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여주와 남주. (5)
댕대래 댕댕 댕댕~.
그때,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한도훈은 반휘혈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다 말고 위를 힐끗 보다가 나를 슬쩍 보았다.
“…….”
하지만, 그 시선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휙, 시선을 돌리더니 반휘혈에게 다가갔다.
“야, 됐고, 올라가기나 하자.”
“…….”
한도훈은 태평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계단 위를 가리켰다. 반휘혈은 무언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침묵으로 긍정을 나타냈다.
“야, 반휘혈.”
그런데 자리를 옮기려던 반휘혈의 발걸음을 잡는 이가 있었다.
“이대로 가도 괜찮겠어?”
최강혁이 조소를 그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시선이 잠깐 내게도 향한 걸 보면 방금 싸움의 연장선인가 싶었다. 그래서 다시 몸에 긴장을 불어넣고 있던 중, 돌연 반휘혈과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해 봐.”
할 수 있으면. 나직한 경고를 최강혁에게 던진 반휘혈은 한도훈을 지나쳐 계단 위로 향했다. 최강혁은 그런 그를 어이없단 것처럼 헛웃음을 토하며 바라보았지만, 쫓아갈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옆구리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변함없이 재미없는 녀석.”
낮게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는 심드렁한 듯했지만, 피식, 입꼬리를 올리는 게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나는 알 수 없는 그의 기분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 눈치 없는 목소리가 해맑게 끼어들었다.
“잘 가, 애들아~. 또 보자!”
“윤아, 좀 조용히 해.”
이윤이 천진난만하게 반휘혈과 한도훈의 뒤통수에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다정한이 그의 입을 턱, 하고 손으로 틀어막았다. …설마 이런 분위기에서, 저렇게 자신을 적대하는 놈한테 잘 가란 인사를 하는 이윤의 배짱에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역시 저 솜사탕 머리는 머리 색만큼이나 독특한 게 분명했다.
‘음? 잠깐. 근데 내가 여기 왜 왔더라…?’
나는 멍하니 그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했다. 그러다 멀어지는 한도훈의 뒤통수를 발견하자 뒤늦게 누구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상기해 냈다.
“헉.”
아, 맞다. 한도훈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거였지…! 나는 본 목적이 눈앞에서 사라지려 하자 급격히 초조해진 마음에 서둘러 서이수와 이재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애들아, 그럼 나도 가 볼게!”
“응?”
“네?”
두 사람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멀어지는 반휘혈과 한도훈을 따라잡기 위해 계단을 향했다. 그러다가 최강혁의 곁을 지나던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핏빛이 어린 듯한,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인상 깊은 색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내 등 뒤로 나를 붙잡는 소리는 없었다.
***
최강혁은 멀어지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더 이상 보이질 않자, 그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곤 발걸음을 옮겼다.
“응? 혁아, 어디 가?”
그의 등 뒤로 이윤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게, 최강혁이 향하는 곳은 교실이 아닌 교문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미 보러.”
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윤은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아, 잠깐, 윤아!”
다정한은 멀어지는 두 사람에게 손을 뻗었지만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곤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뭐야….”
“그러게….”
덩그러니 남게 된 서이수와 이재현은 황망히 세 사람을 어이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기….”
“응?”
그때, 조심스러운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시선이 옆을 향하자, 거기엔 긴장 어린 얼굴을 한껏 그린 여학생이 있었다.
“뭐야?”
“저기, 그러니까, 고, 고마워.”
“엥?”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서이수의 얼굴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그제야 여학생은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느끼고 부연 설명을 이었다.
“아, 아까 언니, 그, 그니깐 그쪽 누나분이 절 도와주셔서! 그래서, 고맙다고…. 아, 그, 혹시, 누나분 반이 어딘지 아실까요? 따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아아…. 그렇게 된 거구나.”
꽤나 긴장했는지 존대와 반말이 섞인 말투였다. 하지만, 이재현은 그런 그녀의 말을 통해 왜 상황이 이렇게 꼬이게 되었는지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최강혁과 이 여학생이 얽히면서 그 사이에 서이나가 잘못 엮여 버린 것 같았다. 분명 오지랖이 넓은 편인 그녀가 그 상황에 개입한 쪽이겠지만…. 이재현은 대강 그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며 여전히 긴장한 듯 보이는 여학생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많이 무서웠겠다. 이젠 괜찮으니까 어서 반으로 들어가 봐. 누나도 딱히 감사 인사 받자고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그래도! 그래도,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응?”
“뭔 소리야? 너 우리 누나랑 알아?”
금시초문이었다. 서이수가 아는 범위에서 누나인 서이나가 친하게 지내는 여학생은 많지 않았다. 그의 누나는 넓은 오지랖에 비해 낯을 가리는 이상한 성격인지라 친구가 별로 없었다. 최근엔 그나마 반에서 새로 사귄 여학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눈앞에 있는 이 여학생이 아닌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서이수는 자연히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 저기, 그, 이러저러하다가… 하하.”
여학생은 그 말에 멋쩍은 모양새로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많은 일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서이수의 시선이 가늘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이수야.”
좀 더 캐묻기 위해 입을 열자, 이재현이 서이수를 만류했다. 말문이 막힌 서이수가 그를 보자, 이재현의 시선이 복도 너머를 가리켰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저 멀리서 선생님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제야 서이수는 지금이 수업 시간임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일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이수는 혀를 차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시간이 늦었어. 너도 반으로 들어가 봐. 아, 누나는 6반이야.”
“앗! 고, 고마워!”
이재현이 부드럽게 말해 주자 여학생의 얼굴이 환해졌다. 한층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곁에 있던 친구와 함께 반으로 향하려는 그녀를 보던 서이수는 문득, 떠오른 궁금증 하나에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 잠깐. 너 이름이 뭐야?”
“어?”
그녀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서이수를 보더니, 곧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연희, 주연희야.”
***
“혁아! 재밌는 게 뭐야? 응? 응?”
“시끄러.”
애매하게 달아오른 몸 상태에 최강혁은 언짢게 고개를 기울이며 뻣뻣한 근육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윤은 그의 차가운 대응에도 지지 않고 엉겨 붙으며 끈질기게 물어 왔다. 결국 그 질긴 매달림에 항복한 최강혁은 그를 살짝 노려보다가 귀찮다는 듯 대답해줬다.
“한참 재밌는 와중에 끊겼잖아. 그러니 그만한 대타를 찾아야지.”
“…응?”
그 말에 이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최강혁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눈을 이전보다 더욱 반짝이며 환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섰다.
“우와, 혁이 너… 방금 재밌었구나!”
“…흥.”
들뜬 듯한 이윤의 기색에 최강혁을 코웃음 치며 외면했다. 하지만, 최강혁의 말에 놀란 건 이윤뿐만이 아니었다. 다정한도 평소의 웃는 낯을 지우며 놀라더니, 곧 그에게 흥미를 감추지 않고 물었다.
“웬일이야? 뭘 할 때마다 재미없다고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최강혁은 그 물음에 다정한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곤 훗, 하며 웃음을 덧그리며 눈을 덮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게. 근데 이번은 좀 재밌었어.”
안 그래? 그의 되묻는 소리에 이윤과 다정한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추길 잠시, 곧 이윤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나 휘혈이나 도훈이가 그러는 거 진짜 처음 봤어!”
“그러게. 소문으로만 들었지, 눈으로 직접 보니깐 느낌이 다르더라.”
다정한이 이윤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다 곧 눈에 이채를 띠며 최강혁을 보았다.
“그럼 역시 조커는 그 누나일까?”
“이미 확신했으면서 묻지 마.”
“하하,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잖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최강혁의 말대로 이미 다정한은 서이나가 조커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그들과 친하다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었지만, 방금 있었던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더욱 확실해졌다.
‘최강혁에게 저렇게 당당하게 맞부딪치는 사람은 흔치 않지.’
그 소문의 조커가 아니고선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 누나가 조커든 아니든 이제 상관없어! 난 그 누나가 진-짜 좋아!”
그런 와중, 이윤이 최강혁과 다정한을 앞지르며 두 팔을 신나게 휘저으며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 다정한은 그의 말에 놀란 듯 잠시 보다가 이내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윤은 처음부터 서이나에게 강한 호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원체 밝고 사교성이 좋은 편인 이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강한 호감을 먼저 보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아마, 그만큼 마음에 든 상대라는 뜻이겠지만….
‘다만, 그 누나는 별로 달가워 보이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심했다.
‘모른 척하자.’
그 슬픈 현실을 직설적으로 말할 만한 비정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다정한이었다. 그는 이윤에게서 슬쩍 시선을 돌려 최강혁을 보았다.
“그래서, 어땠어?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은?”
다정한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사실 서이나가 두 사람을 걷어차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얻어맞은 건 최강혁이었다. 반휘혈은 지척에 있어서 같이 나뒹굴었을 뿐이고. 한눈에 보기에도 각력이 강한 건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기습을 당해도 그렇게 화려하게 넘어질 위인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도 우습고. 역시 그 누나는 조커가 맞다고 다시 확신을 담으며 다정한이 짓궂은 미소를 건 채 직격으로 얻어맞은 소감을 물었다. 최강혁은 그런 그에게 피식, 웃음을 그리며 여상히 말했다.
“존-나 아파.”
아, 그러고 보니…. 최강혁은 문득, 자신의 볼을 건드렸다. 그는 이 일이 벌어진 시발점인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두 번째….”
“응?”
“이것도 재밌네.”
다정한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으나, 최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방금보다 즐거운 듯한 미소를 덧그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