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생각도 못 한 조합. (2)
“오~ 김시원이~.”
나는 그 말에 감격하며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짜식, 멋지긴. 뭔가 남자답다란 말이 이해가 가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귀찮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놈을 바라보았다.
“…너 은근 멋있는 건 혼자 다 하더라?”
서이수가 재수 없다며 툴툴거렸으나 이 녀석 또한 김시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닌 모양인지 입가에 미소를 히죽거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너무 호들갑인 거지.”
“뭐래.”
두 녀석이 틱틱거리며 말이 오갔다. 그 장면이 왠지 흐뭇하게 다가왔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서이수가 이상한 친구 사귈까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는 게 어쩐지 감개무량하게 다가왔다. 나는 잠시 동안 서로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잠자코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타이밍을 봐 적당히 끼어들었다.
“그래서 서강이랑은 어쩌다가 친해진 거야?”
“아.”
“아, 맞아! 그거, 그거 어떻게 된 거야??”
서이수와 김시원은 그 잠깐 사이에 본 주제를 완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면서 김시원의 말을 기다렸다.
“짝이라서요.”
“…짝?”
아니, 앞뒤 상황 너무 잘라먹은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 나는 불쑥 나온 답에 납득이 가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 그래. 짝…, 짝이 되면 그럴 수 있지. 근데 그거뿐이라고??
“야, 너넨 이름순이나 제비뽑기 안 했어?”
그렇게 내가 혼란스러워하던 중, 서이수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놓친 부분을 깨닫곤 손뼉을 쳤다.
“어, 맞아. 그래. 둘이 원해서 짝이 된 건 아닐 거 아냐.”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진짜 말 그대로의 답이 아니란다! 답뿐만이 아니라 전후 사정이 궁금한 거라고! 나는 당장이라도 발끈할 것 같은 마음을 누르며 침착하게 되물어 다시 찬찬히 그의 설명을 재촉했다.
“음…. 그건 그렇죠.”
김시원도 내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앞뒤 상황에 대해 잠시 설명하기 귀찮아졌는지 미묘하게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양옆에 있는 우리 두 사람을 확인하곤 피곤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하아. 그러니까… 처음엔 제비뽑기로 자리가 정해졌는데, 제가 앞자리고 그 녀석은… 중간인가, 아무튼 그랬을 거예요.”
“오….”
나는 그 말에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김시원이 앞자리, 서강이가 중간 자리라. 잠깐, 보통 그러면….
“어, 그런데 왜 자리가 바뀐 거야? 저번에 놀러 갔을 때 너 뒷자리였잖아.”
그런데 서이수는 이 사실이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네가 뭘 알겠냐. 수업을 성실히 들었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그걸 확인케 하는 놈의 대답에 나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뒤에 애들이 칠판 안 보인다고 바꿨어.”
“그럴 줄 알았어.”
“헐.”
나는 김시원의 대답에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서이수는 어이가 없었는지 얼굴을 구기며 황당해했다.
“그런 이유로 자리 바꿔?”
“야, 너도 한 덩치 하면서 그것도 모르…. 아, 맞아. 너 중학교 땐 지금처럼 안 컸지.”
불과 1월에 봤을 때만 해도 서이수의 키는 170대 초반이었다. 그래서 그리 큰 키가 아니라 앞자리에 앉아도 지적을 그리 받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김시원은 큰 키에 근육도 꽤 붙어서 덩치가 큰 편이었다. 게다가 그가 곰이라고 평한 서강이도 그 별명에 걸맞게 대충 봐도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뒷자리로 강제 배정받았을 확률이 꽤 높았다.
그런데 서이수도 요즘 만만찮게 성장해서 꽤 키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걸 보면, 이 녀석 자리가 뒤편인 건가? 호기심이 어린 난 서이수에게 물었다.
“아무튼 그런 거야. 몰랐던 걸 보니깐 너 지금 뒷자린가 보다?”
“엉. 뽑기 운이 좋았지.”
서이수가 씩, 웃으며 자랑했다. 나는 마주 웃음으로써 그의 말에 대꾸해 주곤 김시원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짝이 된 건 알겠는데, 그런다고 친해지진 않잖아.”
사실 내가 그렇다. 수많은 짝이 나를 지나쳤지만, 대부분이 고만고만한 관계까진 진전이 돼도 그리 크게 친해지질 못했다. …뭐, 이 부분은 내 잘못이 가장 클 것 같지만 말이다.
“아… 그건.”
그런데 김시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우리를 상대하고 있을 때보다 더욱 귀찮은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그냥 놔두면 잠만 자서요.”
“응?”
“엥?”
나와 서이수가 그의 말에 동시에 반응했다. 김시원은 그런 우리 둘을 힐끔 보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애들은 그 자식 어려워하고… 놔두면 이동 시간에 이동도 안 하고 잠만 잘 것 같아서 몇 번 깨워 주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러다 서강이를 유일하게 챙길 수 있는 김시원의 존재가 담임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챙겨 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단다. 나는 이 기묘한 관계의 원인을 파악하자, 차마 동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생이구나, 너도.”
그냥 무시하면 알아서 누군가 어련히 챙겼을 텐데. 예를 들어, 반장이라든가 말이다.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데, 김시원은 참 의리 있고 좋은 놈이었다. 방금 스파링 붙어 보자는 내기를 반대한 것도 그 이유였다. 섣불리 했다가 아빠나 코치님, 회원 등등에게 걸려 골치 아픈 일 만들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스파링을 하는 걸 그 누구보다 반기면서 나를 배려해 그 시간을 최대한 미루는 멋진 놈이 바로 이놈이었다. 나는 애잔하면서도 대견한 마음을 가득 담아 김시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 근데 왜 너희 둘 점심도 같이 먹어?”
“…응?”
“아.”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히 점심만큼은 따로 먹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황당한 마음에 김시원을 보았다.
“처음엔 이윤이나 다정한이 왔었는데… 가끔 무슨 일인지 안 올 때가 있더라고. 안 깨우니깐 아예 굶어 버리고, 그러니까 더 귀찮아지고… 그래서 시간 봐서 안 온다 싶으면 깨워 줬는데 어쩌다가 같이 먹게 되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언제부턴가 오던 놈들이 아예 안 오고….”
“…….”
“…….”
아, 그러다가 그냥 굳어졌구나. 나는 눈을 흐리며 쓰게 웃었다. 왠지 그간의 김시원이 느꼈던 피로를 잠시나마 맛본 기분이었다. 나와 서이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한도훈은 서강이랑 노는 게 맘에 안 든다고 시비를 걸지.”
김시원은 말하면서도 기분이 나빴는지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은은하게 빡친 분위기를 뿜어 댔다. 그래서 난 그의 손에 조용히 슈크림 하나를 쥐여 주며 말했다.
“내가 걔 한 대 때려 줄게.”
“네.”
정말 기분이 안 좋았던지 말리는 시늉도 하질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난처히 볼을 긁적였다. 나는 지금 상황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건 그리 원치 않았다. 안 그래도 최강혁 패거리랑 이번에 싸워서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내부 분열이 일어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 근데 누나. 누나는 한도훈 그 녀석이랑 어떻게 화해한 거야? 오늘 갑자기 기분 좋아 보이던데.”
“아. 그냥 대화로 잘 풀었어.”
“걔도 가만 보면 누나한테 엄청 약하더라.”
서이수는 들고 있던 슈크림 하나를 냠, 하고 날름 먹으며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누나, 날이 갈수록 소문 장난 아니던데, 괜찮겠어?”
“와, 진짜 듣고 싶지 않다.”
서이수의 말에 바로 소름 돋는 팔을 쓸어내렸다. 나도 소문이 장난 아니게 퍼지는 거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해 듣질 못했다. 대충 맥락만 파악한 정도에 그친 정도였다.
물론 알려고 하면 금방 알 수 있겠지. 내겐 그 누구보다 듬직한 정보통, 안경희가 있으니깐 말이다.
“…내가 들은 게 여러 가지 있긴 한데, 그 와중에 난 누나가 이제까지 그거 안 들킨 게 더 용한 것 같은데.”
그거, 라고 말을 돌렸으나 여기 있는 모두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김시원은 서이수의 말에 동감이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좀 신기해.”
그리고 그 생각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정체가 안 들킨 게 기적 같았다. 물론 꽁꽁 싸맨 전적이 있어 분간이 안 될 수 있지만, 소문을 적당히 걷어 내고 객관적으로 살피면 바로 조커=나 로 직결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 근데 그거 한도훈이 손 쓴 것도 있을걸요.”
“도훈이가?”
“네. 전에 하는 말 들었어요. 대충 입막음을 좀 시킨 게 있던 것 같던데요.”
…입막음? 굉장한 단어를 들은 기분에 내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러다 곧 굳어진 얼굴을 펴기 위해 두 손으로 문지르며 눈을 굴렸다.
“음. 뭐, 좋은 거겠지?”
“…난 가끔 누나가 융통성이 좋은 건지 그냥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어.”
“뭐, 인마?”
욕 같은 말에 동생 놈을 잠깐 흘겨보았다. 곧 막막함이 머릿속을 지나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내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순 없잖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겠는가. 걔가 그러고 싶다면 내가 말릴 순 있어도 그저 조언에 그칠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한도훈의 행위에 가장 이득을 본 게 바로 나였고 말이다.
“너무 비인도적이지만 않으면 그만이지.”
“뭐, 그렇죠.”
“그건 그래.”
그치? 나는 두 사람의 공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 사안을 넘겼다. 이런 건 너무 깊이 파고드는 게 아니었다. 적당히 빠질 땐 빠지는 게 서로의 관계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니겠는가. 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이젠 운동하자. 시간 많이 지났다.”
“어.”
“네.”
두 사람은 내 말에 흔쾌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쓰레기를 치우고 있자, 김시원이 그런 내게 슬쩍 다가왔다.
“응? 무슨 일이야?”
더 할 말이 남았나 그를 보자, 김시원은 잠시 내 눈을 피하다가 다시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지금은 그렇지만, 다음에 해요.”
“어? 다음?”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잠시 생각하다가 곧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걸 깨닫자 빠르게 웃음이 내 얼굴에 퍼져갔다.
“하하! 아- 그래. 다음에 체육관 빌 때 한번 하자.”
아무래도 김시원은 나와의 스파링을 포기하기 어려웠나 보다. 귀여운 그의 한마디에 오늘 있었던 피로가 날아가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