥미도 샀나 보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눈썹을 까딱 올렸다.

“또라이, 네가?”

“와, 도훈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이건 좀 흥미롭긴 하다.”

그리고 그건 이윤과 다정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들은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슬쩍 가세했다.

“난 도훈이 네가 죽을 때까지 너만 사랑할 줄 알았어!”

“친한 척 붙지 마.”

그중, 가장 큰 흥미를 보이는 이윤이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다가서자, 한도훈이 질색한 얼굴로 이윤의 얼굴을 밀어 버렸다. 싸늘한 대응에 이윤이 풀이 죽으며 울상을 짓자 다정한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었다.

“히잉…. 도훈이는 맨날 나한테 차가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너도 질리지도 않고 매번 다가가는 것도 대단하다.”

…아니, 위로 맞나? 부, 분위기는 그게 맞는데…. 아무튼, 나는 희극을 그리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떨떠름하게 보고 있던 중,

“그리고 오해하는 게 하나 있는데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 이 타락한 놈들아.”

“엥?”

“응?”

뜬금없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도훈을 향했다. 그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어깨와 가슴을 당당히 펴며 자신을 가리켰다.

“난 그냥 순전히 누나로서 좋아하는 거뿐이야.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나라고, 이 머저리들아.”

“…….”

“…….”

깊은 침묵이 복도를 감쌌다. 나는 흐린 눈으로 한도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순수한 내 마음을 더러운 눈으로 보지 말아 줄래?”

한도훈은 뻔뻔스러운 낯으로 질색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자식을 같이 질색해 주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너는 그런 놈이지. 어차피 날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기대라곤 1밀리그램도 없었지만, 저 당당함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 휘혈이 쟨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거 맞으니깐 넣어도 돼.”

“한도훈, 선 넘지 마라.”

“개소리 지껄이지 마.”

한도훈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내가 즉각 대꾸하는 것과 동시에 반휘혈도 입을 열었다. 겹치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그를 보자, 반휘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곤 반휘혈이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한도훈을 보았다.

“와, 휘혈아. 너 그 정도 되면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어?”

“…너나 더러운 시선으로 보지 마.”

한도훈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뻔뻔한 말에 반휘혈의 낯이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한도훈에게 경고를 내뱉었다.

“솔직하지 못하긴.”

“그 입 닥치게 해 줘?”

이어지는 한도훈의 야유에 반휘혈의 인내심이 한계를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조용하다 싶더니만 내가 너무 안일하게만 봤구나.’

계단을 내려오기 전, 주연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아무 일도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게, 설마 그 생각이 플래그가 될 줄이야. 나는 뒤늦게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하며 고개를 젖히곤 뭉친 뒷목을 주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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