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11화 (111/306)

111. 미워할 수 없는 골칫덩어리들. (2)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자, 우리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휘혈이, 너 안 갔었어?”

먼저 간 줄 알았던 놈이 버젓이 문 옆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놀란 마음에 그를 보고 있자니, 뒤에 따라 나오던 한도훈이 내 어깨를 짚더니 빼꼼하고 고개를 빼며 반휘혈을 보았다.

“와, 반휘혈. 눈치 없게 엿들었어.”

말하는 내용에 비해 그의 말투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가만 보면, 한도훈 이 녀석은 그 누구보다 반휘혈 놀리기에 진심이었다. …물론, 그 대상이 반휘혈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네 얘기엔 관심 없어.”

“에잇, 매정한 새끼…. 아, 그래~. 네가 관심 있는 건 누나뿐이지?”

냉정한 대꾸에 한도훈이 혀를 찼지만, 곧 그치지 않고 다시 반휘혈을 놀려 댔다. 그런 한도훈을 바라보는 반휘혈의 표정이 질색하듯 일그러졌다.

“알면 닥쳐.”

그래, 내가 한도훈 이 자식 욕먹을 줄…, 아니, 잠깐. 뭐라고?

“아, 그래, …어, 잠깐, 뭐?”

그리고 그 대답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너무 자연스러운 대답에 하마터면 그냥 놓칠 뻔했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

방금 했던 말에 태클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반휘혈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진지한 낯으로 말을 걸어 왔다.

“할 말?”

그의 말에 어리벙벙한 낯으로 되묻자 반휘혈은 잠시 입을 꾹 다물며 뜸을 들이더니, 나직하게 한 단어를 꺼냈다.

“…점심.”

“응?”

점심? 웬 점….

“아.”

뜬금없는 그의 말에 의아하길 잠시, 곧 그 단어에 함축된 의미를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따가 같이 먹자. 내가 너희 시간에 맞춰서 갈게.”

흔쾌히 그의 말을 허락하자, 반휘혈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기색이었다. 아마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던 게 틀림없었다.

‘뭐….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겠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앞으로 어떤 소문이 나든 상관없었다. 그냥 시비가 오면 오는 대로 무시하든가 싸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체념 섞인 막연한 계획을 그릴 뿐이었다.

“…응.”

그런 어설픈 대책을 그리던 와중, 굳어 있던 반휘혈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더니, 기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어렸다.

“기다릴게.”

“어, 어? 어어. 그, 그래.”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분위기가 환해졌다. 반휘혈은 내 대답이 꽤나 기뻤는지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직까지도 그의 웃음에 면역이 덜 된 내가 멍청하니 대답해 주고 있자, 위쪽에서 황당한 음색이 들려왔다.

“…이러는데 진짜 안 좋아한다고?”

왠지 뒤에 사기 치지 말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 같은 뉘앙스였다. …사실 한도훈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었다. 남들에게 하지 않는 행동을, 무엇보다 이 녀석은 오해를 할 정도로 날 너무 다정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아니라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거봐. 역시나 들려오는 부정에 나는 솟구친 의심을 다시 억눌렀으나, 곁에 있던 한도훈은 납득하지 못하겠던지 반휘혈의 말에 반박했다.

“아니, 네가 오해되는 행동을 한다니까?”

“내가 뭘.”

“너 네가 누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몰라서…, 아니, 모르겠구나. 아이씨, 누나도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 말해 봐요!”

한도훈은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이더니 내 어깨를 짤짤 흔들며 재촉했다. 나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래. 이대로 계속 방치하는 것도 좋지 않아.’

내가 아무리 모쏠에 연애 고자여도 이렇게 놔두면 안 된다는 것은 알겠다. 결심을 세운 난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나도 가끔 오해하긴 해.”

“가끔이 아닐 텐데요?”

“넌 잠깐 조용히 있어 봐.”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가끔 하얀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이 그럴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도훈을 밀어서 치워 버리며 그사이에 굳어 버린 반휘혈에게 심각하게 말했다.

“네가 날 누나로서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근데 말이지, 휘혈아. 우리 말은 조금, 조금 가려서 하자…!”

그래, 이 기회에 솔직하게 말하고 넘어가자. 어설프게 넘어갔다간 나중에 그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곤란하다. 양다리나 어장 관리 하는 남자라는 인상이 심어지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것도 나랑! 그냥 누나, 동생 사이일 뿐인 나랑 말이다! 앞으로의 그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차차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무슨,”

반휘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설마 나도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꽤나 당황해했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같이 상처받은 모양새에 마음이 다 아파 왔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봐. 휘혈아. 재현이나 시원이, 아니면 도훈이가 너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좋아한다고 표현하면 어떻겠어?”

반휘혈은 내 말에 눈빛이 흔들리면서도 곧 진지하게 턱에 손을 올리며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되물었다.

“…뭐가 문젠데?”

“오….”

“너 진짜 중증이다….”

나는 그의 둔감함에 기겁을 넘어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한도훈마저 질린 듯 몸을 물리는 것을 보면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김시원은 안 그럴지 몰라도… 한도훈, 너나 이재현은 대놓고 좋다고 말하잖아.”

“쓰읍….”

나는 반휘혈의 반격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아, 그게 맞긴 맞는데…! 근데 좀 달라, 다르다고…! 한도훈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아니, 너랑 우리랑은 다르다니까…!”

“뭐가 어떻게 다른데.”

“와, 와-. 거울을 들고 다니면서 직접 보여 줄 수도 없고. …아니, 진짜 들고 다녀서 보여 줘?!”

반휘혈은 그런 한도훈을 이상한 놈 보듯 바라보았다.

“둘 다 바보야? 왜 말을 해 놓고 증거를 못 대?”

“억…!”

“야, 이…!”

갑자기 가만히 있다가 봉변 맞아 버렸다. 나는 골 때리는 이 상황에 뒷목을 잡았다. 한도훈을 참다못해 그에게 소리쳤다.

“야, 너 진짜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해져 봐! 네가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증명해 보겠다고 미국을 갈 리가 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음? 잠깐. 나는 뒷목을 잡다 말고 한도훈을 재빨리 돌아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증명? 증명이라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형이랑 잘 얘기해 보겠다며 떠났던 이유가,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고? …대체, 뭘?

“…앗.”

내 물음에 한도훈은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홧김에 내뱉은 것 같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를 의심스럽게 째려보다가 반휘혈을 돌아봤다. 반휘혈은 한도훈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나랑 관련 있던 거였어?”

설마, 설마 싶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티 나게 나를 외면해 버리자 그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 나는 얼얼하게 당겨 오는 뒤통수에 두 사람의 팔을 꽉 붙잡고 당겼다.

“야, 잠깐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

아무래도 우리들의 대화 타임은 끝나질 않을 모양이었다. 마침 시간도 딱 2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도방고등학교는 이 시간에 체조 시간으로 5분을 더 주었기에 시간이 좀 더 여유로웠다. 나는 스산히 얼굴을 굳히며 다시 창고에 들어와 반휘혈에게 캐물었다.

“휘혈이, 너 미국 간 거 진짜 나 때문이야?”

“…….”

반휘혈은 내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의도와는 별개로 나는 그 침묵에서 긍정을 찾아냈다. 나는 아파 오는 골치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이번엔 한도훈에게 물었다.

“도훈이, 너 지난번 별장에서 휘혈이에게 무슨 말 했다고 했지. 그게 이거랑 관련 있어?”

“…….”

한도훈도 내 질문에 대답하질 않았다. 누가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쌍으로 똑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나오는 탄식을 막지 못했다.

“하아…. 내가 진짜, 너희들을 어쩌면 좋냐아아….”

어쩐지 너무 충동적으로 굴더라니. 나는 한 손은 옆구리를 지지하고, 남은 한 손은 이마를 붙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애들아.”

“…….”

“…….”

나는 점점 솟구치는 화를 꾹 억누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두 번 말 안 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가려진 손 틈 너머로 그들을 싸늘히 노려보며 마지막 경고를 내뱉었다.

“당장, 말해.”

안 그러면 너희들 내 얼굴 다신 못 볼 줄 알아.

***

“…하아.”

내 마지막 경고에 두 사람은 결국 사건의 전말을 알려 줬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으나, 끝내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아니, 이걸, 아니, …아오, 진짜.”

나는 뒷목을 잡은 채 천장을 보았다. 이 망할 놈들을 어쩜 좋지?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의 줄무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내 앞에서 한껏 위축된 두 놈이 보였다.

“애들아.”

“…….”

“…….”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부름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별다른 탓을 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깔끔하게 한 대만 맞고 끝내자.”

내 제안에 두 사람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하지만,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보아 하니, 내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머리를 한 대씩 번갈아 때렸다.

콩, 콩.

“엥?”

“……?”

그런데 맞은 놈들의 얼굴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의아함이 번져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내가 일부러 가볍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바보들. 공부 머리만 좋으면 뭐 해? 내가 이런 걸로 엄청 화낼 줄 알았어?”

나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짜증스레 말했다.

“뭐가 됐든 형이랑 화해한 거잖아. 그리고 한도훈, 너도 나나 휘혈이랑 형 사이 걱정돼서 말한 거고. 뭘 그리 둘 다 쫄아 있어?”

물론 내가 이용됐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긴 했어도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만일, 둘 중 한 명이 이 사실을 먼저 내게 알려 줬다면 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거다. 사실 내가 화가 난 건 이 사실을 무슨 중대 비밀인 것처럼 내게 그동안 꽁꽁 숨겼다는 것이었다. …아니, 솔직히 별로 화도 안 났고 그저 어처구니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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