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미워할 수 없는 골칫덩어리들. (3)
“…잠깐만요. 화 안 났다면서 저흰 왜 때린 거예요?”
내 말을 잠잠히 듣던 한도훈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아, 듣다 보니깐 갑자기 입학식이 떠올라서. 휘혈이 너도 알고서 나한테 아무 말 안 했지?”
내 물음에 아무 말 없는 걸 보아 하니, 정곡이었나 보다. 나는 두 사람을 노려보다가 제 이마를 문질렀다.
“어휴, 내가 진짜 너희들 때문에 제 명에 못 산다, 못 살어.”
“누나, 굉장히 애늙은이 같….”
“시끄러, 이 녀석아.”
내가 화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한도훈의 긴장이 풀렸는지 그새를 못 참고 장난을 걸어 왔다. 다만, 그의 말이 마냥 틀린 게 아닌지라 나는 뜨끔하면서도 그 입을 막기 위해 볼을 꼬집었다.
“으아아….”
그의 곡소리를 충분히 듣다가 놓아 주자, 한도훈이 입을 삐죽이며 물러섰다.
“어휴, 아무튼 이걸로 또 내가 들어야 할 거 있어?”
“…없어요. 아마?”
아마, 라는 말이 걸렸지만 당장 해 줄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그냥 수긍해주기로 하며, 반휘혈을 보자 그도 딱히 더 해 줄 말이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어. 이따 점심에 보자.”
“네~.”
한도훈의 가벼운 대답을 뒤로 반휘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힘없이 웃으며 바라보다 문을 열고 나섰다.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진짜 피곤하구만.’
그것도 장성한 놈들…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사춘기의 남자애 두 명을 케어하고 있자니, 진이 다 빠졌다. 왠지 반에 돌아가면 바로 책상에 엎어질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단을 내려서다가 문득, 떠오른 한 가지에 한도훈을 돌아봤다.
“아, 맞아. 도훈이 너도 우리 반 오기 전에 나한테 연락 주고 와.”
“엥, 왜요?”
그는 내 말에 이상한 걸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오면 소란스러워져서 귀찮아져.”
특히, 얘는 반휘혈보다 연락이 더 필요한 놈이었다. 이 자식은 우리 반에 올 때마다 사건을 화려하게 터트려 주고 갔기 때문이었다.
“제가 뭘 했는데요?”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나는 태평한 녀석의 되물음에 할 말을 잃고 보다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하라고.”
“우우-. 제멋대로야. 아, 알았어요. 알았어. 연락할게요.”
한도훈은 엄지를 내리며 야유를 보냈으나, 내가 말없이 노려보자 그는 입을 삐죽이며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골칫덩어리들이었다.
***
“이나야!”
“오, 드디어 왔네. 수업 시작 30초 전 정도 되나?”
“…아니, 15초 전.”
반휘혈과 한도훈, 그 두 사람과 헤어지고 반에 도착하자 나를 반기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이혜인은 안경희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려 시계를 보곤 울상을 지었다.
“으아, 왜 나는 너희들이랑 자리가 먼 건데!”
그녀는 그 사실이 꽤 억울한지 머리를 움켜쥐며 발을 동동거렸다. 고찬영과 안경희를 그런 그녀를 애석히 바라보았다.
“어쩌겠어. 우리가 운이 좋은걸.”
고찬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과 동시에 경쾌한 음을 자랑하는 종이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고찬영은 싱긋 웃곤 가벼이 손을 흔들며 이혜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네-. 그럼 다음 쉬는 시간을 이용해 주세요.”
“으앙~ 얄미워 죽겠어! 이나야, 나 올 때까지 얘기하지 말아 버려!”
이혜인이 내 팔을 꽉 안으며 고찬영을 노려봤다.
“그런 섭섭한 말을! 이런 특혜는 이용해 줘야 사람 된 도리 아니겠어?”
“나, 나도 궁금한데….”
“흥이다! 그럼 이건 절친의 특권이야!”
“어허, 앞으로 친구님의 절친은 나라니깐.”
“아니거든! 이나의 절친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나거든?!”
“애들아, 그만 싸워….”
나는 세 사람이 왁자지껄하며 떠드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눈을 깜빡였다. …너희,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거야? 나도 모르는 새에 부쩍 가까워진 세 사람이었다. 물론 안경희는 아직 우물쭈물한 느낌이 있지만, 그렇게까지 어색한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이 상황이 어안이 벙벙한 한편, 갑자기 소외감이 느껴져 눈을 굴리고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유치하고도 치열한 설전을 벌이던 고찬영이 벌떡 일어나 이혜인이 붙잡지 않은 다른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안 되겠다, 친구님. 오늘 당장 나랑 데이트야!”
“웃기지 마! 이나야, 나랑 가자, 나랑!”
억. 갑자기 양팔이 구속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이글거리며 노려보았다.
‘…어라? 나 이렇게 인기 많았나?’
정말 황당한 생각이었지만, 불쑥 드는 생각에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곤 나는 눈을 흐리게 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 돼….”
오늘은 체육관 가는 날이었다. 사실 빼먹고 안 가도 되긴 했지만,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놀만 한 기력이 없다는 게 컸다. 대충 기초 훈련만 하고 집에 가 버려야지, 하고 속으로만 결심하고 있는데,
“그럼 주말!”
“친구님, 골라 봐. 얘야, 나야?! 물론 알 만큼 안 오래된 친구보다 모르는 게 많은 새로운 친구인 나겠지?!”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겼다. 나는 그런 둘을 떨떠름하게 보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다 같이 놀자.”
이번 주말에 쉬는 건 글렀구나. 체념하며 그들에게 제안하자, 두 사람은 잠시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게 가장 나은 절충안이란 걸 깨닫고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어쩔 수 없지.”
합의를 마치자, 이혜인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조용해진 주위에 그제야 자리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돌렸다.
“아, 경희 너도 시간 되지?”
그러고 보니 얘 의견은 안 물어봤네. 나는 불현듯 드는 생각에 혹시나 싶어 옆자리에 있는 안경희에게 물었다. 그러자 생각도 못 한 말을 들은 것처럼 안경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나, 나도…?”
“응? 안 돼?”
그럼 곤란한데…. 이혜인과 고찬영이 아까처럼 유치하게 싸우게 된다면, 나 혼자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난처히 얼굴을 찌푸렸다.
“아, 아니이…! 서, 설마 나도 가는 줄 몰라서!”
그러자 안경희가 깜짝 놀라며 말을 바로잡았다.
“오. 경희, 너도 된다는 거지? 좋네, 좋아. 사람은 많을수록 재밌는 법이지.”
고찬영이 불쑥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까 이혜인과 씩씩거리던 기색은 다 어디로 던져 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나는 그를 떨떠름하게 보다가 문득, 그 혼자 남자임을 떠올렸다.
“야, 여자들뿐인데 괜찮겠어?”
보통 남자들은 여자애들 사이에 덩그러니 홀로 있으면 굉장히 불편해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영 혼자 있는 게 껄끄럽다면 서이수…는 체육관 일로 바쁘니깐 이재현이나 김시원이라도 부를까 싶었으나, 고찬영은 별 대수롭지 않게 내 말에 대답했다.
“괜찮은데? 나 여자애들이랑 노는 거 좋아해.”
“아, 응, 그래.”
왠지 들으면 안 될 걸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흐리며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 뭐야, 그 반응?”
“…아니, 아무것도.”
그러자 의아해하는 고찬영의 반응이 튀어나왔지만, 난 아무 말 하지 않고 외면했다. 그리고 책상에 팔꿈치를 대 손으로 턱을 괴며 피로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피곤하다, 정말.’
그리고 나는 남은 일정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길었던 학교생활을 마치고 방과 후가 찾아왔다. 어제까지 본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사라지던 고찬영은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보충 수업까지 마치고 하교했다. 덕분에 나와 함께 교실을 떠나는 처지가 되어 고찬영은 이혜인을 잔뜩 놀렸고, 이혜인은 그를 시샘하며 이를 갈아 댔다.
그리고 그 이후엔 반휘혈마저 마주쳐서 하마터면 마찰이 빚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두 사람은 그냥 다 같이 하교하는 걸로 합의를 봐 별말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아, 친구님. 나 체육관 놀러….”
“집에 가라.”
“쳇.”
“휘혈이, 너도.”
“…….”
혹시나 싶어 말하자, 반휘혈이 묘하게 불만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덕분에 그가 따라오려 했다는 걸 파악한 난 그의 등을 강하게 떠밀어 집으로 보내 버렸다. 그렇게 소소한 실랑이를 마친 후, 난 속이 얹힌 기분을 느끼며 체육관 문을 힘없이 열었다.
“안녕하세요.”
“…시원아아악.”
그러자 익숙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존재에 왈칵, 하고 치미는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힘없이 달려들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냥 네가 너무 반가워서.”
내 속을 가장 썩이지 않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물론 이재현도 그렇긴 했지만, 김시원은 그냥 존재 자체로 듬직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보니 그냥 보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그의 어깨에 힘없이 손을 올리며 늘어지자, 김시원이 의아하게 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소식 들었어요. 애들이 귀찮게 굴었다면서요.”
“그러니까아…!”
그의 무덤덤한 이 한마디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나는 감격에 젖으며 울상을 지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김시원은 내게 무뚝뚝한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눈에선 안쓰러움이 느껴졌기에 그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예의상이라도 이런 말 잘 안 하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난 배로 감격을 느꼈다.
“으윽! 너 이거 먹어.”
역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제과점에 들러 사 오길 잘했지. 자신의 현명한 선택에 속으로 건배를 외치며 가방 안에서 선물 꾸러미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건?”
“너, 이 집 슈크림 좋아하지?”
김시원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런 그의 반응에 뿌듯하게 웃었다.
사실 학교에서 반휘혈, 한도훈, 이재현, 심지어 서이수에게도 점심시간에 챙겨 줬던 화이트 데이 선물이었다. 선물을 받은 모두 다 기뻐해 줬고, 각자의 기호에 맞춰 챙겨 준 보람을 느끼게 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시원도 기쁘게 받아 주니, 더더욱 뿌듯함이 차올랐다.
“전 까먹은 줄 알았어요.”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얼핏 진지해 보였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봐 왔다고 나는 그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이 녀석은 원래부터 학교가 아니라 체육관에서 챙겨 줄 생각이었다. 선물이 슈크림이다 보니, 안의 크림이 녹을 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