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생각도 못 한 조합. (1)
“왜, 안 줘서 서운했어?”
“그것보단… 한도훈 그 새끼가 짜증 나서요.”
아하. 안 봐도 뻔히 그려지는 그 상황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김시원 이 녀석이 웬일로 티 나도록 좋아한다 싶었다. 한도훈, 걔는 한 번 장난칠 때마다 아주 속 뒤집어질 정도로 놀리더라…. 나는 용케 참았단 의미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슈크림을 같이 먹자고 김시원이 제안해 왔다. 거절할 이유 따윈 없었기에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우리는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너 손이 비었다? 받은 선물들 다 로커에 있는 거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슈크림을 입 안에 있는 슈크림을 꿀꺽 삼키며 묻자, 김시원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안 받았어요.”
“엥? 왜?”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냐하면, 김시원은 이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과 상반되게 디저트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너무 달아도 안 되고, 너무 안 달아도 안 되는 까다로운 취향의 소유자긴 했어도 분명 건네 온 선물 중엔 그의 취향이 있을 터였다.
‘분명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런 내 의아함을 알았는지 김시원이 나를 힐끔 보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안에 이상한 거 들어 있으면 기분 나빠서요.”
“…엥? 어, 뭐??”
나는 생각도 못 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순간 머릿속으로 연예인 썰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연예인에게 들어오던 선물 중엔 악질적인 장난이 섞여 있거나, 자신의 애정을 보인답시고 과한 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게, 설마, 이 아이들에게도 일어났다고?
“…헐.”
맙소사. 전혀 생각도 못 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거라 생각했던 탓이 컸다. 반휘혈도 같이 하교하는 내내 손이 비긴 했지만, 걔 성격상 남이 주는 선물을 함부로 받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별 간섭을 하지 않았었다.
“근데 고찬영 걔는 다 받았….”
나는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러고 보니… 걔가 오늘 받은 선물 중에 하나라도 먹은 게 있던가? 너무 많아서 줄어든 기미가 안 보인 걸 수도 있었고, 내가 아이들을 만난 사이에 먹었을 수도 있었다. 그저 우연히 내가 있을 때만 안 먹었…,
‘다기보단, 걔는 보통 그런 건 친구들이랑 나눠 먹으려 하지?’
불과 어제만 해도 매점에서 사 왔다고, 과자 하나를 같이 나눠 먹던 사이였다. 무엇보다 신나 하면서 내 입에 손수 넣어 주려고까지 한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바뀔 일은 없었다.
“…왜 받은 거지?”
유일하게 먹는 모습을 본 건 내가 준 머랭쿠키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 안에 있는 슈크림을 곱씹었다.
‘내일 물어봐, 말아?’
혹시라도 무거운 답변이 돌아올까 걱정이 들었다. 질문의 선이 참으로 애매해 고민하고 있던 중, 옆에서 말없이 우물우물 슈크림을 맛있게 먹고 있는 김시원이 눈에 들어왔다.
‘뭐… 타이밍 봐서 묻든 하자.’
어차피 지금 이런 고민은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잠시 고찬영에 대한 생각은 덮은 채 잘 먹는 김시원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요즘 학교생활은 어때? 친구는 사귀었어?”
듣자 하니, 김시원만 반이 떨어졌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반휘혈과 한도훈은 4반, 서이수와 이재현은 5반, 그리고 김시원은 6반. 워낙 무뚝뚝한 녀석이라 친구를 제대로 잘 사귀었을까 뒤늦은 걱정이 들었다.
“음….”
그런데 김시원은 입으로 들어가던 슈크림을 멈춰 세웠다. 그는 미간을 살풋 찡그리며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낯을 그렸다.
“친구, 인가…?”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스로도 잘 모르겠단 듯한 행동에 나도 같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친구가 별로야?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건 아니고… 음.”
김시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 턱을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응??”
아니, 그건 대체 무슨 관계야…? 내 눈가가 당황스러움에 파르르 떨려 왔으나,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어…, 그, 치, 친구는 어떤 애야?”
“음…….”
그러자 김시원은 한층 더 진지한 낯으로 고민에 잠겼다. 덩달아 나도 내 질문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었나 심각해지려던 중,
“…곰.”
“응?”
“동면에 빠진 곰이요.”
동면에 빠진 곰…. 뭐지, 이 난해한 대답은. 어떻게 답을 해야 될지 몰라 입이 막혔다.
“어, 누나 언제 왔어? 앗! 치사하게 둘만 맛있는 거 먹고! 나도 하나 줘!”
그럴 때 잠시 체육관을 비웠던 건지 아니면 방금 도착한 건지 모를 서이수가 나타났다. 서이수는 오자마자 나와 김시원이 슈크림을 먹고 있던 게 가장 먼저 들어왔는지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싫어.”
“아, 왜~!!”
“너 이미 받았잖아.”
“치사하게 그러기냐!!”
“그러게 누가 놀리래.”
나는 김시원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서이수를 보았다. 어쭈, 이것 봐라? 놀림감을 발견한 난 곧장 그를 향해 이죽댔다.
“얼씨구, 서이수 씨. 이게 무슨 소리죠~?”
“윽.”
자동 반사적으로 내가 놀리려고 하는 걸 눈치챘는지 서이수가 질색했다.
“아까 난 안 주냐고 서러워하던 놈은 누구죠~?”
“내, 내가 언제 그랬어! 아니, 그보단 그걸로 장난친 누나가 더 나쁜 거잖아!”
사실이었다. 김시원을 제외한 모두에게 준비했던 선물을 주던 때, 돌연 장난이 도진 난 서이수에게 네 건 없다며 시치미를 떼었던 일이 있었다. 서이수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하더니 온갖 배신과 서러움을 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덕분에 장난이 제대로 성공해 빵 터진 난 그에게 농담이라며 준비했던 과자를 주어 동생이 완전 삐지기 전에 사건은 빠르게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해서 김시원이 묵직한 총평을 날렸다.
“시스콤.”
“으하하하!!!!”
“악!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나는 배를 껴안으며 폭소했다. 서이수가 얼굴이 새빨개지며 항변했으나, 나와 김시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으이씨…! 아, 아무튼 방금 둘이서 무슨 얘기 하고 있던 건데?”
나는 동생의 급한 화제 변경에 다시 웃음이 터지려 했으나, 더 웃었다간 정말 삐질 것 같아서 억지로 웃음을 가라앉혔다.
“으하, 하…. 아~ 그냥 반에서 친구 잘 사귀었냐고 묻던 중이었어.”
나는 손을 내저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로 대답했다. 그런데 서이수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김시원을 돌아봤다.
“아, 그러고 보니 너 요즘 서강이랑 자주 다닌다며.”
“……응?”
아니, 잠깐만. 뭐, 뭐라고…? 나는 갑자기 들려온 난데없는 소식에 웃던 얼굴 그대로 쩍, 하고 굳어 버렸다.
“어쩌다 보니.”
게다가 김시원도 서이수의 말을 부정하질 않았다. 나는 삽시간에 얼굴을 굳히며 입을 벌렸다. 그 순간, 방금 들었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동면에 빠진 곰이요.’
…그게 전부 서강이였어?! 어, 잠깐. 생각해 보니깐 굉장히 맞는데…?! 정확히 서강이와 부합되는 이미지에 나는 경악하며 김시원을 보았다.
“아니, 어, 아니, 대체 어쩌다가…!”
너희 패거리 서로 사이 안 좋잖아! 어쩌려고 그런 관계가 된 건데?! 오늘만 해도 반휘혈이랑 최강혁이 한 판 붙은 것도 모자라 한도훈이 가지고 있는 이윤에 대한 혐오를 엿들었다. 그런 와중에, 이 녀석과 서강이한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 나도 궁금했어.”
서이수도 이 이야기가 꽤나 궁금했는지 김시원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물어 왔다.
“별거 없어요.”
그 별거 없는 내용이 진심으로 궁금하단다, 얘야. 나는 속으로 정색하며 이야기를 독촉했다.
“어, 그건 우리가 판단할게. 빨리 말해 봐.”
“안 그래도 도훈이 그 자식 이걸로 또 기분 나빠하더라. 걔 한번 수틀리면 엄청 귀찮아지는 거 알지? 나랑 누나가 잘 말해 줄 테니까 빨리 털어 봐.”
이 순간 나와 서이수는 그 누구보다 마음이 잘 맞았다. 우리가 합세해 이야기를 재촉하자 김시원은 귀찮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찮게….”
“어어. 나중엔 더 귀찮아져. 빨리 말해.”
“지금 우리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너 말 안 하면 여기서 못 벗어나. 우리 누나가 널 막을 것임.”
우리의 말에 김시원의 표정이 서서히 찌푸려지더니, 서이수의 말 마지막 대목에선 김시원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잠깐, 그 어떤 협박보다도 내가 막는 게 가장 귀찮았니, 시원아…? 나는 캐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으며 대충 서이수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내가 너 말할 때까지 안 놓을 거야. 아, 맞아! 아님 우리 내기할까? 스파링해서 이긴 사람 소원….”
“그냥 말할게요.”
말하다 보니 어쩐지 재밌어졌다. 그래서 점점 신이 나면서 말하는데, 김시원이 피로한 낯으로 불쑥 항복을 말했다.
“에이, 재미없게.”
“…양심 어딨어요?”
오랜만에 한 판 제대로 떠 볼까 기대했는데 한순간 맥이 빠졌다. 김시원이 어이없단 듯 날 바라보았다. 사실 그와 나의 경기 전적은 5전 5승. 내 연전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이길 싸움이었기에 내게 승산 있는 경기 쪽으로 밀어붙이니 김시원이 황당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얘랑 붙으면 나름 재밌는데.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자, 김시원은 난처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딴 거에 경기 걸지 마요. 그냥 말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